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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타천(冬川)이 사람을 시켜 마름쇠를 성 밖으로 던져 깔아서 사람이나 말이 다닐 수 없게 하고, 또 안양사(安養寺)의 창고를 헐어 그 목재를 실어다가 성의 무너진 곳마다 즉시 망루를 만들고 밧줄을 그물같이 穿?마소가죽과 솜옷을 걸치고 그 안에 노포(弩砲)를 설치하여 막았다. 이때 성 안에는 단지 남녀 2천8백 명밖에 없었는데, 성주 동타천은 어린이와 노약자를 능히 격려하여 강대한 적과 맞서 싸우기를 20여일 동안 하였다. 그러나 식량이 다 떨어지고 힘이 지쳐서 지극한 정성으로 하늘에 빌었더니, 갑자기 큰 별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고 또 천둥과 비가 내리며 벼락이 쳤으므로, 적이 두려워서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왕이 동타천을 칭찬하고 표창하여 관등을 대나마로 올려주었다. 압독주를 대야(大耶)에 옮기고 아찬 종정(宗貞)을 도독으로 삼았다. 6월에 대관사(大官寺)의 우물 물이 피가 되었고, 금마군(金馬郡) 땅에 피가 흘러 그 넓이가 다섯 보(步)가 되었다. 왕이 죽었다. 시호를 무열(武烈)이라 하고, 영경사(永敬寺)의 북쪽에 장사지냈으며 묘호(廟號)를 올려 태종(太宗)이라 하였다. 고종이 [무열왕의] 죽음 소식을 듣고 낙성문(洛城門)에서 애도식을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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