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10찰(해인사 부석사 화엄사 갑사 불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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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화엄10찰(해인사 부석사 화엄사 갑사 불국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 보원사

○ 해인사

○ 범어사

○ 귀신사 (국신사)

○ 부석사

○ 화엄사

○ 보광사

○ 갑 사

○ 옥천사

○ 불국사

본문내용

것이 독특한 특징이다. 이 천왕문을 지나 다시 올라가면 보제루에 이르고 보제루는 다른 절에서 그 밑을 통과하여 대웅전에 이르는 방법과는 다르게 누의 옆을 돌아가게 되어 있다. 절내에서는 동.서 두 개의 탑이 사선 방향으로 보이며 동측탑의 윗부분보다 한단 높은 더위에 대웅전이 있고 서쪽탑의 윗부분에는 각황전이 위치하고 있다.
경내 건물중 각황전은 국보 제 67호로 지정된 매우 유명한 건물이며 현존하는 목조 건물로는 국내 최대 규모로 그 웅장한 외양이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한다. 각황전 앞 뜰에 서 있는 석등은 높이 6.3m, 직경 2.8m 로 국내 최대 규모이며, 통일신라시대 불교 중흥기의 찬란한 조각예술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국보 제 12호로 지정되어 있다. 각황전 왼편 효대라는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4사자 3층석탑은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가 어머니의 명복을 빌며 세
운 탑으로 특이한 의장과 세련된 조각솜씨를 자랑하는 걸작으로 국보 제35호이다. 각황전 내부 후편에 위치하고 있는 영산회 괘불탱은 국보 제301호로 1997년도에 지정되었다.
화엄사 경내 보물 가운데서도 대웅전 양편에 서있는 5층탑은 뛰어난 조형성과 섬세한 장식이 눈길을 끄는 신라시대 작품으로 보물 제132호와 133호로 지정돼 있다. 또한 이곳의 대웅전은 보물 299호로 조선시대의 우수한 예술성이 잘 나타나 있으며, 국립공원인 지리산의 훌륭한 경관을 배경으로 곳곳에 명소와 절경이 산재해 있다.
○ 보광사
고령산(622m) 기슭에 있는 절로, 신라 진성여왕(894)의 명으로 도선국사가 창건했다. 당시는 국가의 비보사찰로서 한강 이북의 6대 사찰 중의 하나였다. 임진 왜란 때에 사명 유정이 이곳에서 승병 3천명을 거느리고 권율과 함께 왜군에 대항하면서 전소했으며, 이때 많은 시체가 이곳에 쌓였으므로 지금도 피밭골이라고 불린다. 현재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영조 6년(1730)에 대왕의 모후 숙빈 최씨의 명복을 위해 다시 지은 것이다.
○ 갑 사
420년(백제 구이신왕 1)에 고구려에서 온 아도가 창건하였으며 505년(무녕왕 5)천불전을 중창하고 556년(위덕왕 3)에 혜명이천불전, 보광명전, 대광명전을 중건하였다.
679년(문무왕 19)에 의상이 당우 1000 여 칸을 더 지어 화엄도량으로 삼아 신라 화엄십찰의 하나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모두 소실되어 1654년(효종 5)에 사정,신휘 등이 크게 중창하였고 1875년(고종 12)에 다시 중건 하였다.
○ 옥천사
옥천사는 개산조사에 의해 창건된 사찰이다. 조사님이 태어날 때 모친의 태몽에 연못의 연꽃을 보고 출생하셨으니, 관음보살처럼 자비로운 덕상(德相)이었다고 한다. 청도 운문사에서 은사 원만(圓滿) 스님에게 득도(得度)하고 설호율사(雪湖律師)에게 비구니계(比丘尼戒)를 받고 정진하시다가 고향인 포항에 인연이 있는 사람을 불법 속에 인도하고자 결심하고 백일기도를 정성으로 모셨다.
회향(回向)하시는 날 밤 꿈속에 백의선인(白衣仙人)이 출현하여, 지팡이로 가리키는 곳에 지연(地緣)을 보니, 대가람상(大伽藍相)이었다. 불보살님의 가피력을 성취할 수 있다고 기뻐하며, 사재를 봉헌하여 법당, 요사, 산신각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선인이 가리킨 곳에 우물을 파서 옥수(玉水) 같은 물을 얻으니, 그 물맛이 천하일미(天下一味)라 이 사찰을 방장산 옥천사라고 이름하였다.
그 후 6·25 전쟁으로 법당과 산신각은 협소 퇴락되었고, 선득 스님의 유언에 따라 질녀와 조카가 중건하였다. 그리고, 지금의 대웅전, 천불전, 삼성각, 광명보탑, 유치원 등으로 도량을 4천여 평으로 확장하였고 절의 이름을 짓게 한 우물을 육각정으로 완공하여 기도영험 도량 속에 수행, 포교, 전당으로 자리하고 있다.
○ 불국사
창건
5천년 장구한 세월동안 발전해온 우리 민족문화의 정수로 천년세월 너머 현대의 무지한 중생들에게 불국토의 장엄함과 사모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불국사.
불국사의 창건에 관한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는 서기 528년(신라 법흥왕 15)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의 발원(發願)으로 불국사를 창건하여 574년 진흥왕(眞興王)의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 절을 크게 중건하면서 비로자나부처님(毘盧遮那佛)과 아미타부처님(阿彌陀佛)을 주조해 봉안했고, 670년(문무왕 10)에는 무설전(無說殿)을 새로 지어 《화엄경(華嚴經)》을 강설(講說)하였으며, 그 후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金大城)에 의하여 크게 개수되면서 탑과 석교 등도 만들었다고 하였다.
다른 기록인, 《불국사 사적(事蹟)》에는 이보다 앞선 눌지왕(訥祗王)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고 경덕왕 때 재상(宰相) 김대성에 의하여 크게 3창(祠)되었다 했다. 처음에는 소규모로 창립되었던 불국사가 경덕왕 때의 재상 김대성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 <대성효 2세부모(大城孝二世父母)>조에는 경덕왕 10년 김대성이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으며, 김대성이 이 공사를 착공하여 완공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국가에 의하여 완성을 보았으니 3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당시의 건물들은 대웅전 25칸, 다보탑 ·석가탑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 극락전 12칸, 무설전(無說殿) 32칸, 비로전(毘盧殿) 18칸 등을 비롯하여 무려 80여 종의 건물(약 2,000칸)이 있었던 장대한 가람의 모습이었다고 전한다.
"구름을 마시고 토한다"는 토함산(745m)의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불국사와 석굴암은 찬란한 신라불교문화의 핵심으로 1,440년전 신라 법흥왕 22년에 그 어머니 뜻에 따라 나라의 안정과 백성의 평안을 위하여 세워졌으며, 그후 신라 경덕왕 (742-764)때 재상 김대성이 다시 지어 절의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건물은 물론 값진 보물들이 거의 불에 타거나 약탈되었다. 1920년 이전에는 일부 건물과 탑만이 퇴락한 채 남아 있었으나, 지속적인 원형복구 및 보수로 국보 7점을 간직한 오늘날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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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11.22
  • 저작시기2009.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62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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