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모방(l'imitation, mimesis)
2. 예술의 유혹
3. 미와 예술적 창조
4. 미의 감수성(affection)의 역할에 대한 한 견해
2. 예술의 유혹
3. 미와 예술적 창조
4. 미의 감수성(affection)의 역할에 대한 한 견해
본문내용
는 것이 아니라. 감각의 세계를 초월해서 표현된다. 『향연』의 변증법은 이런 예술적 창조의 표현을 보여주고 있고, 이런 방식을 신플라톤주의로 연결되고 프루스트에서 다시 발견할 수 있다. [들뢰즈가 프루스트를 통하여 감각의 논리를 전개한 것은 괜한 우연이 아닐 것이다.]
4. 미의 감수성(affection)의 역할에 대한 한 견해
현대예술론의 한 화두거리로서, 예술작품이 어디에 있든 간에, 예술작품에서 우러나는 비의적(esoterique)현상을 아우라(Aura)라는 것이 있다. 우리는 이 아루라의 환상(phantasme, 비의적 현상이란 의미에서)을 비의적, 불가사의적, 주술적, 신비적, 내밀한 의미가 왜 생산되는가에 관심을 갖는다. 더 나아가, 이런 아우라의 전이에는 인간의 소망(독어로 Wunche, 불어번역 desir, 욕망)을 미래에 투영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라고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미래 참여적 투영을 실현이라는 것은 역사에서 인간본성의 실행이며, 시회적 실천에서 노력의 산물이다. 그러나 미래적 투영이기에 인간이 부여한 의미의 산물이다. 역사의 실천이 이루어지는 곳에는 아우라가 투영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역사의 자기 발전에서 의미체를 형성하는 아우라는 역사적 의식의 산물인셈이다.
정치의 예술화(나치의 선전술)과 예술의 정치화(소비에트 선전예술)는 둘 다 같은 위계에 속한다고 우리는 본다. 하나는 소박한 관념성을 강조했고 다른 하나는 통속적 유물론에 의탁한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역사와 진화를 드러내는 변장된 범신론으로서 질료형이상학 즉 질료변증법에서 예술의 생성론은 위의 둘과는 다른 위상에 있다.
『안티조선』사이트에서 미학방을 열고 있는 진중권님에 의하면, 영화 예술에서 아우라(Aura)가 작품에서 배우와 감독으로 옮겨갔다 해야 하지 않을까? 라고 한다. 아우라의 전이(transfer)라는 측면은 예술작품이 여기 '지금 있는 원 작품'에서 아우라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의 모방이라 할지라도 작품에 있다기보다 작품의 작가와 작가의 발굴자로서 이론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메타퍼는 작품의 현상에 있다기보다 작품이 갖는 시대성과 그 작품 생명성과 그리고 인간의 미래에 연결된 관점의 창조자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아우라의 장면을 연출할 수 있다. 아우라에 대한 자아의 환각은 자신을 잃어버린 환각에서 나온다. 그러나 자신을 유지하면서 오로라는 생산하는 것은 그 공동체의 전체와 단일자간의 연관에서 나온다. 이런 아우라는 자아상실에서 오는 전자의 지배방식과 달리, 후자의 경우는 내적 연관의 공감과 상호침투에 의한 일치감에서 온다. 이 후자의 위상적 연관은 새로운 공동체의 형성을 구체적이고 무매개적으로 느끼는 원형(archtype)이다. 여기서 이런 두 가지의 체험은 신비주의의 두 가지 양식과 닮았고, 인식론의 측면에서 존재의 두 속성을 인식하는 경우와 비유될 수 있다. 그리고 존재론적으로 존재의 의미를 두 위상으로 가지는 경우도 거의 같은 의미이다. 이런 것은 사유의 행태와 실천의 행태에 방향이 다른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사유는 시간의 근원으로서 원인성을 묻는다면, 실천은 미래에도 적용될 수 있고 유용할 수 있는 목적성(결과라는 의미는 아니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목적성은 관념론의 영원한 목적이나 종말론과 닮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지적해두자.
