목차
Ⅰ.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배경
1. 비운의 지식인, 홍경래
2. 서북지역의 지역적 특색, 그리고 차별
3. 서북지역의 상업의 발달 그리고 수탈의 증가
4. 격문을 통해 알아보는 난(亂)의 배경
Ⅱ. 홍경래의 난의 봉기군의 계층
1. 봉기군의 지도층
2. 병사들의 계층
Ⅲ. 홍경래의 난의 진행 과정
1. 준비 과정
2. 진행 과정
1) 봉기일로부터 열흘
2) 송림전투의 패배
3) 정주성에서의 농성
Ⅳ. 홍경래의 난의 결과와 영향
1. 홍경래의 난의 결과(실패 원인 분석)와 평가
2. 홍경래의 난의 영향
1. 비운의 지식인, 홍경래
2. 서북지역의 지역적 특색, 그리고 차별
3. 서북지역의 상업의 발달 그리고 수탈의 증가
4. 격문을 통해 알아보는 난(亂)의 배경
Ⅱ. 홍경래의 난의 봉기군의 계층
1. 봉기군의 지도층
2. 병사들의 계층
Ⅲ. 홍경래의 난의 진행 과정
1. 준비 과정
2. 진행 과정
1) 봉기일로부터 열흘
2) 송림전투의 패배
3) 정주성에서의 농성
Ⅳ. 홍경래의 난의 결과와 영향
1. 홍경래의 난의 결과(실패 원인 분석)와 평가
2. 홍경래의 난의 영향
본문내용
게 된다.
그러나 봉기군은 식량의 부족, 자체 지휘부 내부에서의 상인 출신 층의 배신 등과 초기 조직구조와 강령 등으로 인해 하층 농민층의 지지결여로 인한 호응 세력의 결여 등이 결국은 난을 실패로 끝나게 하였다.
2. 홍경래의 난의 영향
1) 항쟁의 여파
1811년의 봉기는 서북지방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홍경래군이 가산·박천 등지를 석권하고 있을 때, 그 영향을 받아 해주·황주·서울 등에서도 소요가 일어나고 있었다.
먼저 12월 28일 해주의 귀락방에서 수백명이 무리를 이루어 창과 칼, 몽둥이를 들고 횡행하면서 난동을 일으켰다. 황해병사의 장계에는 ‘관서의 적’과 서로 연결될 염려가 없지 않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을 보면 그들이 홍경래군의 봉기 소식을 듣고 여기에 호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황주 효진포에서는 1812년 1월 홍경래가 정주성을 지키고 있을 때, 뱃사람들이 마장리·용암리 등 12포구에서 3백여 호를 불질러 태우고 4명을 죽이는 등 난동이 일어났다. 이 또한 홍경래군의 봉기에 호응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2) 의의 및 한계
19세기 전반의 변란 가운데 대부분은 준비단계에서 고발되거나 가담자의 배반에 의해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그것은 아직도 주도층이 광범한 농민들을 동원할 수 있을 만큼의 역량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봉기를 일으키는 데 성공하여 집권층과 직접 무력대결을 벌인 것은 ‘홍경래의 난’이 유일한 사례이다. 홍경래가 남긴 상징적 영향은 매우 커서 난이 진압된 1812년 이후에 일어난 변란들 속에는 이른바 ‘홍경래 불사설’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는 홍경래가 죽지 않고 섬에서 살고 있다는 것으로서, 당시 변란을 도모하는 세력들에게 홍경래는 고무적이고 모범적인 본보기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이 난은 정치적으로 보면 신흥 상공업 세력과 기존 정치권력에서 배제된 몰락양반의 연합에 의해 추진된 반봉건 투쟁이었다. 이들은 군대를 조직하여 ‘이씨왕조’를 타도하려 하였으나, 그들 지도부 자체는 아직도 상당 부분 봉건적 색채를 띠고 있었다. 결국 홍경래 난이 지향한 것은 반봉건 투쟁이라는 측면보다는 지방행정권이나 세도정권에 대한 저항이라는 반정부적 차원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난의 모의나 진행 중에 토지 개혁이나, 신분제 폐지, 삼정의 개혁 등 가난한 하층 농민들을 위한 정책은 아무것도 구상되지 않았다. 격문에서는 단지 서북인에 대한 차별대우, 세도정권의 가렴주구, 정진인의 출현 등만을 언급하였고, 정작 소농과 빈민층의 절박한 문제는 대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난을 패배로 이끈 가장 중요한 원인이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회적 모순이 누적되고 있었던 당시에 조선 왕조 타도라는 기치를 내걸고 4개월 동안 항쟁을 지속한 일은 그 후 반봉건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또 하층농민으로 하여금 전제왕권과 지배제를 부정하는 정치적 각성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홍경래 난이 끝난 후 민간에는 정감록이나 해도진인, 미륵신앙과 함께 홍경래 불사설이 끊임없이 돌았다.
