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오스트리아
◎ 러시아
◎ 러시아
본문내용
서 사라지게 되었다. 러시아 절대주의는 20년 간에 걸친 대북방전쟁 과정에서 동부 유럽의 가공할 만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예까쩨리나 2세는 러시아 국왕 중 이념적으로 가장 의식이 있는 군주였으며, 그의 계급에게 가장 너그러웠음이 입증되었다. 정치적 계몽주의에 대한 유럽인들의 평판을 선망했던 그녀는 새로운 교육 제도를 반포하고 교회의 영지를 환속시키는 한편, 러시아 경제의 중상주의적일 발전을 촉진했다. 통화가 안정되었고, 제철업이 번창했으며 대외 무역량이 증가했다. 그러나 예까쩨리나 2세 통치의 가장 큰 두 가지 이정표는 농노에 의한 조직적 농업을 우크라이나 전역에까지 확대시킨 것과 귀족 헌장을 반포한 것이었다. 농노 농업 확대의 조건은 크리미아 지역의 타타르 칸국이 멸망하고 흑해 북부 연변에 있던 오토만 세력이 붕괴함으로써 마련되었다. 크리미아 지역의 칸국은 터어키의 봉건 제후국으로서 러시아 남단에 상주해왔을뿐 아니라 부단히 침략을 감행하여 폰투스 벌을 휘저어 황폐한 땅으로 만들어왔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의 대부분의 지역은 로마노프 왕조가 그곳을 공식적으로 합병한 이후에도 오랜 동안 적의 침입을 우려하여 아무도 살지 못하는 땅이었다. 새로 등극한 여제는 흑해의 이슬람 지배를 막아내는 데 러시아 군대의 총력을 투입했다. 1774년간경 칸국은 포르트로부터 분리되었고 오토만의 국경은 부그까지 밀려나게 되었다. 1783년에는 크리미아를 완전히 합병했다. 10년 후 러시아의 국경은 드니에스티르에 이르게 되었다. 짜르 제국의 새로운 연해지에는 세바스또폴과 오데사가 건설되었다. 해협을 통해 지중해로 나가는 바다의 관문이 손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러시아 절대주의 체제의 강력함은 곧 국제적인 성공으로 드러났다. 예까쩨리나 2세는 폴란드 분할을 앞장서서 추진함으로써 1795년 조정이 끝났을 때 거기에서 가장 큰 이득을 보게 되었다. 짜르 제국의 영토는 약 20만 평방 마일이나 넒어졌고, 비스툴라강 부근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 뒤 10년 이내에 그루지아가 까프까즈지역에 병합되었다. 그러나 유럽에서 짜르 제국의 새로운 탁월함을 보여주었던 것은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벌어진 거대한 힘겨루기였다. 러시아는 사회적이나 경제적인 면에서 동구에서도 가장 후진적인 절대주의 체제였지만,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는 대륙에서 유일하게 프랑스의 공격에 대적할 수 있는 구체적임을 과시했다. 이미 18세기 마지막 10년 중에 러시아 군대는 당시까지만 해도 통령정부가 선도했던 부르주아 혁명의 열기를 분쇄하고자, 사상 최초로 서방 깊숙이 파견되었다. 새로 등극한 짜르 알렉산더 1세는 실패로 끝날 제3차, 4차 대 나폴레옹 동맹에 참가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절대주의 체제가 울름과 바그람, 예나와 아우에르슈타프에서 참패했지만 러시아 절대주의 체제는 틸지트에서 휴전을 확보할 수 있었다, 1807년 두 황제 사이에서 이루어진 영토 분할로 러시아는 스웨덴과 터어키를 양보하는 대신 핀란드와 베싸라비아로의 진출을 허용받았다. 드디어 나폴레옹이 러시아에 대한 전면 공격에 나섰을 때 대군은 짜르 국가의 구조를 무너뜨릴 수 없음이 드러났다. 전쟁 초기에는 프랑스의 공격이 승리를 거둘 수 있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기우와 병참술로 인하여 파멸에 이르렀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이 패배의 원인도 보나파르티즘에 의해 이제 다 무디어진, 부르주아적 세력 팽창 및 서구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칼날에는 상처를 입지 않을 만큼 원시적이었던 봉건적 사회 환경의 완강한 저항 때문이었다. 모스크바로부터의 퇴각은 전대륙에 걸친 프랑스 지배의 종식을 예고했다. 2년 내에 러시아 군대는 파리에 주둔하게 되었다. 짜르체제는 19세기 전기간 동안 유럽의 반혁명을 수호하는 기세등등한 파수꾼이었다. 비인회의는 짜르체제의 승리를 조인하였다. 폴란드 왕국의 또 한 부분이 합병되었고, 바르샤바는 러시아의 도시가 되었다. 3개월 후에는 알렉산더 1세가 직접 제창한 신성동맹이 결성되어, 과다라마에서 우랄 산맥에 이르는 전역에서 왕실과 성직자들의 반동체제를 보장했다.
