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기독교 강요요약(크리스챤 다이제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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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성찬의 신비는 두 가지 사실에 있다. 즉, 첫째로는 우리의 연약성 때문에 불가시적인 것을 우리 눈에 보이도록 우리 앞에 표현하는 물질적 표지들이요, 둘째로는 이 상징들 자체에 의해서 표현되고 제시되는 영적 진리”라고 말할 때 결코 물질주의적 실재론이 아니다. 그리고 칼빈이 만찬에 있어서 표시, 중심자, 효과가 성찬의 중요한 요소들이라고할 때 표시는 떡과 즙이 무엇을 뜻하는가에 관한 것이요, 중심사는 십자가를 지셨다가 부화하신 예수 그리스도시오. 효과는 구속, 의, 성화, 영생 및,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다른 축복들을 의미한다.
칼빈은 성찬에서 우리 믿는 자들이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확실한데, 이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이라는 사실이다.
칼빈은 로마의 화체설, 루터의 그리스도의 편재설, 그리고 츠빙글리의 상징주의에 반대하고 있었다고 한다.
제 18장: 교황주의 교회의 미사: 그것은 그리스도의 성찬을 속되게 할 뿐만 아니라 형편없는 것으로 만든다.
한 하나님, 한 신앙, 한 그리스도, 그의 몸인 하나의 교회가 있듯이 하나의 세례가 있을 뿐이다. 이 세례는 반복될 수 없다. 그러나 성찬은 반복적으로 베풀어진다. 왜냐하면 일단 교회에로 이끌려 들어온 사람들이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먹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기 때문이다.
제 19장: 로마 카톨릭 교회가 사용하는 5개의 성례(그들은 세례와 성찬을 더해 7성례를 사용한다): 이것을 성례라 함은 성경적이 아니다.
칼빈은 세례와 성찬이 신약성경에 제시된 성례전이라고 못 박고, 성례전을 결정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강조한다. 칼빈은 성례의 뜻을 다시 정의함으로 그들의 주장을 반박한다.
“성례전이란 하나님의 확실한 구원의 약속에 의하여 믿는 자들의 양심을 격려하고 위로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 대한 확신을 인간으로부터 얻을 수 없다. 성례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호의의 증거여야 한다.
로마 카톨릭 교도들과 스콜라주의 신학자들이 저 고대교회의 “회개” 행위를 “하나의 성례”로 전략시킨 것은 전적으로 비성경적이다. 이 고해성사의 핵심은 단순히 “회개”와 “죄의 용서”이지 결코 성례화될 수 없다고 칼빈은 주장한다. 칼빈은 “세례”를 “고해성사”에 해당되는 것으로 주장하는 바 이 세례란 곧 은혜받은 “증거”요 “확신의 표시”로서 회개를 의미한다. “요한은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설교하였다”
제 20장: 국가와 정부(교회와의 관계)
첫째로 은혜와 믿음으로 칭의를 얻은 기독교인은 율법의 모든 요국와 고발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 즉 기독교인은 칭의를 얻게 된 것은 율법의 행위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의해서라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이 율법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리고 이어서 기독교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약의 모든 의식법으로부터 자유롭다.
둘째로 앞에서 본 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은 기독교인이 율법의 멍에에서 벗어난 자유를 가지고, 또한 율법의 강제력에 의해서 강요받지 않고, 하나님의 뜻으로서의 유럽ㅂ으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지킬 수 있다는 뜻에서의 자유를 말한다. 우리가 이미 논한 바 있는 기독교인의 삶을 위해서 유용한 율법의 제 3사용을 말하고 있다. 즉, 이신칭의에 동방되는 참된 기독교인의 자유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수 있는 자유이다
셋째로 자유란 기독교인의 양심이 인간이 만들어 낸 전통과 규례 등 “중립적인 것들”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다. 따라서 칼빈은 양심의 소리 곧 자연법이 국가 질서 밑에 깔려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기독교인에게도 이 국가 공동체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국가의 역할은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는 한 하나님에 대한 외적인 예배를 소중히 여기고 보호해 주며, 경건의 교리와 교회의 위치를 방어하고, 우리 기독교인의 삶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사회와 연결시키며, 우리의 사회적 행동이 시민적 의에 이르게 하고, 우리들 상호간에 화해를 도모케 하며, 평화와 안정을 진척시킨다.
이렇게 볼 때, 칼빈에게 있어서 국가의 본래의 존재 이유는 일차적으로 “영적인 정부” 내지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위해서 존재하는데 있다. 그러나 결코 중세기의 로마 카톨릭 교회처럼 국가가 교회에 예속하는 식의 두 왕국도 아니요, 19세기 나치스의 히틀러의 경우처럼 교회가 국가에 예속되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모두 한 왕국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칼빈은 정부 형태에 관하여 귀족주의가 가미된 민주주의가 가장 좋다고 한다. 즉, 신정하의 엘리트 중심의 민주주의가 가장 좋은 정부 형태라는 것이다. 칼빈은 경험에 비추어 볼 때도 이 형태가 추천할 만하고 성경에 근거해 생각할 때도 그렇다고 한다.
공직자가 하나님의 뜻대로 나아갈 때에 그는 “그의 나라의 아버지”, “그의 백성의 목자”, “평화의 수호자”, “의의 보호자”, “불의의 보응자”로 불리어질 수 있다. 이들 공직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한다.
그런데 칼빈은 악한 공직자들까지도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받았다고 한다. 이처럼 악한 통치자가 있게 된 이유는 하나님이 이들을 통하여 심판하시기 위함이다.
끝으로 칼빈은 공직자에 대한 순종이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즉, 사람들을 만조시키려고 하나님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주님은 왕 중의 왕이시다. 그가 그의 거룩한 입을 여실 때에 누구나 순종해야 한다. 그 어떤 인간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말보다 이 주님의 말씀이 중요하다. 다음으로 우리는 공직자에게 순조해야 한다. 그러나 오직 주님 안에서, 만약 이 공직자들이 하나님을 거슬러서 명령할 때 그것은 들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인간들보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우리들이 경건으로부터 후퇴하기보다는 고난을 감수할 때, 우리는 주님이 요구하시는 순종을 택하고 있다는 사실로 위로를 받자. 실망하지 말자. 하나님은 다른 말씀으로 우리를 일깨우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엄청난 구속의 핏값을 주고 사셨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들의 악한 욕망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 더욱이 그들의 불경에 굴복해서는 더욱더 안 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고전 7:23)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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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11.30
  • 저작시기20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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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63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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