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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지는 등 혼미한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황제로서의 그녀의 역량은 자신의 두 아들 중종과 예종을 폐위시킨 그녀의 야심을 추하게 보이지 않게 할 만큼 매우 뛰어난 것이었다. 뒤늦게 그녀를 폐출 시키려 했던 고종의 시고는 좌절되었고, 권신들도 속수무책, 그녀가 빨리 노쇠해지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705년 재상 장간지 등은 와병중인 그녀를 핍박, 중종을 다시 복위 시킴으로써, 다시 당왕조는 복귀되었다. 이때 그녀의 나이 82세였다.
이후, 중종의 황후인 위씨 등이 그녀를 흉내내어 제2의 측천무후를 꿈꾸었으나, 그 꿈은 다시는 실현되지 않았다.
여황제의 군림은 전통적 한족사회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에, 수, 당 제국의 황실에 유목민족의 혈통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축을 낳았다.
수 양제나 당 고종이 아버지의 비를 취한 것, 도용에 보이는 기마 여인상, 나아가서 제국의 개방적인 문화등도 이에 한몫을 거들고 있다.
실제로 수, 당의 황실은 북조의 명가 출신으로 순수 유목민족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이들을 흔히 '관농 집단'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무천진을 동향으로 하고 관농지방, 즉 위하 유역에 거점을 갖고 있었다. 무천진은 선비족의 왕조였던 북위의 토찰 엘리트들의 거점인 6진의 하나였다.
이들 관농 집단의 시조격인 인물은 서위의 우문태로, 그의 자는 흑달, 선비화한 흉노계의 부족 출신이다. 그의 아들 우문각은 마침내 정권을 탈취, 북주를 창건했다.
재미있는 거은 우문태의 협력자로 선비족 최고의 명가를 이룬 독고신이란 존재인데, 그는 장녀를 우문태의 장남에게, 4녀를 북주 최고의 명가인 이병에게, 7녀를 대장군 양충의 아들 즉, 수 문제 양견의 황후로 줌으로써, 북주, 수, 당 3대에 걸친 외척이 되는 기록을 남겼다. 이병의 아들 이연이 바로 당 고조이니, 수양제와 당고조는 이종사촌이었던 셈이다.
우리가 중국사에 대해 관심을 갖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그것이 우리의 역사를 보다 온전히 이해하는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사의 보편적인 흐름이 올바로 규명되는 속에서 한국사도 제 위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며, 일찍부터 한국사의 전개에 깊은 연관을 가졌던 동아시아, 그 중에서도 특히 중국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해야 하는 당위성은 새삼스레 논할 필요조차 없이 우리 모두가 공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갖고 있는 중국사에 대한 지식, 이해도는 어느 정도일까? 우리는 최소한 중국의 몇몇 왕조나 위대한 개인들의 이름, 혹은 이들과 관련된 일화나 고사성어 등을 알고 있으며, 아마도 중국의 고전 한두 가지 정도를 접해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의 단편들이 서로 연관되어 중국사의 전체상을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까닭은 각각의 사실들이 시대와 결합되어 설명되지 못하고 따라서 역사적 생명력을 결여했던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사실 하나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적 배경,상황들을 함께 생각하며 그 역사를 기억해 나가야 할 것이다.
705년 재상 장간지 등은 와병중인 그녀를 핍박, 중종을 다시 복위 시킴으로써, 다시 당왕조는 복귀되었다. 이때 그녀의 나이 82세였다.
이후, 중종의 황후인 위씨 등이 그녀를 흉내내어 제2의 측천무후를 꿈꾸었으나, 그 꿈은 다시는 실현되지 않았다.
여황제의 군림은 전통적 한족사회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에, 수, 당 제국의 황실에 유목민족의 혈통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축을 낳았다.
수 양제나 당 고종이 아버지의 비를 취한 것, 도용에 보이는 기마 여인상, 나아가서 제국의 개방적인 문화등도 이에 한몫을 거들고 있다.
실제로 수, 당의 황실은 북조의 명가 출신으로 순수 유목민족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이들을 흔히 '관농 집단'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무천진을 동향으로 하고 관농지방, 즉 위하 유역에 거점을 갖고 있었다. 무천진은 선비족의 왕조였던 북위의 토찰 엘리트들의 거점인 6진의 하나였다.
이들 관농 집단의 시조격인 인물은 서위의 우문태로, 그의 자는 흑달, 선비화한 흉노계의 부족 출신이다. 그의 아들 우문각은 마침내 정권을 탈취, 북주를 창건했다.
재미있는 거은 우문태의 협력자로 선비족 최고의 명가를 이룬 독고신이란 존재인데, 그는 장녀를 우문태의 장남에게, 4녀를 북주 최고의 명가인 이병에게, 7녀를 대장군 양충의 아들 즉, 수 문제 양견의 황후로 줌으로써, 북주, 수, 당 3대에 걸친 외척이 되는 기록을 남겼다. 이병의 아들 이연이 바로 당 고조이니, 수양제와 당고조는 이종사촌이었던 셈이다.
우리가 중국사에 대해 관심을 갖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그것이 우리의 역사를 보다 온전히 이해하는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사의 보편적인 흐름이 올바로 규명되는 속에서 한국사도 제 위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며, 일찍부터 한국사의 전개에 깊은 연관을 가졌던 동아시아, 그 중에서도 특히 중국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해야 하는 당위성은 새삼스레 논할 필요조차 없이 우리 모두가 공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갖고 있는 중국사에 대한 지식, 이해도는 어느 정도일까? 우리는 최소한 중국의 몇몇 왕조나 위대한 개인들의 이름, 혹은 이들과 관련된 일화나 고사성어 등을 알고 있으며, 아마도 중국의 고전 한두 가지 정도를 접해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의 단편들이 서로 연관되어 중국사의 전체상을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까닭은 각각의 사실들이 시대와 결합되어 설명되지 못하고 따라서 역사적 생명력을 결여했던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사실 하나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적 배경,상황들을 함께 생각하며 그 역사를 기억해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