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고정된 자세에서 받게 되는 반복적인 빛의 자극이 습관을 일으킨다고 말하고 있다. 이 밀은 좀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차근차근 읽어보니 정말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티비를 계속 보고 있으면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정보들은 우리의 뇌에서 하나도 걸러지지 않은 채 통째로 기억의 저장고로 들어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식적인 분석인 이해나 학습에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놀랍게도 그것은 수면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이라고 한다. 티비를 보는 것이 우리의 뇌를 수면상태로 판단하게 만들다니...너무 놀라웠다. 다음으로 티비는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영적으로 무뎌지게 만든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정말 무서운 말 같았다. 정신적인 것, 신체적인 것에서 무뎌지는 것에 관하여는 앞에서 계속 나와서 알 수 있었는데, 영적으로 무뎌진 다는 것은 나에게 너무나 큰 경고가 되었다. 장시간에 걸쳐 세속 음악을 듣고, 세속영화를 관람하였을 때도 텔레비전을 보았을 때와 동일한 현상이 나타난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즉 영적으로 무디어지고, 활력을 잃는 느낌들을 경험하게 된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미디어는 변변한 제재도 받지 않은 채 잠재 의식적인 전달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의 정신에 자체의 내용을 전달한다고 말한다. 게다가 의식적인 차원애서 이교사상을 가차 없이 설득력 있게 가르치기까지 한다고 한다. 정말 텔레비전이 평소에 볼 때는 아무런 거부감이나 경계함 없이 보았었는데, 이렇게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니...무척이나 놀랍고 충격이었다. 나는 비록 지금은 기숙사에 살아서 티비를 잘 보지 못하지만, 한번 씩 집에 가면 거의 집안에서는 내내 티비를 보기만 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에 대해 많이 후회가 되었고 티비를 보느라 내내 거실에 앉아있던 그 시간들이 아깝게도 느껴졌다.
계속 읽어나가는 중에 흥미로운 주제를 발견하였다. 어쩌면 옛날부터 우리가 인식하고, 많은 토론과 쟁점이 되어 온 주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친숙하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이 주제는 바로 생명윤리에 관한 것이었다. 제목은 생명윤리 : 기독교적 히포크라테스의 정신의 황혼이라는 제목이었다. 제목이 약간은 거창하다고 생각했다. 생명윤리를 말하는데 2000년도 넘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히포크라테스부터 시작하다니.., 그렇지만 흥미 있을 것 같은 주제였다. 작년 1학년때 영적 지도자 훈련 시간에 생명윤리에 관한 강연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무심코 심각하지 않은 것 처럼 느껴서 잘 듣지 않았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생명윤리에 관하여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시간이었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왜 저자가 생명윤리를 이야기하는데 히포크라테스를 이야기 하였는지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 글에는 히포크라테스의 선서 전문이 실려 있었는데, 그 글을 읽으면서, 2000년도 더 오래 된 사람인데 이렇게 상세하게 남아있다는 것에 놀랐고 그 내용에 한 번 더 놀라게 되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에는 나의 맹세와 더불어 스승에 대한 의무, 그리고 환자에 관한 의무가 있었는데, 과연 모든 의사들에게 현재에까지 귀감이 되는 선서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특히 환자에 관한 의무를 읽으면서 이런 의사선생님만 있다며 모든 사람들이 마음 편하게,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선서에는 만약 환자가 독약을 달라고 해도 주지 않을 것이며, 내 능력과 판단에 따라 환자들을 돕기 위하여 치료법을 사용하고, 결코 그들을 해치거나 그릇되게 하는데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어떤 집으로 치료를 하러 들어가던지 최선을 다할 것이며, 또한 그 집에 치료를 하러 가서는 남성이나 여성이나 종이나 간통을 하지 않을 것이며, 나의 마음을 울렸던 것은 바로 이것인데 치료를 하는 중에 내가 보거나 또는 듣는 모든 것들은 결코 일반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할 것이며, 나는 그러한 것들을 누설하지 않고 거룩한 비밀로 간주할 것이다 라고 한 부분이었다. 환자와 환자의 가정, 그리고 환자의 모든 것을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섬기려고 노력한 모습들이 한눈에 나와 있었고 또한 볼 수 있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나오는 이러한 내용들은 그 시작부터 도덕적인 소명에서 비롯되었으며, 또한 그것의 가장 독특한 특징은 그것의 명백한 도덕적 가치들과 의학 기술의 분리할 수 없는 융합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 서약가운데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거기에 따르면 히포크라테스의 가치에 먼저 헌신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의학기술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정말 놀라웠다. 히포크라테스라는 2000년도 더 옛날에 살았던 사람의 선서를 지금까지도 사용할 만큼 그의 선서는 오늘날까지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그의 환자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모습 속에서 오늘날 까지 많은 의사들의 귀감이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기독교적으로는 히포크라테스의 정신의 기원과 논리를 재발견하여서, 우리는 최초의 히포크라테스주의자들이 그 당시의 의학 문화의 무자비함에 대항하면서 더 나은 문화로 나아가는 길을 인도하는, 그야 말로 시대를 거스르는 선지자들이었다면, 바로 그들에게서 우리는 우리가 앞으로 따라가야 할 발자국들을 발견해야 한다는 저자의 생각에 나는 무척이나 공감을 했다. 우리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어야 하고, 영향력있는 지도자가 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문화가 참 다양하다는 것, 그리고 그 문화가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면서 많이 타락하고 변질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럼으로 말미암아 기독교인, 우리들이 가져야 할 어떠한 의무감 같은 것도 느끼게 해주었는데, 우리가 더욱 바로 서고, 그 옛날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던 것처럼 우리도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주시는 문화를 향유함에 대한 생각들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문화를 향유하며 살아가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화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만들어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올바로 향유하게끔 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도록 하기 위해 허락하신 것일 지도 모르니 말이다.
