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이순신
●생애
●자살설과 은둔설
●생애
●자살설과 은둔설
본문내용
여 공적을 쌓을 수 있게 해주었던 유성룡을 비롯하여 많은 대신들과 자신과 같이 근무했던 재장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피화되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나 임진왜란에 의병으로 활동한 김덕령의 의문이 가득한 역모사건으로 인한 사망으로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고 백성들에게 신망이 있던 인물들이 이러한 풍문에 연루되면 벗어나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중 일본과 휴전을 한 시기에 이몽학의 난이 일어났고, 다른 일 때문에 잠시 벼슬에 물러나 있던 김덕령은 이 난을 토벌하기 위해 의병을 모집하여 충청도로 향하다 난이 진압되어 회군하였는데, 이몽학과 내통하였다는 신경행의 무고로 체포되었다. 당시 국가를 위해서 벼슬에 물러나서도 난의 토벌을 위해 의병을 모집한 충정이 오히려 공격당한 계기가 되어버렸다. 김덕령은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하여 자신을 묶고 있던 포승줄을 힘으로 끊고 형옥의 담을 넘어갔다 되돌아오는 것으로 힘으로 언제든지 탈출할 수 있지만 반역에 가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 지지않고 혹독한 고문으로 인한 장독으로 옥사하였고 그의 부장이었던 최담령 또한 처형 당하였다.
같이 풍문에 연루되었던 홍의장군으로 알려진 의병장 곽재우와 홍계남은 다행이 풀려났지만, 이때의 풍문이 연결된 많은 의병장들이 옥사하였고, 곽재우를 비롯한 많은 의병장들이 이러한 풍문에 또 다시 연루될 것을 저어하여 의병들을 해산하고 운든하였다고 한다. 이후 곽재우는 정유재란이 재발하자 다시 세상으로 나와 의병장으로 활동하였으나 정유재란이 끝나고는 조정에서 주는 벼슬을 마다하고 고향에 다시 은둔하였다.
이순신의 죽음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공식적으로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하지만 이른바 “이순신 자살설”과 "은신설" 그의 죽음 이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송희립이 이순신의 전사를 목격한 뒤, 독전한 것으로 나타난다. 《행록》이외의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이순신은 분명 관음포 앞바다에서 적탄에 맞아 전사했으며, 그 후에 지휘권을 손문욱, 또는 송희립이 넘겨받았다는 좀더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내용이 된다. 이처럼 《행록》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료에서 이순신의 전사를 인정하는 기록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굳이 논리적 모순이 지적되는 《행록》에 의존하여 은둔설을 주장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지적을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이순신의 인품과 행적에 비추어 볼 때 죽음을 회피하기 위해 전쟁 중에 도피하여 전사를 가장한다는 것은, 폄훼적인 해석과 연관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자살설에 대해서도 유효한 비판적 견해이다. 다시 말해 사약을 받아도 궁궐 쪽을 향해 배례를 한 후 죽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던 시대에 후원자인 유성룡의 파면과 고문 받아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자살을 택한다는 것은 유교적 세계관에서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이순신이 죽은 지 400년이 지난 지금, 어떠한 주장도 한갓 가설과 추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적탄을 빌어 죽음을 택한 것이던, 마지막 전투임을 알고 전사(戰死)를 위장하여 은둔생활을 한 것이던, 확실한 단정은 할 수가 없다. 동시에 두 가설을 뒷받침 할만한 결정적인 물증이나 유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도 기존의 전사설을 전복시키기에 부족하다는 것이다.
무패의 경이적인 전공에도 불구하고 백의종군과 죽음의 위기를 겪어야 했던 이순신의 극적인 일생에 주관적 정서가 개입한 ‘동정론’적 가설. 그리고 무능한 조정과 왕실에 대한 상대적 비판을 부각시키는 의도가 깔린 ‘음모이론’ 모두가 공증성과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좀 더 치밀한 연구와 이론적 근거제시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임진왜란 중 일본과 휴전을 한 시기에 이몽학의 난이 일어났고, 다른 일 때문에 잠시 벼슬에 물러나 있던 김덕령은 이 난을 토벌하기 위해 의병을 모집하여 충청도로 향하다 난이 진압되어 회군하였는데, 이몽학과 내통하였다는 신경행의 무고로 체포되었다. 당시 국가를 위해서 벼슬에 물러나서도 난의 토벌을 위해 의병을 모집한 충정이 오히려 공격당한 계기가 되어버렸다. 김덕령은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하여 자신을 묶고 있던 포승줄을 힘으로 끊고 형옥의 담을 넘어갔다 되돌아오는 것으로 힘으로 언제든지 탈출할 수 있지만 반역에 가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 지지않고 혹독한 고문으로 인한 장독으로 옥사하였고 그의 부장이었던 최담령 또한 처형 당하였다.
같이 풍문에 연루되었던 홍의장군으로 알려진 의병장 곽재우와 홍계남은 다행이 풀려났지만, 이때의 풍문이 연결된 많은 의병장들이 옥사하였고, 곽재우를 비롯한 많은 의병장들이 이러한 풍문에 또 다시 연루될 것을 저어하여 의병들을 해산하고 운든하였다고 한다. 이후 곽재우는 정유재란이 재발하자 다시 세상으로 나와 의병장으로 활동하였으나 정유재란이 끝나고는 조정에서 주는 벼슬을 마다하고 고향에 다시 은둔하였다.
이순신의 죽음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공식적으로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하지만 이른바 “이순신 자살설”과 "은신설" 그의 죽음 이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송희립이 이순신의 전사를 목격한 뒤, 독전한 것으로 나타난다. 《행록》이외의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이순신은 분명 관음포 앞바다에서 적탄에 맞아 전사했으며, 그 후에 지휘권을 손문욱, 또는 송희립이 넘겨받았다는 좀더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내용이 된다. 이처럼 《행록》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료에서 이순신의 전사를 인정하는 기록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굳이 논리적 모순이 지적되는 《행록》에 의존하여 은둔설을 주장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지적을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이순신의 인품과 행적에 비추어 볼 때 죽음을 회피하기 위해 전쟁 중에 도피하여 전사를 가장한다는 것은, 폄훼적인 해석과 연관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자살설에 대해서도 유효한 비판적 견해이다. 다시 말해 사약을 받아도 궁궐 쪽을 향해 배례를 한 후 죽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던 시대에 후원자인 유성룡의 파면과 고문 받아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자살을 택한다는 것은 유교적 세계관에서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이순신이 죽은 지 400년이 지난 지금, 어떠한 주장도 한갓 가설과 추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적탄을 빌어 죽음을 택한 것이던, 마지막 전투임을 알고 전사(戰死)를 위장하여 은둔생활을 한 것이던, 확실한 단정은 할 수가 없다. 동시에 두 가설을 뒷받침 할만한 결정적인 물증이나 유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도 기존의 전사설을 전복시키기에 부족하다는 것이다.
무패의 경이적인 전공에도 불구하고 백의종군과 죽음의 위기를 겪어야 했던 이순신의 극적인 일생에 주관적 정서가 개입한 ‘동정론’적 가설. 그리고 무능한 조정과 왕실에 대한 상대적 비판을 부각시키는 의도가 깔린 ‘음모이론’ 모두가 공증성과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좀 더 치밀한 연구와 이론적 근거제시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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