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유럽 최초의 세계-경제
1세기 이후 유럽의 팽창 / 세계-경제와 양극성 / 북유럽 공간 : 브뤼주의 번성 / 북유럽 공간 : 한자 동맹의 약진 / 반대편의 극점 : 이탈리아 도시들 / 간주곡 : 샹파뉴의 정기시들 / 프랑스가 놓친 기회
베네치아의 뒤늦은 우위
제노바 대 베네치아 / 베네치아의 힘 /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한 세계-경제 / 베네치아의 책임 / 갈레 레 다 메르카토 / 베네치아의 자본주의 / 그렇다면 노동은? / 산업의 우위? / 터키의 위협
1세기 이후 유럽의 팽창 / 세계-경제와 양극성 / 북유럽 공간 : 브뤼주의 번성 / 북유럽 공간 : 한자 동맹의 약진 / 반대편의 극점 : 이탈리아 도시들 / 간주곡 : 샹파뉴의 정기시들 / 프랑스가 놓친 기회
베네치아의 뒤늦은 우위
제노바 대 베네치아 / 베네치아의 힘 /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한 세계-경제 / 베네치아의 책임 / 갈레 레 다 메르카토 / 베네치아의 자본주의 / 그렇다면 노동은? / 산업의 우위? / 터키의 위협
본문내용
이다―이나 상인의 개입에 대해서는 장인들을 보호해주지 못했다.
산업의 우위?
결국 이것은 돈과 공권력이 노동의 세계를 장악한 것을 뜻한다. 베네치아가 사회적으로 놀라울 정도의 평온을 유지했던 것도 이러한 주의깊은 감시, 꽉 짜여진 틀 덕분이 아니었을까? 그 어떤 경우에도 베네치아의 아르테들은 피렌체에서처럼 정부의 권력에 참여하지 못한 채 거리를 두고 있었다. 베네치아에서는 소시민들도 자본주의적 노획물의 일부를 차지할 수 있었는데 아마도 이것이 사회적 평온의 한 원인으로 생각된다. 베네치아의 임금은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17세기 초에 이미 가까이로는 테라 피르마와의 경쟁 앞에서 그리고 멀리로는 북유럽 산업과의 경쟁 앞에서 이 도시의 산업활동이 쇠퇴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산업의 번영이 끝났다고 해서 정말 베네치아의 운명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상업자본주의가 산업자본주의에 대해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는 것은 적어도 18세기까지는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개략적으로 말해서 산업활동은 상당히 뒤늦게 일종의 보상으로서 그리고 1558-1559년에 안트어프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는 방식으로서 베네치아의 부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터키의 위협
거대한 도시 베네치아가 점차 쇠퇴하는 데 대하여 모든 것이 이 도시만의 책임이었던 것은 아니다. 지리상의 대발견(1492-1498)에 뒤이어 유럽이 전세계적으로 폭발적인 팽창을 하기 이전에도 벌써 아라곤 국왕, 네덜란드, 독일 황제 등의 영토국가들이 다시 흥기했다. 그 결과 도시들의 운명이 전반적으로 위협을 받았다. 상승의 흐름을 타고 있던 이 국가들 가운데 가장 영토가 넓고 베네치아에게 위협적이었던 국가는 오스만 제국이었다. 1453년에 터키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것은 레반트의 바다를 지배하는 데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도시를 정복함으로써 이 바다의 핵심부로까지 진출한 것과 다름없게 되었다. 따라서 베네치아는 돌아가는 상황에 적응하고 술탄과 화해하기로 결정했다. 술탄으로서도 유럽과 교류하려면 베네치아를 통과해야 했다. 이것이야말로 상호 보완적인 적대관계의 고전적인 경우이다. 오스만의 점령이 확대되어감에 따라서 공존의 필요는 더 커졌다. 베네치아는 적을 매수함으로써 이스탄불에서도 활동을 계속 할 수 있었다. 카를 5세의 제국, 펠리페 2세의 스페인, 신성 로마 제국, 표트르 대제와 예카테리나 여제의 러시아, 외젠 공의 오스트리아를 조정하는 법도 알았다. 또한 시아 파의 요람이었던 사파비 왕조의 페르시아까지 조정했다(터키는 시아 파에 적대적인 수니 파에 속했다.) 이 당시에는 회교권 내에서도 종교전쟁이 한창이었던 것이다.
베네치아는 터키 제국의 그림자 때문에 점차 활력을 상실해갔다. 그러나 베네치아가 16세기 초부터 쇠퇴한 것은 도시와 영토국가 사이의 갈등이라는 평범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이것을 설명하려면 해상의 대발견, 대서양 순환체제의 작동, 포르투갈(안트워프)의 예기치 못한 성공 등을 거론해야 한다.
3. 결론
중세의 상업도시들은 모두 이윤을 지향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서 그러한 노력이 이 도시들을 만들었다. 이런 도시들을 생각하면서 폴 그루세는 “현대 자본주의는 아무것도 발명하지 않았다”라고까지 이야기했다. 이것은 사실이다. 환어음, 크레딧, 화폐의 주조, 은행, 선구매, 공공재정, 대부, 자본주의, 식민주의뿐 아니라 사회문제, 노동력의 수준 향상, 계급투쟁, 사회적 만행 및 정치적 잔혹성 등은 모두 이전부터 있었던 것들이다.
