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론
1. 북한산의 고려시대 불상
(1)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
(2) 구기동 마애석가여래좌상
(3)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상
2. 북한산의 고려시대 사찰 : 진관사
결론
1. 북한산의 고려시대 불상
(1)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
(2) 구기동 마애석가여래좌상
(3)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상
2. 북한산의 고려시대 사찰 : 진관사
결론
본문내용
산의 고려시대 사찰 : 진관사
진관사는 1011년 고려 현종이 진관대사를 위해 창건한 절이다. 만 1년 동안 공사하여 1012년 가을에 준공되었다. 건립 당시 대웅전이 사방 10칸, 동·서 승당이 30칸으로 지어질 만큼 대규모의 사찰이었다. 또한 불상, 장엄구 등 사찰 생활에 필요한 물품 일체를 현종이 지원하였다.
현종이 이렇게 각별하게 진관대사를 챙긴 이유는 바로 그의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현종이 왕위 계승자(대량원군)로 있던 시절 목종의 어머니인 천추태후가 자신의 아이를 왕위에 올리기 위해 현종을 죽이려고 했다. 이 때 진관대사의 도움으로 3년 동안 삼각산의 암자에 숨어 지내며 목숨을 구하고 무사히 왕위에 올랐다. 은혜를 갚으려는 현종은 진관대사의 이름을 따서 절 이름을 짓고 진관대사를 국사로 책봉하기에 이른다.
진관사의 명성은 조선시대로 이어져 태조 때 대규모의 수륙사를 짓고 조선 건국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고려왕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수륙재를 지내는 왕실 사찰로서의 역할도 하게 되었다. 이후 6.25 전쟁으로 단 3채의 전각만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다가 현대에 이르러 다시 재건되어 지금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진관사를 둘러보니 예전의 명성에 비해 현저히 작아진 규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풍경만큼은 이곳이 서울이라는 것을 잊게 만들었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푸른 숲에 화강암 바위가 빛나고 절 바로 옆에 있는 계곡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까지 들렸다. 마치 산수화나 다름없는 풍경을 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왜 그토록 아끼고 가꿨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4. 답사를 마치며
서울에 과연 고려시대 유적이 남아 있을까? 처음 과제를 접했을 때 굉장히 막막했다. 내가 흔히 알고 봤던 서울의 유물과 유적은 주로 조선시대의 것이 대부분이었고 고려시대의 유물과 유적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봤던 고려청자나 개성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경천사지10층석탑 정도였다. 하지만 자료를 찾아보고 실제로 답사를 다녀와 보니 그동안 내가 얼마나 무관심하고 무지했는지 깨달았다. 등산하는 것을 좋아해서 북한산은 수도 없이 많이 올라갔던 곳이다. 그러나 정상을 찍고 내려오는 데만 관심이 있었고 절은 그저 하산길에 화장실에 들르거나 운 좋게 절밥을 먹을 수 있는 곳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 사찰에 이렇게 멋진 불상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뼈저리게 반성하고 있다.
길고 긴 세월동안 한반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서울. 나중에 여행업에 종사하기 원하는 나는 그 누구보다 서울에 대해 많이 알고 있고 공부 또한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다. 이번 답사를 계기로 아직도 멀었다는 것을 배웠다. 앞으로 더욱더 열심히 공부하고 답사도 하면서 서울에 대한 지식을 넓혀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시간이 생기면 지난 강의시간에 교수님께서 던지신 질문의 답인 ‘도봉서원 터’에도 꼭 한 번 가보고 싶다.
5. 답사 사진
6. 참고 자료
<단행본>
- 한국문화유산답사회, 2004, 답사여행의 길잡이 15 : 서울, 돌베개
- 권동희, 2012, 한국의 지형, 한울
진관사는 1011년 고려 현종이 진관대사를 위해 창건한 절이다. 만 1년 동안 공사하여 1012년 가을에 준공되었다. 건립 당시 대웅전이 사방 10칸, 동·서 승당이 30칸으로 지어질 만큼 대규모의 사찰이었다. 또한 불상, 장엄구 등 사찰 생활에 필요한 물품 일체를 현종이 지원하였다.
현종이 이렇게 각별하게 진관대사를 챙긴 이유는 바로 그의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현종이 왕위 계승자(대량원군)로 있던 시절 목종의 어머니인 천추태후가 자신의 아이를 왕위에 올리기 위해 현종을 죽이려고 했다. 이 때 진관대사의 도움으로 3년 동안 삼각산의 암자에 숨어 지내며 목숨을 구하고 무사히 왕위에 올랐다. 은혜를 갚으려는 현종은 진관대사의 이름을 따서 절 이름을 짓고 진관대사를 국사로 책봉하기에 이른다.
진관사의 명성은 조선시대로 이어져 태조 때 대규모의 수륙사를 짓고 조선 건국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고려왕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수륙재를 지내는 왕실 사찰로서의 역할도 하게 되었다. 이후 6.25 전쟁으로 단 3채의 전각만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다가 현대에 이르러 다시 재건되어 지금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진관사를 둘러보니 예전의 명성에 비해 현저히 작아진 규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풍경만큼은 이곳이 서울이라는 것을 잊게 만들었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푸른 숲에 화강암 바위가 빛나고 절 바로 옆에 있는 계곡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까지 들렸다. 마치 산수화나 다름없는 풍경을 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왜 그토록 아끼고 가꿨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4. 답사를 마치며
서울에 과연 고려시대 유적이 남아 있을까? 처음 과제를 접했을 때 굉장히 막막했다. 내가 흔히 알고 봤던 서울의 유물과 유적은 주로 조선시대의 것이 대부분이었고 고려시대의 유물과 유적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봤던 고려청자나 개성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경천사지10층석탑 정도였다. 하지만 자료를 찾아보고 실제로 답사를 다녀와 보니 그동안 내가 얼마나 무관심하고 무지했는지 깨달았다. 등산하는 것을 좋아해서 북한산은 수도 없이 많이 올라갔던 곳이다. 그러나 정상을 찍고 내려오는 데만 관심이 있었고 절은 그저 하산길에 화장실에 들르거나 운 좋게 절밥을 먹을 수 있는 곳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 사찰에 이렇게 멋진 불상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뼈저리게 반성하고 있다.
길고 긴 세월동안 한반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서울. 나중에 여행업에 종사하기 원하는 나는 그 누구보다 서울에 대해 많이 알고 있고 공부 또한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다. 이번 답사를 계기로 아직도 멀었다는 것을 배웠다. 앞으로 더욱더 열심히 공부하고 답사도 하면서 서울에 대한 지식을 넓혀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시간이 생기면 지난 강의시간에 교수님께서 던지신 질문의 답인 ‘도봉서원 터’에도 꼭 한 번 가보고 싶다.
5. 답사 사진
6. 참고 자료
<단행본>
- 한국문화유산답사회, 2004, 답사여행의 길잡이 15 : 서울, 돌베개
- 권동희, 2012, 한국의 지형, 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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