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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쾌거를 이룩하였다.
1940년 임시 정부의 주석으로 김구와 함께 일하다가 급성폐렴으로 죽었다. 임시 정부 국장으로
장례가 거행되었고, 1962년 건국 훈장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동휘 (1872-1935) 독립 운동가. 함경 남도 단천 출신. 호는 성재. 군관 학교 졸업 후 육군 차
령을 지냈다. 이동녕, 안창호등과 식민회를 조직하여 개화 운동과 항일 투쟁을 벌였으며, 개성, 평
양, 원산 등지에 여러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문화 사업에도 많은 활동을 하였다. 또한, 민족계몽
을 위한 단체로서 함경도 출신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북 흥학회를 조직하고, 후에 서우 학회와 발
전시켰다. 1919년에는 상하이 임시정무의 국무 총리가 돠었다. 임시 정부 국무 총리 사임 후, 시
베리아에서 생을 마쳤다.
이범석 (1900-1972) 독립 운동가. 호는 철기. 서울 출신. 1919년 중국의 운남 육군 강무학교를 수
석으로 졸업하고 신흥 무관 학교 북로 군정서 교관사관 연성소 교관 등을 지냈다. 같은 해 10월
청산리 전투에서 총사령관 김좌진을 도와 제2대대 지휘관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그 뒤, 1940년 대
한 민국임시 정부가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한 뒤 , 광복군의 참모 총장이 되었다. 1948년 정부
수립과 더불어 초대 국무 총리와 국방부 장관을 겸임하였고, 1950년에는 주중국 대사 내무부 장
관 등을 역임하였다. 1963년에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저서로는 회고록인 방랑의 정
열 , 노설집인 민족과 청년 , 우동불 등이 있다.
이범윤 (1863-?) 한말의 관리, 독립 운동가. 훈련 대장 이경하의 아들이며, 이범진의 동생이다.
1902년 청나라가 간도의 영유권을 주장하자 간도 관리사로 부임하여 간도 지방의 한인 보호에 힘
썼다. 1907년 일제가 간도에 출장소를 두자 시베리아에 망염하여 의병을 모아 총대장이 되었다.
그 후 대종교에 입교했으며, 1925년에는 신민부 조직에 침가하였다. 1962년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추서되었다.
이범진 (1853-1910) 조선말기의 문신, 순국지사. 자는 성삼. 187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서 1887년 협판 내무 부사가 되었다. 친러파로 농상공부 협판으로 있다가 을미
사변으로 파면되었고, 춘생문사건이 실패로 돌아가자 러시아로 망명하였다. 이듬해 귀국, 아관 파
천을 계기로 경무사가 되었으며,이후 미국,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의 공사를 역임하였다.
러 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러시아로 망명하였다. 1910년 국치를 당하자 자결하였다. 1963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이병기 (1891-1968) 국문학과, 시조시인. 호는 가람. 전라 북도 익산 출신. 1921년 조선어문 연
구회를 조직하고, 시조에 뜻을 두어 1926년 시조회 발기 하였다. 후에 이를 가요 연구회 로
개칭한 다음, 시조 혁신을 제찬하는 논문들을 발표하였다. 1930년 조선어 철자법제정위원이 되었
고 연희 전문학교, 보성전문 학교에서 조선문학을 강의하다가, 1942년 조선어 학회사건으로 옥고
를 치렀다. 출옥 후, 서울 대학교 교수 및 각 대학강사로 지냈다. 6, 25를 만나 1951년부터 전라북
도 전시 연합대학 교수, 전북 대학교 문리대 학장을 지내다 1956년 정년 퇴임하였다. 1962년 문화
포장을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가람 시조집 을 비롯하여 국문학 개론 , 국문학전사 , 가람문선 등
이 있다.
이봉창 (1900-1932) 독립운동가. 서울 출신.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 등 막일로 생계를
꾸려 나가다가 일제의 침략으로 한민족의 생계가 위협받는다는 생각이 들자, 1931년 상하이로 가
서 김구가 지도하는 한인 애국단에 가입하여 일보 천황 암살 계획을 추진하였다. 1932년 일본의
천황 히로히토에게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어, 그 해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봉창의
거사가 알려지자 중국의 각 신문들은 이 사실을 크게 보도하였다. 1962년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을 추서하였다.
이상 (1910-1937) 시인, 소설가. 본명은 김해경. 서울 출신. 경성 고등학교 건축과를 졸업하고,
조선과 건축 의 표지 도안 현상 모집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1934년에 구인회에 가입하여 활동하
였고, 조선 중앙 일보 에 시 오감도 를 1936년에는 조광 지에 소설 날개 를 발표하여 문단의 주
목을 끌었다. 그는 1930년대를 전후하여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자의식 문학의 선구자인 동시에
초현실주의적 시인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시작품으로는 소영위제 , 정식 , 명경 등과 소설 봉별
기 , 종생기 , 수필 권태 , 산촌 여정 등이 있다.