레닌과 기타 사회주의자들은 짜르체제가 1907년의 반혁명 이후 영속적으로 권력을 재확립하는 데 성공했을 경우 러시아 농업상의 자본주의적 발전이 일어날 수 있었으리라고 예견했던 바, 그것은 ‘프로이센적인 경로’였다. 즉 융커 타이프의 영지를 임노동자를 사용하는 방식으로 합리화하고, 농촌 지역에서 부차적인 부농층이 성장함과 함께 세계 시장에 편입되는 것이다. 1906년부터 1914년까지의 기간 중에 쓰여진 레닌의 글들을 짜르체제의 러시아에서도 그러한 진화가 일어날 수 있으며, 그것은 혁명 운동에 심각한 위험이 될 것이라고 거듭 경고했다. 특히 스똘리핀의 개혁은 그러한 진화를 가속화시키기 위해 그들의 ‘강력한 경쟁자’에 의해 취해진 것이었다. 즉 쿨라크계급을 육성하기 위해 농촌의 재분배 토지를 농민들의 세습 보유지로 전환시켰던 것이다. 사실상 스똘리핀의 계획은 농민적 차원에서 그 목표에 훨씬 못미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1915년 즈음에는 전체 농민가구의 절반이 조그마한 땅뙈기의 세습 소유를 법적으로 인정받았지만, 실제로 한군데에 통합되어 있는 토지를 소유하게 된 것은 그들 가운데 단 10분의 1뿐이었기 때문이다. 분산된 지조와 개방 경작제도의 잔존은 미르 촌락 공동체의 공동체적 강제가 유지되도록 했다. 그러는 동안 상환금 체납과 세금의 부담은 해를 거듭할수록 가중되었다. 개혁으로도 지주 계급에 맞서는 러시아 농민 계급의 본능적 연대에 심각한 파열이 생기게 할 수 없었다. 볼셰비끼들은 1917년 농촌 지역에서 인민들의 반봉건적 감정이 하나로 되어 격렬하게 드러나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같은 양상은 후에 트로츠키에 의해서도 확인되었다. 농촌 지역의 과잉 인구는 제정 말기에 고질적인 문제로 되었다. 전체 토지 재산 가운데 농민들의 농지가 차지하는 몫은 1917년 이전 40 년간 약 절반에 가깝게 증가했지만 이는 주로 쿨라크의 매입에 의한 것이었고, 실제 농민 일인당 보유지 면적은 3분의 1로 감소했다. 농촌 대중들은 오랜 동안의 후진성과 가난으로 인해 여전히 곤경에 허덕이고 있었다.
예까쩨리나 2세는 러시아 국왕 중 이념적으로 가장 의식이 있는 군주였으며, 그의 계급에게 가장 너그러웠음이 입증되었다. 정치적 계몽주의에 대한 유럽인들의 평판을 선망했던 그녀는 새로운 교육 제도를 반포하고 교회의 영지를 환속시키는 한편, 러시아 경제의 중상주의적일 발전을 촉진했다. 통화가 안정되었고, 제철업이 번창했으며 대외 무역량이 증가했다. 그러나 예까쩨리나 2세 통치의 가장 큰 두 가지 이정표는 농노에 의한 조직적 농업을 우크라이나 전역에까지 확대시킨 것과 귀족 헌장을 반포한 것이었다. 농노 농업 확대의 조건은 크리미아 지역의 타타르 칸국이 멸망하고 흑해 북부 연변에 있던 오토만 세력이 붕괴함으로써 마련되었다. 크리미아 지역의 칸국은 터어키의 봉건 제후국으로서 러시아 남단에 상주해왔을뿐 아니라 부단히 침략을 감행하여 폰투스 벌을 휘저어 황폐한 땅으로 만들어왔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의 대부분의 지역은 로마노프 왕조가 그곳을 공식적으로 합병한 이후에도 오랜 동안 적의 침입을 우려하여 아무도 살지 못하는 땅이었다. 새로 등극한 여제는 흑해의 이슬람 지배를 막아내는 데 러시아 군대의 총력을 투입했다. 1774년간경 칸국은 포르트로부터 분리되었고 오토만의 국경은 부그까지 밀려나게 되었다. 1783년에는 크리미아를 완전히 합병했다. 10년 후 러시아의 국경은 드니에스티르에 이르게 되었다. 짜르 제국의 새로운 연해지에는 세바스또폴과 오데사가 건설되었다. 해협을 통해 지중해로 나가는 바다의 관문이 손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러시아 절대주의 체제의 강력함은 곧 국제적인 성공으로 드러났다. 예까쩨리나 2세는 폴란드 분할을 앞장서서 추진함으로써 1795년 조정이 끝났을 때 거기에서 가장 큰 이득을 보게 되었다. 짜르 제국의 영토는 약 20만 평방 마일이나 넒어졌고, 비스툴라강 부근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 뒤 10년 이내에 그루지아가 까프까즈지역에 병합되었다. 그러나 유럽에서 짜르 제국의 새로운 탁월함을 보여주었던 것은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벌어진 거대한 힘겨루기였다. 