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개요
2. ‘박씨전’의 줄거리 분석
3. 등장인물 분석
1) 박씨부인
2) 이시백
3) 이득춘
4) 박처사
5) 계화
6) 용골대(龍骨大) 장군
4. 작품의 배경분석: 병자호란(丙子胡亂)과 조선후기 사회의 변화상 분석
1) 격동의 시기였던 명·청교체기
2) 병자호란(丙子胡亂)
3) 전후복구: ‘환향녀(還鄕女)’의 비극과 노동력 부족으로 인한 능력주의 부상에 대한 분석
5. 소설 ‘박씨전’의 갈등구조 분석.
1) 집 안에서의 갈등구조의 원인 및 그 형성과정 분석.
2) 이전 갈등의 해결 및 새로운 갈등구조의 형성과 그 무대의 확장에 대한 분석.
6. 소설 ‘박씨전’을 통해 드러난 조선시대 여성의 변화
1) 여성주도의 갈등해결구조.
2) 박씨전을 통해 바라보는 조선 후기의 여성의 지위변화.
7. 결론
2. ‘박씨전’의 줄거리 분석
3. 등장인물 분석
1) 박씨부인
2) 이시백
3) 이득춘
4) 박처사
5) 계화
6) 용골대(龍骨大) 장군
4. 작품의 배경분석: 병자호란(丙子胡亂)과 조선후기 사회의 변화상 분석
1) 격동의 시기였던 명·청교체기
2) 병자호란(丙子胡亂)
3) 전후복구: ‘환향녀(還鄕女)’의 비극과 노동력 부족으로 인한 능력주의 부상에 대한 분석
5. 소설 ‘박씨전’의 갈등구조 분석.
1) 집 안에서의 갈등구조의 원인 및 그 형성과정 분석.
2) 이전 갈등의 해결 및 새로운 갈등구조의 형성과 그 무대의 확장에 대한 분석.
6. 소설 ‘박씨전’을 통해 드러난 조선시대 여성의 변화
1) 여성주도의 갈등해결구조.
2) 박씨전을 통해 바라보는 조선 후기의 여성의 지위변화.
7. 결론
본문내용
아닐 수 없다.
2) 박씨전을 통해 바라보는 조선 후기의 여성의 지위변화.
조선이라는 국가는 유교를 기반으로 한 사상인 ‘성리학(性理學)’을 주요 지배이념으로 삼았다. 성리학은 중국 남송 때의 주자[朱子: 본명은 주희 (朱熹)]라는 유학자에 의해 수립된 사상이자 학문으로 유교를 그 베이스로 하고 있다. 조선이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채택한 이유는 이전의 고려왕조가 불교를 숭상하였기 때문에 조선 초기의 유학자들은 불교를 배척할 필요성이 있었고 성리학의 창시자인 주희가 불교를 통렬하게 비판하였다는 점에서 고려와의 차별화를 꾀하던 조선의 주목을 끌 수밖에 없었다.
이후 조선의 주요 지배사상이 되었던 성리학은 점차 조선에 그 뿌리를 내리게 되는데 조선왕조 초기~ 중기까지는 이전 고려왕조 때부터 이어져오던 풍습이 남아 아직 그 영향력이 발휘되지 않았으나 임진왜란 이후 신분제등 국가 질서의 붕괴를 우려한 조선 지배층은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성리학적인 이념을 더욱 강화하게 된다. 성리학의 원전인 유교는 신분의 고저를 인정하고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면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설파하였으며 유교를 계승한 성리학도 이러한 부분을 인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주자는 본인이 활동하던 당시 남송의 제사의례가 너무 형식적이고 번잡한 것을 지적하며 이를 본인의 기준에 맞게 간소화 및 정리를 하면서 후학들에게 본인이 정한 절차를 모두 지킬 필요 없이 상황에 맞춰 이를 적절하게 응용하라는 실용적인 당부까지 하였다.
하지만 조선이 어떤 나라인가, 왕이 상복을 며칠 입어야 하는지를 정하느라 당파싸움을 벌이던 국가 아닌가. 조선의 조정은 이러한 주자의 실용적인 가르침을 뒤로한 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성리학을 고쳐나갔다. 신분제를 더욱 강화하고 ‘남존여비(男尊女卑)’를 강화하여 여성들의 위치를 확 낮추어버린다. 조선 중기까지만 하더라도 여성들의 지위는 유교국가인 조선의 남성들과 동등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조선후기처럼 낮은 위치는 결코 아니었다. 조선 전기의 여성들은 사실상 고려시대와 별 차이가 없는 여성적 지위를 누렸으며 조선중기까지만 하더라도 여성들의 지위는 남성들에 비해 낮다고 할 수 없었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여류 문인인 ‘신사임당’, ‘황진이’, ‘송덕봉’, ‘허난설헌’, ‘매창’ 등은 모두 조선중기에 활동한 여성들로 이러한 여성 문인들의 존재는 어느 정도의 사회적 지위를 누릴 수 있었으며 공부도 할 수 있었음을 의미하는 좋은 예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 지배계층의 이러한 시도는 거듭된 외적의 침입을 막지 못하는 지배계층의 무능으로 인해 그 존재이유에 대한 의문까지 품게 만들었다. 공자의 가르침에 따르면 각자의 위치에서 본분을 다 할 때 세상이 잘 돌아갈 수 있다고 하였건만 지배계층이 할 일을 제대로 못하니 이에 대한 불만이 쌓일 수 밖 에 없었다.