그리고 인민의 역사와 인간의 생명의 발전 진화의 과정에 인간적 생명적 노력의 과정과 노력의 결정(크리스탈)이 이해되고 감지될 때, 아우라는 빈 존재(빈 상자) 또는 무의미(무심한 대상)에 불현듯이 상징과 내용이 채워지고, 거기에 인간의 정서와 감화가 덧붙여진다. 이런 형성물(formation)은 단순히 대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감상자의 심성과 동화하여 새로운 형성체가 되어 감상자(보는 사람)를 이끌어 가기도 한다. 이런 대상이자 영향자이자 인도자이게 된 빈존재(존재론적 무(존재)도 논리적 비존재도 아니다)가 생성한 것이 아우라(정신분석적으로 감화, affection)이다. 다시 말하면, 신이라는 말뿐인 소리(signifiant, 중세의 의미에서 flatus vocis)에 개념 설정(signifie)이 덧붙여져서, 그것이 갑자기 존재론적으로 대상이 될 뿐만이 아니라(가벼운 반질거리는 종이조각 위의 그림 일뿐 것이) 인식론적으로 과거를 담고 미래에 참여하는 의미(그림 속에 추억과 삶의 흔적에 대한 이야기와 미래의 희망에 부풀었던 아련한 기억이 솟아나는 것으로)가 생겨난다. 이런 측면에서 완성과 충만에로의 의미를 들뢰즈(Deleluze, 1921-1955)는 『차이와 반복(1969)』에서 첨가한다(soutirer), 사색한다(contempler), 문제 제기한다(questionner) 라고 말한다. 인간이 왜 무의미한 한 장의 복사된 그림에서 인간의 과거 현재 미래를 투영하게될 때, 하찮은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새로운 의미를 창발한다. 마치 무의식이 의식으로 솟아나려는 것과 같기에 때문에, 꿈과 실언, 실수행위, 나아가 어린이의 행동, 미친 이의 이상한 행동이라 할지라도 프로이드가 의미 있다고 했듯이, 예술 작품에서 솟아오르는 이 새로운 창발은 그만큼 의미 있다. 이의미가 플라톤이 최고미에서 이루어지는 미로서 '미의 신성'과 같은 의미 일 것이다. 이 신성이 인식론적으로 최고라고 한다고 해서, 진리의 최고치, 도덕의 최고선, 종교의 최고 성스럼과 같은 위계 속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메타퍼에 속는 것이다. 이들은 서로 서로 위상적으로 다르다. 우리는 메타퍼에 속지 말자. 플라톤이 진리를 설명할 때조차도 선분의 비유와 동굴의 우화처럼 메타퍼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언어의 번역불가능성처럼, 종교의 성스럼을 언어로 말할 수 없다고 말했듯이. 예술의 미도 개념적으로 정의해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우리가 말(parole)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 글을 쓴다. 그래서 말로 표현되면서 개념에 이미 아우라가 묻어들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대화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은 이미 의미를 담고 있다.
4. 미의 감수성(affection)의 역할에 대한 한 견해
현대예술론의 한 화두거리로서, 예술작품이 어디에 있든 간에, 예술작품에서 우러나는 비의적(esoterique)현상을 아우라(Aura)라는 것이 있다. 우리는 이 아루라의 환상(phantasme, 비의적 현상이란 의미에서)을 비의적, 불가사의적, 주술적, 신비적, 내밀한 의미가 왜 생산되는가에 관심을 갖는다. 더 나아가, 이런 아우라의 전이에는 인간의 소망(독어로 Wunche, 불어번역 desir, 욕망)을 미래에 투영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라고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미래 참여적 투영을 실현이라는 것은 역사에서 인간본성의 실행이며, 시회적 실천에서 노력의 산물이다. 그러나 미래적 투영이기에 인간이 부여한 의미의 산물이다. 역사의 실천이 이루어지는 곳에는 아우라가 투영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역사의 자기 발전에서 의미체를 형성하는 아우라는 역사적 의식의 산물인셈이다.
정치의 예술화(나치의 선전술)과 예술의 정치화(소비에트 선전예술)는 둘 다 같은 위계에 속한다고 우리는 본다. 하나는 소박한 관념성을 강조했고 다른 하나는 통속적 유물론에 의탁한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역사와 진화를 드러내는 변장된 범신론으로서 질료형이상학 즉 질료변증법에서 예술의 생성론은 위의 둘과는 다른 위상에 있다.