러시아는 사회적이나 경제적인 면에서 동구에서도 가장 후진적인 절대주의 체제였지만,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는 대륙에서 유일하게 프랑스의 공격에 대적할 수 있는 구체적임을 과시했다. 이미 18세기 마지막 10년 중에 러시아 군대는 당시까지만 해도 통령정부가 선도했던 부르주아 혁명의 열기를 분쇄하고자, 사상 최초로 서방 깊숙이 파견되었다. 새로 등극한 짜르 알렉산더 1세는 실패로 끝날 제3차, 4차 대 나폴레옹 동맹에 참가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절대주의 체제가 울름과 바그람, 예나와 아우에르슈타프에서 참패했지만 러시아 절대주의 체제는 틸지트에서 휴전을 확보할 수 있었다, 1807년 두 황제 사이에서 이루어진 영토 분할로 러시아는 스웨덴과 터어키를 양보하는 대신 핀란드와 베싸라비아로의 진출을 허용받았다. 드디어 나폴레옹이 러시아에 대한 전면 공격에 나섰을 때 대군은 짜르 국가의 구조를 무너뜨릴 수 없음이 드러났다. 전쟁 초기에는 프랑스의 공격이 승리를 거둘 수 있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기우와 병참술로 인하여 파멸에 이르렀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이 패배의 원인도 보나파르티즘에 의해 이제 다 무디어진, 부르주아적 세력 팽창 및 서구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칼날에는 상처를 입지 않을 만큼 원시적이었던 봉건적 사회 환경의 완강한 저항 때문이었다. 모스크바로부터의 퇴각은 전대륙에 걸친 프랑스 지배의 종식을 예고했다. 2년 내에 러시아 군대는 파리에 주둔하게 되었다. 짜르체제는 19세기 전기간 동안 유럽의 반혁명을 수호하는 기세등등한 파수꾼이었다. 비인회의는 짜르체제의 승리를 조인하였다. 폴란드 왕국의 또 한 부분이 합병되었고, 바르샤바는 러시아의 도시가 되었다. 3개월 후에는 알렉산더 1세가 직접 제창한 신성동맹이 결성되어, 과다라마에서 우랄 산맥에 이르는 전역에서 왕실과 성직자들의 반동체제를 보장했다.
레닌과 기타 사회주의자들은 짜르체제가 1907년의 반혁명 이후 영속적으로 권력을 재확립하는 데 성공했을 경우 러시아 농업상의 자본주의적 발전이 일어날 수 있었으리라고 예견했던 바, 그것은 ‘프로이센적인 경로’였다. 즉 융커 타이프의 영지를 임노동자를 사용하는 방식으로 합리화하고, 농촌 지역에서 부차적인 부농층이 성장함과 함께 세계 시장에 편입되는 것이다. 1906년부터 1914년까지의 기간 중에 쓰여진 레닌의 글들을 짜르체제의 러시아에서도 그러한 진화가 일어날 수 있으며, 그것은 혁명 운동에 심각한 위험이 될 것이라고 거듭 경고했다. 특히 스똘리핀의 개혁은 그러한 진화를 가속화시키기 위해 그들의 ‘강력한 경쟁자’에 의해 취해진 것이었다. 즉 쿨라크계급을 육성하기 위해 농촌의 재분배 토지를 농민들의 세습 보유지로 전환시켰던 것이다. 사실상 스똘리핀의 계획은 농민적 차원에서 그 목표에 훨씬 못미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1915년 즈음에는 전체 농민가구의 절반이 조그마한 땅뙈기의 세습 소유를 법적으로 인정받았지만, 실제로 한군데에 통합되어 있는 토지를 소유하게 된 것은 그들 가운데 단 10분의 1뿐이었기 때문이다. 분산된 지조와 개방 경작제도의 잔존은 미르 촌락 공동체의 공동체적 강제가 유지되도록 했다. 그러는 동안 상환금 체납과 세금의 부담은 해를 거듭할수록 가중되었다. 개혁으로도 지주 계급에 맞서는 러시아 농민 계급의 본능적 연대에 심각한 파열이 생기게 할 수 없었다. 볼셰비끼들은 1917년 농촌 지역에서 인민들의 반봉건적 감정이 하나로 되어 격렬하게 드러나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같은 양상은 후에 트로츠키에 의해서도 확인되었다. 농촌 지역의 과잉 인구는 제정 말기에 고질적인 문제로 되었다. 전체 토지 재산 가운데 농민들의 농지가 차지하는 몫은 1917년 이전 40 년간 약 절반에 가깝게 증가했지만 이는 주로 쿨라크의 매입에 의한 것이었고, 실제 농민 일인당 보유지 면적은 3분의 1로 감소했다. 농촌 대중들은 오랜 동안의 후진성과 가난으로 인해 여전히 곤경에 허덕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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