이러한 사회변화에 위협을 느낀 조선의 지배계층은 성리학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강화해나가려 노력하였지만 근본적인 변화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우선 전쟁 이후의 상황이라 노동력이 매우 부족하였다. 임진왜란에서 병자호란에 이르는 지속된 전란으로 인해 남성들의 수가 크게 줄어들어 기존에 남성들이 행하던 일을 일정부분 여성들이 행하였고 양반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몰락양반이 등장하여 신분제의 저변은 그 기반부터 무너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더 이상 여성들을 그저 집안일이나 하는 존재로 치부하지 않고 그녀들이 가진 능력과 역할을 인정하는 실용적인 사고방식으로 전환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눈앞에서 남자들이 하던 일을 척척 해내는데 이를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세태는 사람을 더 이상 신분이나 성별에 의해 구분 짓지 않고 그 능령에 따라 대우하는 풍토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능력을 인정받는 여성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그녀들도 사회의 일원으로 당당히 자리매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이를 작품 속에서 잘 묘사해낸 것이 바로 박씨전이라고 볼 수 있다.
7. 결론
지금까지 박씨전에 대하여 분석을 하여보았다. 박씨전은 오늘날 전해 내려오는 고전 들 중 특이하게도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다. 박씨전의 판본이 약 70여종이 존재하고 전해 내려오는 것을 보면 그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었는지를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당시에는 사람이 직접 전해 듣고 이를 필사하는 형태로 책이 만들어졌는데 인기가 없는 작품이라면 이러한 수많은 판본들이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은 당시의 독자들에게 일종의 심리치료와 같은 역할을 하였는데 이전에 조공을 바치던 여진족이 자신들을 지배하는 현실에 대한 강한 울분, 오랑캐로 치부하던 이들에게 임금이 머리 숙여 항복 선언을 한 삼전도의 굴욕과 이후의 험난했던 노역 생활 등으로 인한 분노를 조금이나마 위로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작품 속에서 여주인공들의 활약은 당시 가장 약자의 위치에 있던 조선 여인들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는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박씨전은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이 되는 작품이다. 이전에는 그저 조선의 청나라에 대한 일종의 ‘정신승리’의 산물 정도로 치부되어 오다가 최근에는 ‘페미니즘(Feminism) 열풍’에 힘입어 남존여비의 국가인 조선에서 여성을 주제로 한 작품으로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시대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여성에 의해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모습이 당시 여성들의 능력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있음을 암시하는 작품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박씨전은 오늘날에도 충분히 주목받을 만한 작품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이 작중 박씨가 보여준 인내와 여성 특유의 따듯하고 자애로운 모습이다. 그녀는 자신이 받은 박대를 보복하지 않고 여성 특유의 따뜻함으로 이를 감싸주고 도리어 선함(내조에 충실하고 국가를 지켜냄)으로 보답을 하여 집안과 국가에 모두 기여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현대 뿐 아니라 미래에도 새롭게 주목할 만한 가치가 아닐까 한다. 앞으로는 박씨의 이러한 따뜻함에 주목하여 이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함을 제안하며 글을 마무리하도록 하겠다.
2) 박씨전을 통해 바라보는 조선 후기의 여성의 지위변화.
조선이라는 국가는 유교를 기반으로 한 사상인 ‘성리학(性理學)’을 주요 지배이념으로 삼았다. 성리학은 중국 남송 때의 주자[朱子: 본명은 주희 (朱熹)]라는 유학자에 의해 수립된 사상이자 학문으로 유교를 그 베이스로 하고 있다. 조선이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채택한 이유는 이전의 고려왕조가 불교를 숭상하였기 때문에 조선 초기의 유학자들은 불교를 배척할 필요성이 있었고 성리학의 창시자인 주희가 불교를 통렬하게 비판하였다는 점에서 고려와의 차별화를 꾀하던 조선의 주목을 끌 수밖에 없었다.
이후 조선의 주요 지배사상이 되었던 성리학은 점차 조선에 그 뿌리를 내리게 되는데 조선왕조 초기~ 중기까지는 이전 고려왕조 때부터 이어져오던 풍습이 남아 아직 그 영향력이 발휘되지 않았으나 임진왜란 이후 신분제등 국가 질서의 붕괴를 우려한 조선 지배층은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성리학적인 이념을 더욱 강화하게 된다. 성리학의 원전인 유교는 신분의 고저를 인정하고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면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설파하였으며 유교를 계승한 성리학도 이러한 부분을 인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주자는 본인이 활동하던 당시 남송의 제사의례가 너무 형식적이고 번잡한 것을 지적하며 이를 본인의 기준에 맞게 간소화 및 정리를 하면서 후학들에게 본인이 정한 절차를 모두 지킬 필요 없이 상황에 맞춰 이를 적절하게 응용하라는 실용적인 당부까지 하였다.