『안티조선』사이트에서 미학방을 열고 있는 진중권님에 의하면, 영화 예술에서 아우라(Aura)가 작품에서 배우와 감독으로 옮겨갔다 해야 하지 않을까? 라고 한다. 아우라의 전이(transfer)라는 측면은 예술작품이 여기 '지금 있는 원 작품'에서 아우라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의 모방이라 할지라도 작품에 있다기보다 작품의 작가와 작가의 발굴자로서 이론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메타퍼는 작품의 현상에 있다기보다 작품이 갖는 시대성과 그 작품 생명성과 그리고 인간의 미래에 연결된 관점의 창조자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아우라의 장면을 연출할 수 있다. 아우라에 대한 자아의 환각은 자신을 잃어버린 환각에서 나온다. 그러나 자신을 유지하면서 오로라는 생산하는 것은 그 공동체의 전체와 단일자간의 연관에서 나온다. 이런 아우라는 자아상실에서 오는 전자의 지배방식과 달리, 후자의 경우는 내적 연관의 공감과 상호침투에 의한 일치감에서 온다. 이 후자의 위상적 연관은 새로운 공동체의 형성을 구체적이고 무매개적으로 느끼는 원형(archtype)이다. 여기서 이런 두 가지의 체험은 신비주의의 두 가지 양식과 닮았고, 인식론의 측면에서 존재의 두 속성을 인식하는 경우와 비유될 수 있다. 그리고 존재론적으로 존재의 의미를 두 위상으로 가지는 경우도 거의 같은 의미이다. 이런 것은 사유의 행태와 실천의 행태에 방향이 다른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사유는 시간의 근원으로서 원인성을 묻는다면, 실천은 미래에도 적용될 수 있고 유용할 수 있는 목적성(결과라는 의미는 아니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목적성은 관념론의 영원한 목적이나 종말론과 닮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지적해두자.
그리고 인민의 역사와 인간의 생명의 발전 진화의 과정에 인간적 생명적 노력의 과정과 노력의 결정(크리스탈)이 이해되고 감지될 때, 아우라는 빈 존재(빈 상자) 또는 무의미(무심한 대상)에 불현듯이 상징과 내용이 채워지고, 거기에 인간의 정서와 감화가 덧붙여진다. 이런 형성물(formation)은 단순히 대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감상자의 심성과 동화하여 새로운 형성체가 되어 감상자(보는 사람)를 이끌어 가기도 한다. 이런 대상이자 영향자이자 인도자이게 된 빈존재(존재론적 무(존재)도 논리적 비존재도 아니다)가 생성한 것이 아우라(정신분석적으로 감화, affection)이다. 다시 말하면, 신이라는 말뿐인 소리(signifiant, 중세의 의미에서 flatus vocis)에 개념 설정(signifie)이 덧붙여져서, 그것이 갑자기 존재론적으로 대상이 될 뿐만이 아니라(가벼운 반질거리는 종이조각 위의 그림 일뿐 것이) 인식론적으로 과거를 담고 미래에 참여하는 의미(그림 속에 추억과 삶의 흔적에 대한 이야기와 미래의 희망에 부풀었던 아련한 기억이 솟아나는 것으로)가 생겨난다. 이런 측면에서 완성과 충만에로의 의미를 들뢰즈(Deleluze, 1921-1955)는 『차이와 반복(1969)』에서 첨가한다(soutirer), 사색한다(contempler), 문제 제기한다(questionner) 라고 말한다. 인간이 왜 무의미한 한 장의 복사된 그림에서 인간의 과거 현재 미래를 투영하게될 때, 하찮은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새로운 의미를 창발한다. 마치 무의식이 의식으로 솟아나려는 것과 같기에 때문에, 꿈과 실언, 실수행위, 나아가 어린이의 행동, 미친 이의 이상한 행동이라 할지라도 프로이드가 의미 있다고 했듯이, 예술 작품에서 솟아오르는 이 새로운 창발은 그만큼 의미 있다. 이의미가 플라톤이 최고미에서 이루어지는 미로서 '미의 신성'과 같은 의미 일 것이다. 이 신성이 인식론적으로 최고라고 한다고 해서, 진리의 최고치, 도덕의 최고선, 종교의 최고 성스럼과 같은 위계 속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메타퍼에 속는 것이다. 이들은 서로 서로 위상적으로 다르다. 우리는 메타퍼에 속지 말자. 플라톤이 진리를 설명할 때조차도 선분의 비유와 동굴의 우화처럼 메타퍼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언어의 번역불가능성처럼, 종교의 성스럼을 언어로 말할 수 없다고 말했듯이. 예술의 미도 개념적으로 정의해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우리가 말(parole)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 글을 쓴다. 그래서 말로 표현되면서 개념에 이미 아우라가 묻어들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대화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은 이미 의미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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