계속 읽어나가는 중에 흥미로운 주제를 발견하였다. 어쩌면 옛날부터 우리가 인식하고, 많은 토론과 쟁점이 되어 온 주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친숙하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이 주제는 바로 생명윤리에 관한 것이었다. 제목은 생명윤리 : 기독교적 히포크라테스의 정신의 황혼이라는 제목이었다. 제목이 약간은 거창하다고 생각했다. 생명윤리를 말하는데 2000년도 넘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히포크라테스부터 시작하다니.., 그렇지만 흥미 있을 것 같은 주제였다. 작년 1학년때 영적 지도자 훈련 시간에 생명윤리에 관한 강연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무심코 심각하지 않은 것 처럼 느껴서 잘 듣지 않았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생명윤리에 관하여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시간이었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왜 저자가 생명윤리를 이야기하는데 히포크라테스를 이야기 하였는지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 글에는 히포크라테스의 선서 전문이 실려 있었는데, 그 글을 읽으면서, 2000년도 더 오래 된 사람인데 이렇게 상세하게 남아있다는 것에 놀랐고 그 내용에 한 번 더 놀라게 되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에는 나의 맹세와 더불어 스승에 대한 의무, 그리고 환자에 관한 의무가 있었는데, 과연 모든 의사들에게 현재에까지 귀감이 되는 선서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특히 환자에 관한 의무를 읽으면서 이런 의사선생님만 있다며 모든 사람들이 마음 편하게,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선서에는 만약 환자가 독약을 달라고 해도 주지 않을 것이며, 내 능력과 판단에 따라 환자들을 돕기 위하여 치료법을 사용하고, 결코 그들을 해치거나 그릇되게 하는데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어떤 집으로 치료를 하러 들어가던지 최선을 다할 것이며, 또한 그 집에 치료를 하러 가서는 남성이나 여성이나 종이나 간통을 하지 않을 것이며, 나의 마음을 울렸던 것은 바로 이것인데 치료를 하는 중에 내가 보거나 또는 듣는 모든 것들은 결코 일반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할 것이며, 나는 그러한 것들을 누설하지 않고 거룩한 비밀로 간주할 것이다 라고 한 부분이었다. 환자와 환자의 가정, 그리고 환자의 모든 것을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섬기려고 노력한 모습들이 한눈에 나와 있었고 또한 볼 수 있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나오는 이러한 내용들은 그 시작부터 도덕적인 소명에서 비롯되었으며, 또한 그것의 가장 독특한 특징은 그것의 명백한 도덕적 가치들과 의학 기술의 분리할 수 없는 융합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 서약가운데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거기에 따르면 히포크라테스의 가치에 먼저 헌신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의학기술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정말 놀라웠다. 히포크라테스라는 2000년도 더 옛날에 살았던 사람의 선서를 지금까지도 사용할 만큼 그의 선서는 오늘날까지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그의 환자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모습 속에서 오늘날 까지 많은 의사들의 귀감이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기독교적으로는 히포크라테스의 정신의 기원과 논리를 재발견하여서, 우리는 최초의 히포크라테스주의자들이 그 당시의 의학 문화의 무자비함에 대항하면서 더 나은 문화로 나아가는 길을 인도하는, 그야 말로 시대를 거스르는 선지자들이었다면, 바로 그들에게서 우리는 우리가 앞으로 따라가야 할 발자국들을 발견해야 한다는 저자의 생각에 나는 무척이나 공감을 했다. 우리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어야 하고, 영향력있는 지도자가 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문화가 참 다양하다는 것, 그리고 그 문화가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면서 많이 타락하고 변질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럼으로 말미암아 기독교인, 우리들이 가져야 할 어떠한 의무감 같은 것도 느끼게 해주었는데, 우리가 더욱 바로 서고, 그 옛날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던 것처럼 우리도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주시는 문화를 향유함에 대한 생각들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문화를 향유하며 살아가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화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만들어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올바로 향유하게끔 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도록 하기 위해 허락하신 것일 지도 모르니 말이다.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