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세계관\"의 정의
Ⅱ. 히브리 및 기독교 세계관의 비교
Ⅲ. 기독교와의 비교
Ⅱ. 히브리 및 기독교 세계관의 비교
Ⅲ. 기독교와의 비교
본문내용
관심사로 이 주제에 대해 썼다.
관습이나 태도를 승인 받을 필요는 없지만 기독교에서는 상대방의 문화적 관점을 존중하라고 가르친다. 우리도 우리 생활방식을 배운 것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그 속한 문화 안에서 그 요소가 일부가 되는 통합된 생활방식을 배웠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화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이들도 그것을 올바른 생활 방식으로 받아들였다. 문화적인 관습은 그들의 적절한 문화적 상황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하지만 문화를 넘어서는 윤리 규범을 부인하는 것은 안 된다. 그 방향으로의 변화를 옹호하는 쪽으로 한 걸음으로써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에는 서구 기독교인이 무슬림에게 그리스도를 그의 구세주로 받아들이라고 말할 때 무슬림이 경험할 수 있는 장애물을 일부 적어보았다:
1. 두 세계관 사이에 강한 충돌
2. 무슬림이 갖고 있는 깊은 국수적인 이슬람의 관점
3. 문화적으로 도덕적으로 이슬람에게 열등하게 보이는 소위 기독교 서구
4. 변화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
5. 강한 개인적인 자부심
6. 기독교는 자신들의 필요를 상관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표6은 외형적인 행동 기준에 대해서보다 세계관의 변화에 대해서 작업할 필요가 있음을 명확히 지적해준다. 이러한 형태의 증거는 무슬림 세계관의 깊은 층까지 파고들어 그들의 필요를 중심으로 다뤄주는 것이다. 한 사람이 확신을 갖고 세계관에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하면 그의 행동에도 변화를 받는 영향력이 나타날 것이다. 즉, 변화 과정에서 우리는 행동이 아니라 그들의 세계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것은 세상적인 행동 패턴 변화가 중요하지 않다고 최소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부과하고 지배함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오히려 이것은 개인이 깊이 확신하게 되면서 온다. 그러면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헌신은 더욱 안정되고 영구해질 것이다.
에버릿 로저스(Everett Rogers)와 플로이드 슈메이커(Floyd Shoemaker)는 서구에서조차 혁신은 잘 받아들여지지 않고 회의론과 부딪힐 때가 많다고 설명한다. 잡종 옥수수 씨앗이 아이오와에 완전히 정착하기까지는 14년이 걸렸다고 한다. 미국의 공립학교는 유치원 제도를 채택하는 데 50년이 걸렸으며 최근에도 현대 수학을 채택하는데 5년이 걸렸다는 것이다. ;;;각주25??? 변화를 미국보다 훨씬 더 주저하는 문화에서라면 얼마나 더 큰 인내가 필요하겠는가?
표6
세계관의 변화에 따른 원심력적 물결 효과
편집자주: 이 표6은 작업이 더 필요합니다. 90쪽 원래 책에 있는 것처럼 만드십시오.???
주: 주변적인 행동 변화를 강행할 때 세계관을 공격하게 되면서 불협화음과 붕괴를 일으키게 되는 데 이것은 그것과 대조된다.
무슬림은 예수 그리스도를 온 인류를 위한 초문화적 메시지의 주창자로 봐야 한다. 선교사들은 복음이 선포되는 사회의 가치 체계 속에 잘 맞는 방식으로 화해의 말씀을 제시해야 한다. 세계관의 변화 및 무슬림의 충성은 사회적인 혼란을 최소화하면서 어떤 과정으로서 수행되어야 한다.
내부-외부 지지자
크래프트는 내부 지지자와 외부 지지자를 이스트와 다이나마이트에 비교하면서 그 차이점을 간결히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와 만나신 장면을 생각해보면 엄청난 장면들이 나온다. 지진. 하나님께서 거기 계셨는가? 아니다. 불 속에 계셨는가? 아니다. 태풍? 아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세미한 작은 음성이었다. 다이나마이트라기 보다는 이스트이다. 경쟁심에 불타오르는 사람들은 이런 방법을 얘기한다. “가서 그들을 망치로 산산조각내 버려라. 새로 짓기 위해서는 파괴해야 한다” 나는 하나님의 접근법은 그 문화를 그대로 집어서 그 문화와 그들의 세계관의 중심된 개념에 호소해야 한다고 본다. 안으로부터의 변화시킬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사람들과 사회의 내부 핵심에 영향을 미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생명을 무슬림에게 전하려면 그 일을 시도해야만 한다. 이 장을 마무리하면서 이러한 목표를 이루는데 도움이 될 몇 가지 사항을 제시하겠다.