홍경래 난은 근대 초에 일어난 민중항쟁의 선구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전반기의 소요들이 대부분 이를 모형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 난에서는 홍경래를 비롯한 ‘저항지식인’ 들과 장사층이 봉기를 조직하고 이끌었다. 이들은 경제 형편과 사회적 처지에 있어서 농민과 별로 다를 바 없었으므로, 그들은 의식과 행동 면에서 농민들과 강한 친화력을 가졌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중간 실력자들이 농민들 중에서 군대를 뽑아올리게 하였으므로, 농민들은 자발적으로 봉기군에 가담하지 못하고 중간 향반층을 통해 참여하였다. 봉기군의 전세가 급격하게 약화된 것도 이런 주력부대가 가진 취약성에도 원인이 있다. 빈민층의 자발적인 참여는 이후 민란의 단계로 발전되었다.
모순으로 얼룩진 왕조의 운명을 재촉한 저항 지식인 홍경래와 농민들의 이러한 만남은 19세기 조선사회를 저항의 시대로 열어나가는 원동력을 제공하였다. 농민전쟁이 끝난 뒤어도 홍경래를 본받아 반란을 꿈꾸는 자들이 각지에서 나타났고 농민들의 저항의식은 커져만 갔다. 그들에게 홍경래는 죽어 사라져버린 존재가 아니었다. “홍경래가 살아있다.” “정주성에서 죽은 홍경래는 가짜다.” “홍경래가 우리를 도우러 온다.” 등등의 이야기가 홍경래가 죽은 지 10년이 넘도록 떠돌아다녔다.
비록 실패로 끝났으나 조선 봉건사회의 붕괴해체 속에서 생성된 것이며, 또한 봉건조선왕조의 붕괴에 한층 박차를 가한 커다란 분수령이 되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홍경래의 난'을 경험한 일반 농민층은 봉건정부의 일방적인 강압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이 난을 계기로 의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즉 관세 거납현상(관세 내는 것을 거부)이 한층 두드러지게 성행하였으며, 이 같은 소극적인 반항형태를 넘어 점차 행동에 호소하는 경향을 띠어갔으며, 명화적과 같은 무력항쟁이 점차 더 만연하여 일반화해 갔던 것이다. 따라서 '홍경래의 난'은 1860년대의 임술민란과 1894년대의 동학농민전쟁등과 단절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존재하며 일정한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이 이 난이 주목받는 이유이다.
- 참고 문헌-
1. 민란의 시대, 고성훈 외 지음, 가람기획, 2000
2. 모반의 역사, 한국역사연구회 지금, 세종서적, 2001
3. 전통시대의 민중운동(하), 고승제 외 지음, 풀빛, 1981
4. 최항기 역사소설 '홍경래의 난', 최항기, 함께읽는 책, 2006
5. 고쳐 쓴 한국 근대사, 강만길, 창작과 비평사, 1994
6. 근현대 지역 갈등의 양상과 그 추이, 김상태, 한림대 인문학 연구소, 2003
7. 북한 역사소설 <홍경래>와 서북, 남상권, 반교 어문학회, 2005
8. 조선후기 경상도, 평안도 지역 차별의 비교, 오수창, 역사비평, 2002
9. 18세기 평안도 저항세력 성장의 사회적 배경, 오수창, 한국문화, 1997
10. 조선후기 평안도 지역 차별의 극복 방향, 오수창, 역사비평, 1996
11. '홍경래난'의 성격, 정석종, 한국사연구회, 1972
12. http://100.naver.com/100.nhn?docid=171987,네이버 백과사전 '홍경래'
그러나 봉기군은 식량의 부족, 자체 지휘부 내부에서의 상인 출신 층의 배신 등과 초기 조직구조와 강령 등으로 인해 하층 농민층의 지지결여로 인한 호응 세력의 결여 등이 결국은 난을 실패로 끝나게 하였다.
2. 홍경래의 난의 영향
1) 항쟁의 여파
1811년의 봉기는 서북지방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홍경래군이 가산·박천 등지를 석권하고 있을 때, 그 영향을 받아 해주·황주·서울 등에서도 소요가 일어나고 있었다.
