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섰을 때 이미 기존의 타 교파가 이 땅에 뿌리를 잡고 있었다. 그렇게 처음 성결교회가 일어섰을 때 타 교파신자들과 갈등 아닌 갈등을 겪고 박해아닌 박해를 당하며 성결교회의 정체성을 잡아야만 했을 때 성결교회의 중심에는 ‘전도’가 있었다. 물론 다른 교파의 교회에도 선교사들과 신자들의 전도활동이 있었지만, 성결교회는 가장 큰 깃발을 전도, 즉 영혼구원에 세우고 일어섰다. 그러다보니 성결교회가 스스로 정체성을 규정하기 전에 이미 다른 사람들 눈으로 성결교회의 정체성에 ‘전도’라는 깃발이 꽂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성결교회의 풍성하고도 활발했던 전도활동은 성결교회의 정체성 확립과 지역 종교의 탈피에 큰 일조를 하게 됐다.
또한 조선시대, 사회적으로 소외됐던 가정의 여성들의 지위향상에 성결교회 전도운동이 큰 도움을 주었다. 성결교회의 전도부인들은 헌신과 희생의 정신, 그리고 사랑의 마음으로 조선시대 여성들의 존재가치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으로 인하여 높이었던 것이다. 그 시대의 성결교회의 복음은 여성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탈출구의 역할을 하였다.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아직 문명이 크게 뒤쳐져 있어 문명의 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국민들을 열악한 환경과 문화적 요소에서 해방시키고 그 의식을 향상시키는데 도움을 준 것이 바로 성결교회의 전도활동이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귀신들려, 혹은 병에 걸려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 그들 안에 있는 귀신을 쫓고 병마의 문제를 해소했던 것이다.
또한 자국민이 함께한 자치 전도였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선교사와 토착민의 관계가 상하관계 체제가 아닌, 동역자의 관계로 함께함으로 토착사역자들과 동역하여 문화와 언어의 장벽을 허물어 갈 수 있었다. 이는 동양선교회에서부터 전해진 평등사상을 인함이다.
그리고 성결교회의 전도활동은 교파를 초월하여 한국 땅의 영적인 부흥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장막 전도대, 이성봉목사의 부흥집회는 교파를 초월하여 모든 신자들이 함께 은혜 받고 회복되는 장이었다. 그 시대의 타 교파교회와의 연합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교회의 일치 운동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즉 복음 안에서 교파를 초월해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여러 장점이 있었다면 냉정히 평가해 볼만한 단점들도 존재했는데 그 처음은 전도의 방법에 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는 지역적 색채가 매우 짖은 나라이다. 요즘은 인간적인 속설 중에 경상도 사람은 전도하기 힘들다는 이야기가 있는 경우도 보게 된다. 이와 같은 나라에서 초기 성결교회의 전도방법은 하나의 동일한 모습으로 모든 지역을 차별화 하지 않고 전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지역의 색과 문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전도방법이 있어 아쉬움을 남겼다.
또한 아쉬운 점은 그 시기자체가 우리 민족이 일본에 의해 억압받고 핍박받는 때였다는 것이다. 그 시점에서 우리 성결교회가 민족적 입장에서 사회문제에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 하였다면 지금에 와서는 민족의 성결교회가 되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조선시대, 사회적으로 소외됐던 가정의 여성들의 지위향상에 성결교회 전도운동이 큰 도움을 주었다. 성결교회의 전도부인들은 헌신과 희생의 정신, 그리고 사랑의 마음으로 조선시대 여성들의 존재가치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으로 인하여 높이었던 것이다. 그 시대의 성결교회의 복음은 여성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탈출구의 역할을 하였다.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아직 문명이 크게 뒤쳐져 있어 문명의 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국민들을 열악한 환경과 문화적 요소에서 해방시키고 그 의식을 향상시키는데 도움을 준 것이 바로 성결교회의 전도활동이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귀신들려, 혹은 병에 걸려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 그들 안에 있는 귀신을 쫓고 병마의 문제를 해소했던 것이다.
또한 자국민이 함께한 자치 전도였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선교사와 토착민의 관계가 상하관계 체제가 아닌, 동역자의 관계로 함께함으로 토착사역자들과 동역하여 문화와 언어의 장벽을 허물어 갈 수 있었다. 이는 동양선교회에서부터 전해진 평등사상을 인함이다.
그리고 성결교회의 전도활동은 교파를 초월하여 한국 땅의 영적인 부흥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장막 전도대, 이성봉목사의 부흥집회는 교파를 초월하여 모든 신자들이 함께 은혜 받고 회복되는 장이었다. 그 시대의 타 교파교회와의 연합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교회의 일치 운동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즉 복음 안에서 교파를 초월해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여러 장점이 있었다면 냉정히 평가해 볼만한 단점들도 존재했는데 그 처음은 전도의 방법에 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는 지역적 색채가 매우 짖은 나라이다. 요즘은 인간적인 속설 중에 경상도 사람은 전도하기 힘들다는 이야기가 있는 경우도 보게 된다. 이와 같은 나라에서 초기 성결교회의 전도방법은 하나의 동일한 모습으로 모든 지역을 차별화 하지 않고 전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지역의 색과 문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전도방법이 있어 아쉬움을 남겼다.
또한 아쉬운 점은 그 시기자체가 우리 민족이 일본에 의해 억압받고 핍박받는 때였다는 것이다. 그 시점에서 우리 성결교회가 민족적 입장에서 사회문제에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 하였다면 지금에 와서는 민족의 성결교회가 되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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