1. 무슬림 리더들과 만나야 한다. 일반 및 종교 지도자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은 매우 드물다. “괜히 건드리지 말라”가 이들의 철학이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신분 사회에서 우정은 어떠한 명백한 반대입장도 무효화 시킬 것이다.
2. 그 다음으로 낮은 레벨의 지도자를 중요한 전도 대상자로 삼는다. 의견을 내는데는 리더이지만 주목을 받는 자리에 있지 않은 이런 리더들이 많은 경우에는 다른 옵션을 고려하는데 마음이 열려있다. 또한 이들은 공동체에서 존경받는 일원이다.
3. 전도 초기 단계에, (타겟 그룹 내에서) 사회적으로 거부된 이들의 무리가 증거의 초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첫 번째 회심자가 이 그룹에서 나오면 기독교의 이미지가 매우 형편없게 될 것이고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기가 쉬워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들을 돌려보내거나 신자의 무리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4. 친구들이나 친척들 중 한 그룹이 초기 전도 대상이 되어야 한다. 혼자서 사회의 반대를 무릅쓰며 대항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여러 명이서 함께 공개적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공언할 수 있을 때가지는 비밀리에 신앙을 잘 지켜나갈 수 있도록 격려해주는 것이 최선일 수도 있다.
5. 초기 전도 단계에서는 아주 기본적인 중요한 변화만 소개해야 한다. 주변적인 가르침이나 변화에 대한 제안은 나중에 할 수도 있다.
6. 변화를 흡수하도록 적절한 시간이 주어져야 할 것이다. 종종 선교사는 한꺼번에 너무 많은 변화를 요구하는 잘못을 저지른다. 회심자는 그것이 너무 벅차서 매우 혼란스러워할 수 있다.
7. 타문화 전도에서는 가능한한 “내부인”이 되기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무슬림에게 그의 세계관은 매우 소중하다. 그것이 전 삶의 방식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세계관의 바로 핵심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 변화를 보여주고 자극하는 일을 맡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그 임무는 멋지고 도전적이며 때로는 끔찍하기도 하다. 하지만 변화되는 무슬림을 만나는 특권을 가진 우리에게 있어서 그 임무는 정말 가치있는 것이다!
관습이나 태도를 승인 받을 필요는 없지만 기독교에서는 상대방의 문화적 관점을 존중하라고 가르친다. 우리도 우리 생활방식을 배운 것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그 속한 문화 안에서 그 요소가 일부가 되는 통합된 생활방식을 배웠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화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이들도 그것을 올바른 생활 방식으로 받아들였다. 문화적인 관습은 그들의 적절한 문화적 상황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하지만 문화를 넘어서는 윤리 규범을 부인하는 것은 안 된다. 그 방향으로의 변화를 옹호하는 쪽으로 한 걸음으로써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에는 서구 기독교인이 무슬림에게 그리스도를 그의 구세주로 받아들이라고 말할 때 무슬림이 경험할 수 있는 장애물을 일부 적어보았다:
1. 두 세계관 사이에 강한 충돌
2. 무슬림이 갖고 있는 깊은 국수적인 이슬람의 관점
3. 문화적으로 도덕적으로 이슬람에게 열등하게 보이는 소위 기독교 서구
4. 변화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
5. 강한 개인적인 자부심
6. 기독교는 자신들의 필요를 상관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표6은 외형적인 행동 기준에 대해서보다 세계관의 변화에 대해서 작업할 필요가 있음을 명확히 지적해준다. 이러한 형태의 증거는 무슬림 세계관의 깊은 층까지 파고들어 그들의 필요를 중심으로 다뤄주는 것이다. 한 사람이 확신을 갖고 세계관에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하면 그의 행동에도 변화를 받는 영향력이 나타날 것이다. 즉, 변화 과정에서 우리는 행동이 아니라 그들의 세계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것은 세상적인 행동 패턴 변화가 중요하지 않다고 최소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부과하고 지배함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오히려 이것은 개인이 깊이 확신하게 되면서 온다. 그러면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헌신은 더욱 안정되고 영구해질 것이다.