하지만 조선이 어떤 나라인가, 왕이 상복을 며칠 입어야 하는지를 정하느라 당파싸움을 벌이던 국가 아닌가. 조선의 조정은 이러한 주자의 실용적인 가르침을 뒤로한 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성리학을 고쳐나갔다. 신분제를 더욱 강화하고 ‘남존여비(男尊女卑)’를 강화하여 여성들의 위치를 확 낮추어버린다. 조선 중기까지만 하더라도 여성들의 지위는 유교국가인 조선의 남성들과 동등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조선후기처럼 낮은 위치는 결코 아니었다. 조선 전기의 여성들은 사실상 고려시대와 별 차이가 없는 여성적 지위를 누렸으며 조선중기까지만 하더라도 여성들의 지위는 남성들에 비해 낮다고 할 수 없었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여류 문인인 ‘신사임당’, ‘황진이’, ‘송덕봉’, ‘허난설헌’, ‘매창’ 등은 모두 조선중기에 활동한 여성들로 이러한 여성 문인들의 존재는 어느 정도의 사회적 지위를 누릴 수 있었으며 공부도 할 수 있었음을 의미하는 좋은 예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 지배계층의 이러한 시도는 거듭된 외적의 침입을 막지 못하는 지배계층의 무능으로 인해 그 존재이유에 대한 의문까지 품게 만들었다. 공자의 가르침에 따르면 각자의 위치에서 본분을 다 할 때 세상이 잘 돌아갈 수 있다고 하였건만 지배계층이 할 일을 제대로 못하니 이에 대한 불만이 쌓일 수 밖 에 없었다.
이러한 사회변화에 위협을 느낀 조선의 지배계층은 성리학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강화해나가려 노력하였지만 근본적인 변화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우선 전쟁 이후의 상황이라 노동력이 매우 부족하였다. 임진왜란에서 병자호란에 이르는 지속된 전란으로 인해 남성들의 수가 크게 줄어들어 기존에 남성들이 행하던 일을 일정부분 여성들이 행하였고 양반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몰락양반이 등장하여 신분제의 저변은 그 기반부터 무너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더 이상 여성들을 그저 집안일이나 하는 존재로 치부하지 않고 그녀들이 가진 능력과 역할을 인정하는 실용적인 사고방식으로 전환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눈앞에서 남자들이 하던 일을 척척 해내는데 이를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세태는 사람을 더 이상 신분이나 성별에 의해 구분 짓지 않고 그 능령에 따라 대우하는 풍토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능력을 인정받는 여성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그녀들도 사회의 일원으로 당당히 자리매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이를 작품 속에서 잘 묘사해낸 것이 바로 박씨전이라고 볼 수 있다.
7. 결론
지금까지 박씨전에 대하여 분석을 하여보았다. 박씨전은 오늘날 전해 내려오는 고전 들 중 특이하게도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다. 박씨전의 판본이 약 70여종이 존재하고 전해 내려오는 것을 보면 그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었는지를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당시에는 사람이 직접 전해 듣고 이를 필사하는 형태로 책이 만들어졌는데 인기가 없는 작품이라면 이러한 수많은 판본들이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은 당시의 독자들에게 일종의 심리치료와 같은 역할을 하였는데 이전에 조공을 바치던 여진족이 자신들을 지배하는 현실에 대한 강한 울분, 오랑캐로 치부하던 이들에게 임금이 머리 숙여 항복 선언을 한 삼전도의 굴욕과 이후의 험난했던 노역 생활 등으로 인한 분노를 조금이나마 위로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작품 속에서 여주인공들의 활약은 당시 가장 약자의 위치에 있던 조선 여인들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는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박씨전은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이 되는 작품이다. 이전에는 그저 조선의 청나라에 대한 일종의 ‘정신승리’의 산물 정도로 치부되어 오다가 최근에는 ‘페미니즘(Feminism) 열풍’에 힘입어 남존여비의 국가인 조선에서 여성을 주제로 한 작품으로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시대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여성에 의해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모습이 당시 여성들의 능력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있음을 암시하는 작품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박씨전은 오늘날에도 충분히 주목받을 만한 작품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이 작중 박씨가 보여준 인내와 여성 특유의 따듯하고 자애로운 모습이다. 그녀는 자신이 받은 박대를 보복하지 않고 여성 특유의 따뜻함으로 이를 감싸주고 도리어 선함(내조에 충실하고 국가를 지켜냄)으로 보답을 하여 집안과 국가에 모두 기여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현대 뿐 아니라 미래에도 새롭게 주목할 만한 가치가 아닐까 한다. 앞으로는 박씨의 이러한 따뜻함에 주목하여 이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함을 제안하며 글을 마무리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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