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래의 난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홍경래의 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홍경래 난의 발생배경
2. 홍경래 난의 준비과정
3. 홍경래 난의 전쟁과정
4. 홍경래 난의 특징
5. 홍경래 난의 역사적 의의
6. 홍경래 난의 한계

Ⅲ. 결론

본문내용

알 수 있다. 권내현, 「홍경래, 왕조에 도전한 평민 지식인」, (서해문집, 2005), p. 27.
즉 홍경래는 기존의 이씨 왕조를 무너뜨리고 정감록 사상에 의한 새로운 정씨 왕조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정감록 사상은 봉기군의 결속을 강화하고 민심을 얻어 중앙권력에 강력히 대응하기 위하여 이용되었다. 그러나 실제 홍경래와 그 지휘부는 정감록 사상을 이용해 민심을 얻는 데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정감록 사상을 농민들이 알고 있기는 했지만 그리 영향이 크지는 않았으며, 홍경래를 비롯한 지도자들이 농민을 난의 주체가 아닌 객체로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2. 홍경래 난의 준비과정
난의 주동자인 홍경래는 본관은 남양이며 평안도 용강 출신으로 출생 연도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1770년생으로 추정되고 있다. 홍경래에 대해서는 그가 몰락 양반이라거나 평민이었다는 설이 있다. 홍경래는 경제적으로 매우 빈곤한 형편이었으며, 그의 외숙인 유학권(柳學權)에게 글을 배우고 19세에는 평양에서 열린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시험에 실패하고 집을 나와 풍수를 보는 지관이 되어 유랑생활을 하며 당시 조선사회의 문제들을 인식해가기 시작한다. 홍경래는 풍수뿐만 아니라 유교 경서에 대한 지식도 풍부하였다고 하며, 당시 유행하던 정감록 사상에도 통달하였다고 한다. 거기다 상당한 무술실력까지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미 지도자로서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저항적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가진 홍경래는 풍수를 직업으로 하여 조선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당시 세도정치로 고통을 당하는 백성들의 모습을 경험하면서,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가지고 이것을 개혁하려는 포부를 가지게 되었다. 이런 결심에는 그동안 자신이 느껴왔던 서북인들에 대한 차별에 대한 반감 또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무엇보다 홍경래는 정감록 사상을 이용함으로써 자신과 함께 난을 일으킬 자신의 세력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홍경래의 난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체로 최고지휘부를 구성하게 되는 지식층들과 장사(壯士)들, 그리고 상인, 토호세력, 농민들이었다. 우선 홍경래와 함께 난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활동한 이로 우군칙(禹君則)을 들 수 있다. 우군칙은 난이 발생하기 이미 10년 전부터 홍경래와 뜻을 같이 하고 함께 동지들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홍경래는 지식층의 포섭을 위하여 홍삼장사를 하기도 했으며, 상인층과 관계가 많았던 우군칙은 중간층 및 상인층의 포섭에 나서서 활약하였다고 한다. 고성훈외, 『민란의 시대』, (가람기획, 2000), p. 155.
그리고 이희저(李禧著)는 가산의 부호로 난의 자금을 부담하였으며, 홍총각(洪總角)과 이제초(李濟初)는 뛰어난 힘을 바탕으로 군사들을 지휘하는 장수로서의 역할을 맡았다. 이 외에도 벼슬에 대한 제한에 불만을 품은 김창시(金昌始), 정주성의 거부 이침(李琛)과 김속하(金續河), 개성 상인 박광유(朴光有)와 홍용서(洪龍瑞) 등을 끌여들였고, 우군칙의 제자로 뛰어난 지략을 지닌 김사용(金士用)도 포섭하여 최고지휘부를 구성하게 되었다.
최고지휘부 다음으로는 상인과 부민 세력들이 있다. 평안도 지역에서는 상인을 비롯한 부민들에 대한 수탈이 특히 강했었기 때문에 이들은 조선왕조와 체제에 대한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난을 수행함에 있어서 자금을 마련하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홍경래를 비롯한 최고지휘부들은 상인들을 포섭하는 것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이유로 난의 구성원으로 참여한 여러 상인세력들은 거사 단계부터 후에 난을 발생시키는데까지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홍경래 난의 경제력을 뒷받침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상인세력들과 함께 난의 주요한 동력으로 활동한 토호지주나 향임층 등의 세력이 있었다. 이들은 특히 난의 봉기 과정에서 난의 세력들과 내응을 하여 쉽게 지역을 장악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세력이었다.
다음으로 나머지 군사들로는 일반민들을 동원하여 참여하게 하였는데, 처음 동원된 병사들은 주로 광산노동자로 위장하여 모집한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광산노동자로 모집되어 참여한 이들은 땅 없는 농민이나 빈민, 소상인, 마부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지휘부가 제시한 돈을 받기 위하여 참여한 이들이었기 때문에 용병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희근, 『주제로 보는 한국사』, (고즈윈, 2005), p. 190.
때문에 자발적으로 난에 참여하고자 한 사람들은 아니었으며, 자발적인 참여는 후에 일단 봉기가 성공하면서 이루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렇게 홍경래의 난에는 최고지휘자인 홍경래와 평안도 지역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회계층의 인물들이 참여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경제력이 없고 신분도 미천했던 홍경래가 이런 세력들을 모으고 지휘할 수 있었던 배경은 다른 지역들에 비해 사회적 계층 사이의 구분이 덜 뚜렷했던 평안도의 지역적 특수성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오수창, 「19세기 초 중국 팔괘교란(八卦敎亂)과 비교한 홍경래란(洪景來亂)의 정치적 특성」,(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06), p. 222.
3. 홍경래 난의 전쟁과정
홍경래를 비롯한 난의 주도자들은 가산의 다복동(多福洞)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난을 준비해나갔다. 이들은 1810년 11월 무렵부터 구체적으로 난을 준비하기 시작하여 다음 해 11월이 되자 모든 준비가 끝나고 이미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병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주동자들은 난을 일으키는 일시를 1811년 12월 20일로 정하고 그 이전에 평양에서 건물을 폭파하는 등 소요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단순한 화재로 그치고 말았다. 또 다복동으로 모든 세력들이 결집하여 그 지역이 크게 소란스러워지자 선천부사 김익순(金益淳)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 조사를 하였고 결국 이들이 난리를 일으킬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따라서 김익순은 급히 이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게 되었고 홍경래와 주도자들은 거사일을 18일로 바꾸어 다급히 봉기하게 되었다.
봉기군은 가산 박천 안주
  • 가격1,500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08.03.13
  • 저작시기2007.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54993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