에버릿 로저스(Everett Rogers)와 플로이드 슈메이커(Floyd Shoemaker)는 서구에서조차 혁신은 잘 받아들여지지 않고 회의론과 부딪힐 때가 많다고 설명한다. 잡종 옥수수 씨앗이 아이오와에 완전히 정착하기까지는 14년이 걸렸다고 한다. 미국의 공립학교는 유치원 제도를 채택하는 데 50년이 걸렸으며 최근에도 현대 수학을 채택하는데 5년이 걸렸다는 것이다. ;;;각주25??? 변화를 미국보다 훨씬 더 주저하는 문화에서라면 얼마나 더 큰 인내가 필요하겠는가?
표6
세계관의 변화에 따른 원심력적 물결 효과
편집자주: 이 표6은 작업이 더 필요합니다. 90쪽 원래 책에 있는 것처럼 만드십시오.???
주: 주변적인 행동 변화를 강행할 때 세계관을 공격하게 되면서 불협화음과 붕괴를 일으키게 되는 데 이것은 그것과 대조된다.
무슬림은 예수 그리스도를 온 인류를 위한 초문화적 메시지의 주창자로 봐야 한다. 선교사들은 복음이 선포되는 사회의 가치 체계 속에 잘 맞는 방식으로 화해의 말씀을 제시해야 한다. 세계관의 변화 및 무슬림의 충성은 사회적인 혼란을 최소화하면서 어떤 과정으로서 수행되어야 한다.
내부-외부 지지자
크래프트는 내부 지지자와 외부 지지자를 이스트와 다이나마이트에 비교하면서 그 차이점을 간결히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와 만나신 장면을 생각해보면 엄청난 장면들이 나온다. 지진. 하나님께서 거기 계셨는가? 아니다. 불 속에 계셨는가? 아니다. 태풍? 아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세미한 작은 음성이었다. 다이나마이트라기 보다는 이스트이다. 경쟁심에 불타오르는 사람들은 이런 방법을 얘기한다. “가서 그들을 망치로 산산조각내 버려라. 새로 짓기 위해서는 파괴해야 한다” 나는 하나님의 접근법은 그 문화를 그대로 집어서 그 문화와 그들의 세계관의 중심된 개념에 호소해야 한다고 본다. 안으로부터의 변화시킬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사람들과 사회의 내부 핵심에 영향을 미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생명을 무슬림에게 전하려면 그 일을 시도해야만 한다. 이 장을 마무리하면서 이러한 목표를 이루는데 도움이 될 몇 가지 사항을 제시하겠다.
1. 무슬림 리더들과 만나야 한다. 일반 및 종교 지도자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은 매우 드물다. “괜히 건드리지 말라”가 이들의 철학이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신분 사회에서 우정은 어떠한 명백한 반대입장도 무효화 시킬 것이다.
2. 그 다음으로 낮은 레벨의 지도자를 중요한 전도 대상자로 삼는다. 의견을 내는데는 리더이지만 주목을 받는 자리에 있지 않은 이런 리더들이 많은 경우에는 다른 옵션을 고려하는데 마음이 열려있다. 또한 이들은 공동체에서 존경받는 일원이다.
3. 전도 초기 단계에, (타겟 그룹 내에서) 사회적으로 거부된 이들의 무리가 증거의 초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첫 번째 회심자가 이 그룹에서 나오면 기독교의 이미지가 매우 형편없게 될 것이고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기가 쉬워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들을 돌려보내거나 신자의 무리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4. 친구들이나 친척들 중 한 그룹이 초기 전도 대상이 되어야 한다. 혼자서 사회의 반대를 무릅쓰며 대항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여러 명이서 함께 공개적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공언할 수 있을 때가지는 비밀리에 신앙을 잘 지켜나갈 수 있도록 격려해주는 것이 최선일 수도 있다.
5. 초기 전도 단계에서는 아주 기본적인 중요한 변화만 소개해야 한다. 주변적인 가르침이나 변화에 대한 제안은 나중에 할 수도 있다.
6. 변화를 흡수하도록 적절한 시간이 주어져야 할 것이다. 종종 선교사는 한꺼번에 너무 많은 변화를 요구하는 잘못을 저지른다. 회심자는 그것이 너무 벅차서 매우 혼란스러워할 수 있다.
7. 타문화 전도에서는 가능한한 “내부인”이 되기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무슬림에게 그의 세계관은 매우 소중하다. 그것이 전 삶의 방식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세계관의 바로 핵심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 변화를 보여주고 자극하는 일을 맡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그 임무는 멋지고 도전적이며 때로는 끔찍하기도 하다. 하지만 변화되는 무슬림을 만나는 특권을 가진 우리에게 있어서 그 임무는 정말 가치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