시대에 앞선 근대적인 도시국가들은 다른 지역들의 지체와 열등함을 이용했다. 그리고 이렇게 바깥 세계가 취약하다는 것이 이 도시국가들로 하여금 성장하고, 독재적이 되도록 만들었으며, 원거리 교역에 따른 대규모 이익을 차지하도록 보장해주었고, 통상적인 법칙을 무시하도록 만들었다. 이들과 맞설 수 있는 적수는 영토국가였다. 그러나 영토국가는 잘 성장하지 못했거나 적어도 빨리 성장하지 못했고, 여기에 더해서 14세기의 장기적인 경기후퇴가 악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여러 국가들이 곤경을 겪고 해체되었으며 그 결과 도시들이 다시금 활동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그렇지만 도시와 국가는 여전히 잠재적인 적대관계를 유지했다. 도시가 국가를 지배할 것인가, 국가가 도시를 지배할 것인가? 도시는 공간, 시장, 안전하게 보호받는 유통권역을 필요로 한다는 것, 즉 착취할 광대한 국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들은 살기 위해서 먹이가 필요했던 것이다.
산업의 우위?
결국 이것은 돈과 공권력이 노동의 세계를 장악한 것을 뜻한다. 베네치아가 사회적으로 놀라울 정도의 평온을 유지했던 것도 이러한 주의깊은 감시, 꽉 짜여진 틀 덕분이 아니었을까? 그 어떤 경우에도 베네치아의 아르테들은 피렌체에서처럼 정부의 권력에 참여하지 못한 채 거리를 두고 있었다. 베네치아에서는 소시민들도 자본주의적 노획물의 일부를 차지할 수 있었는데 아마도 이것이 사회적 평온의 한 원인으로 생각된다. 베네치아의 임금은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17세기 초에 이미 가까이로는 테라 피르마와의 경쟁 앞에서 그리고 멀리로는 북유럽 산업과의 경쟁 앞에서 이 도시의 산업활동이 쇠퇴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산업의 번영이 끝났다고 해서 정말 베네치아의 운명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상업자본주의가 산업자본주의에 대해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는 것은 적어도 18세기까지는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개략적으로 말해서 산업활동은 상당히 뒤늦게 일종의 보상으로서 그리고 1558-1559년에 안트어프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는 방식으로서 베네치아의 부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터키의 위협
거대한 도시 베네치아가 점차 쇠퇴하는 데 대하여 모든 것이 이 도시만의 책임이었던 것은 아니다. 지리상의 대발견(1492-1498)에 뒤이어 유럽이 전세계적으로 폭발적인 팽창을 하기 이전에도 벌써 아라곤 국왕, 네덜란드, 독일 황제 등의 영토국가들이 다시 흥기했다. 그 결과 도시들의 운명이 전반적으로 위협을 받았다. 상승의 흐름을 타고 있던 이 국가들 가운데 가장 영토가 넓고 베네치아에게 위협적이었던 국가는 오스만 제국이었다. 1453년에 터키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것은 레반트의 바다를 지배하는 데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도시를 정복함으로써 이 바다의 핵심부로까지 진출한 것과 다름없게 되었다. 따라서 베네치아는 돌아가는 상황에 적응하고 술탄과 화해하기로 결정했다. 술탄으로서도 유럽과 교류하려면 베네치아를 통과해야 했다. 이것이야말로 상호 보완적인 적대관계의 고전적인 경우이다. 오스만의 점령이 확대되어감에 따라서 공존의 필요는 더 커졌다. 베네치아는 적을 매수함으로써 이스탄불에서도 활동을 계속 할 수 있었다. 카를 5세의 제국, 펠리페 2세의 스페인, 신성 로마 제국, 표트르 대제와 예카테리나 여제의 러시아, 외젠 공의 오스트리아를 조정하는 법도 알았다. 또한 시아 파의 요람이었던 사파비 왕조의 페르시아까지 조정했다(터키는 시아 파에 적대적인 수니 파에 속했다.) 이 당시에는 회교권 내에서도 종교전쟁이 한창이었던 것이다.
베네치아는 터키 제국의 그림자 때문에 점차 활력을 상실해갔다. 그러나 베네치아가 16세기 초부터 쇠퇴한 것은 도시와 영토국가 사이의 갈등이라는 평범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이것을 설명하려면 해상의 대발견, 대서양 순환체제의 작동, 포르투갈(안트워프)의 예기치 못한 성공 등을 거론해야 한다.
3. 결론
중세의 상업도시들은 모두 이윤을 지향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서 그러한 노력이 이 도시들을 만들었다. 이런 도시들을 생각하면서 폴 그루세는 “현대 자본주의는 아무것도 발명하지 않았다”라고까지 이야기했다. 이것은 사실이다. 환어음, 크레딧, 화폐의 주조, 은행, 선구매, 공공재정, 대부, 자본주의, 식민주의뿐 아니라 사회문제, 노동력의 수준 향상, 계급투쟁, 사회적 만행 및 정치적 잔혹성 등은 모두 이전부터 있었던 것들이다.
시대에 앞선 근대적인 도시국가들은 다른 지역들의 지체와 열등함을 이용했다. 그리고 이렇게 바깥 세계가 취약하다는 것이 이 도시국가들로 하여금 성장하고, 독재적이 되도록 만들었으며, 원거리 교역에 따른 대규모 이익을 차지하도록 보장해주었고, 통상적인 법칙을 무시하도록 만들었다. 이들과 맞설 수 있는 적수는 영토국가였다. 그러나 영토국가는 잘 성장하지 못했거나 적어도 빨리 성장하지 못했고, 여기에 더해서 14세기의 장기적인 경기후퇴가 악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여러 국가들이 곤경을 겪고 해체되었으며 그 결과 도시들이 다시금 활동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그렇지만 도시와 국가는 여전히 잠재적인 적대관계를 유지했다. 도시가 국가를 지배할 것인가, 국가가 도시를 지배할 것인가? 도시는 공간, 시장, 안전하게 보호받는 유통권역을 필요로 한다는 것, 즉 착취할 광대한 국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들은 살기 위해서 먹이가 필요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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