먼저 12월 28일 해주의 귀락방에서 수백명이 무리를 이루어 창과 칼, 몽둥이를 들고 횡행하면서 난동을 일으켰다. 황해병사의 장계에는 ‘관서의 적’과 서로 연결될 염려가 없지 않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을 보면 그들이 홍경래군의 봉기 소식을 듣고 여기에 호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황주 효진포에서는 1812년 1월 홍경래가 정주성을 지키고 있을 때, 뱃사람들이 마장리·용암리 등 12포구에서 3백여 호를 불질러 태우고 4명을 죽이는 등 난동이 일어났다. 이 또한 홍경래군의 봉기에 호응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2) 의의 및 한계
19세기 전반의 변란 가운데 대부분은 준비단계에서 고발되거나 가담자의 배반에 의해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그것은 아직도 주도층이 광범한 농민들을 동원할 수 있을 만큼의 역량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봉기를 일으키는 데 성공하여 집권층과 직접 무력대결을 벌인 것은 ‘홍경래의 난’이 유일한 사례이다. 홍경래가 남긴 상징적 영향은 매우 커서 난이 진압된 1812년 이후에 일어난 변란들 속에는 이른바 ‘홍경래 불사설’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는 홍경래가 죽지 않고 섬에서 살고 있다는 것으로서, 당시 변란을 도모하는 세력들에게 홍경래는 고무적이고 모범적인 본보기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이 난은 정치적으로 보면 신흥 상공업 세력과 기존 정치권력에서 배제된 몰락양반의 연합에 의해 추진된 반봉건 투쟁이었다. 이들은 군대를 조직하여 ‘이씨왕조’를 타도하려 하였으나, 그들 지도부 자체는 아직도 상당 부분 봉건적 색채를 띠고 있었다. 결국 홍경래 난이 지향한 것은 반봉건 투쟁이라는 측면보다는 지방행정권이나 세도정권에 대한 저항이라는 반정부적 차원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난의 모의나 진행 중에 토지 개혁이나, 신분제 폐지, 삼정의 개혁 등 가난한 하층 농민들을 위한 정책은 아무것도 구상되지 않았다. 격문에서는 단지 서북인에 대한 차별대우, 세도정권의 가렴주구, 정진인의 출현 등만을 언급하였고, 정작 소농과 빈민층의 절박한 문제는 대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난을 패배로 이끈 가장 중요한 원인이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회적 모순이 누적되고 있었던 당시에 조선 왕조 타도라는 기치를 내걸고 4개월 동안 항쟁을 지속한 일은 그 후 반봉건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또 하층농민으로 하여금 전제왕권과 지배제를 부정하는 정치적 각성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홍경래 난이 끝난 후 민간에는 정감록이나 해도진인, 미륵신앙과 함께 홍경래 불사설이 끊임없이 돌았다.
홍경래 난은 근대 초에 일어난 민중항쟁의 선구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전반기의 소요들이 대부분 이를 모형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 난에서는 홍경래를 비롯한 ‘저항지식인’ 들과 장사층이 봉기를 조직하고 이끌었다. 이들은 경제 형편과 사회적 처지에 있어서 농민과 별로 다를 바 없었으므로, 그들은 의식과 행동 면에서 농민들과 강한 친화력을 가졌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중간 실력자들이 농민들 중에서 군대를 뽑아올리게 하였으므로, 농민들은 자발적으로 봉기군에 가담하지 못하고 중간 향반층을 통해 참여하였다. 봉기군의 전세가 급격하게 약화된 것도 이런 주력부대가 가진 취약성에도 원인이 있다. 빈민층의 자발적인 참여는 이후 민란의 단계로 발전되었다.
모순으로 얼룩진 왕조의 운명을 재촉한 저항 지식인 홍경래와 농민들의 이러한 만남은 19세기 조선사회를 저항의 시대로 열어나가는 원동력을 제공하였다. 농민전쟁이 끝난 뒤어도 홍경래를 본받아 반란을 꿈꾸는 자들이 각지에서 나타났고 농민들의 저항의식은 커져만 갔다. 그들에게 홍경래는 죽어 사라져버린 존재가 아니었다. “홍경래가 살아있다.” “정주성에서 죽은 홍경래는 가짜다.” “홍경래가 우리를 도우러 온다.” 등등의 이야기가 홍경래가 죽은 지 10년이 넘도록 떠돌아다녔다.
비록 실패로 끝났으나 조선 봉건사회의 붕괴해체 속에서 생성된 것이며, 또한 봉건조선왕조의 붕괴에 한층 박차를 가한 커다란 분수령이 되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홍경래의 난'을 경험한 일반 농민층은 봉건정부의 일방적인 강압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이 난을 계기로 의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즉 관세 거납현상(관세 내는 것을 거부)이 한층 두드러지게 성행하였으며, 이 같은 소극적인 반항형태를 넘어 점차 행동에 호소하는 경향을 띠어갔으며, 명화적과 같은 무력항쟁이 점차 더 만연하여 일반화해 갔던 것이다. 따라서 '홍경래의 난'은 1860년대의 임술민란과 1894년대의 동학농민전쟁등과 단절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존재하며 일정한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이 이 난이 주목받는 이유이다.
- 참고 문헌-
1. 민란의 시대, 고성훈 외 지음, 가람기획, 2000
2. 모반의 역사, 한국역사연구회 지금, 세종서적, 2001
3. 전통시대의 민중운동(하), 고승제 외 지음, 풀빛, 1981
4. 최항기 역사소설 '홍경래의 난', 최항기, 함께읽는 책, 2006
5. 고쳐 쓴 한국 근대사, 강만길, 창작과 비평사, 1994
6. 근현대 지역 갈등의 양상과 그 추이, 김상태, 한림대 인문학 연구소, 2003
7. 북한 역사소설 <홍경래>와 서북, 남상권, 반교 어문학회, 2005
8. 조선후기 경상도, 평안도 지역 차별의 비교, 오수창, 역사비평, 2002
9. 18세기 평안도 저항세력 성장의 사회적 배경, 오수창, 한국문화, 1997
10. 조선후기 평안도 지역 차별의 극복 방향, 오수창, 역사비평, 1996
11. '홍경래난'의 성격, 정석종, 한국사연구회, 1972
12. http://100.naver.com/100.nhn?docid=171987,네이버 백과사전 '홍경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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