이상설 (1870-1917) 독립 운동가. 호는 부재. 충청 북도 진천 출신. 1894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교수 관장, 한성 사범 학교 교관, 궁내부 특진관에 승진 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
되자, 이듬해 이동녕, 정순만 등과 북간도로 망명하여, 그 곳에서 항일 민족 교육의 요람인 서전
의숙을 건립하고 숙장이 되었다. 1907년 이준 이위종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제2회 만
국 평화 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참석하여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했으나, 각 국가들의 이익 다툼으
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 해에 대한 제국의 주장을 밝힌 공고사 를 평화 회의에 참석한 각국
위원에게 보내고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여, 한국의 독립이 동양 평화의 관건임을 주장하였다. 조
국의 국권 회복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1917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생을 마쳤다. 1962년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상재 (1850-1927) 정치가, 사회 운동가. 호는 월남. 충청 남도 서천 출신. 1894년 갑오개혁내
각 총무국장에 올라, 탐관 오리를 몰아 내고 국운을 바로 잡기에 힘썼다. 서재필, 윤치호 등과 독
립 협회를 조직하고, 독립 협회가 주최한 만민 공동회 의장과 사회를 맡아 보았다. 1914년
YMCA(와이엠시에이) 를 비롯한 세브란스, 배제, 경신과 개성의 한영 서원, 광주의 숭일 군산의
연맹 등 YMCA를 모두 합하여 조선 기독교 청년회 전국 연합회를 조직하였다. 이
1940년 임시 정부의 주석으로 김구와 함께 일하다가 급성폐렴으로 죽었다. 임시 정부 국장으로
장례가 거행되었고, 1962년 건국 훈장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동휘 (1872-1935) 독립 운동가. 함경 남도 단천 출신. 호는 성재. 군관 학교 졸업 후 육군 차
령을 지냈다. 이동녕, 안창호등과 식민회를 조직하여 개화 운동과 항일 투쟁을 벌였으며, 개성, 평
양, 원산 등지에 여러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문화 사업에도 많은 활동을 하였다. 또한, 민족계몽
을 위한 단체로서 함경도 출신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북 흥학회를 조직하고, 후에 서우 학회와 발
전시켰다. 1919년에는 상하이 임시정무의 국무 총리가 돠었다. 임시 정부 국무 총리 사임 후, 시
베리아에서 생을 마쳤다.
이범석 (1900-1972) 독립 운동가. 호는 철기. 서울 출신. 1919년 중국의 운남 육군 강무학교를 수
석으로 졸업하고 신흥 무관 학교 북로 군정서 교관사관 연성소 교관 등을 지냈다. 같은 해 10월
청산리 전투에서 총사령관 김좌진을 도와 제2대대 지휘관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그 뒤, 1940년 대
한 민국임시 정부가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한 뒤 , 광복군의 참모 총장이 되었다. 1948년 정부
수립과 더불어 초대 국무 총리와 국방부 장관을 겸임하였고, 1950년에는 주중국 대사 내무부 장
관 등을 역임하였다. 1963년에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저서로는 회고록인 방랑의 정
열 , 노설집인 민족과 청년 , 우동불 등이 있다.
이범윤 (1863-?) 한말의 관리, 독립 운동가. 훈련 대장 이경하의 아들이며, 이범진의 동생이다.
1902년 청나라가 간도의 영유권을 주장하자 간도 관리사로 부임하여 간도 지방의 한인 보호에 힘
썼다. 1907년 일제가 간도에 출장소를 두자 시베리아에 망염하여 의병을 모아 총대장이 되었다.
그 후 대종교에 입교했으며, 1925년에는 신민부 조직에 침가하였다. 1962년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추서되었다.
이범진 (1853-1910) 조선말기의 문신, 순국지사. 자는 성삼. 187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서 1887년 협판 내무 부사가 되었다. 친러파로 농상공부 협판으로 있다가 을미
사변으로 파면되었고, 춘생문사건이 실패로 돌아가자 러시아로 망명하였다. 이듬해 귀국, 아관 파
천을 계기로 경무사가 되었으며,이후 미국,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의 공사를 역임하였다.
러 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러시아로 망명하였다. 1910년 국치를 당하자 자결하였다. 1963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이병기 (1891-1968) 국문학과, 시조시인. 호는 가람. 전라 북도 익산 출신. 1921년 조선어문 연
구회를 조직하고, 시조에 뜻을 두어 1926년 시조회 발기 하였다. 후에 이를 가요 연구회 로
개칭한 다음, 시조 혁신을 제찬하는 논문들을 발표하였다. 1930년 조선어 철자법제정위원이 되었
고 연희 전문학교, 보성전문 학교에서 조선문학을 강의하다가, 1942년 조선어 학회사건으로 옥고
를 치렀다. 출옥 후, 서울 대학교 교수 및 각 대학강사로 지냈다. 6, 25를 만나 1951년부터 전라북
도 전시 연합대학 교수, 전북 대학교 문리대 학장을 지내다 1956년 정년 퇴임하였다. 1962년 문화
포장을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가람 시조집 을 비롯하여 국문학 개론 , 국문학전사 , 가람문선 등
이 있다.
이봉창 (1900-1932) 독립운동가. 서울 출신.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 등 막일로 생계를
꾸려 나가다가 일제의 침략으로 한민족의 생계가 위협받는다는 생각이 들자, 1931년 상하이로 가
서 김구가 지도하는 한인 애국단에 가입하여 일보 천황 암살 계획을 추진하였다. 1932년 일본의
천황 히로히토에게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어, 그 해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봉창의
거사가 알려지자 중국의 각 신문들은 이 사실을 크게 보도하였다. 1962년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을 추서하였다.
이상 (1910-1937) 시인, 소설가. 본명은 김해경. 서울 출신. 경성 고등학교 건축과를 졸업하고,
조선과 건축 의 표지 도안 현상 모집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1934년에 구인회에 가입하여 활동하
였고, 조선 중앙 일보 에 시 오감도 를 1936년에는 조광 지에 소설 날개 를 발표하여 문단의 주
목을 끌었다. 그는 1930년대를 전후하여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자의식 문학의 선구자인 동시에
초현실주의적 시인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시작품으로는 소영위제 , 정식 , 명경 등과 소설 봉별
기 , 종생기 , 수필 권태 , 산촌 여정 등이 있다.
이상설 (1870-1917) 독립 운동가. 호는 부재. 충청 북도 진천 출신. 1894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교수 관장, 한성 사범 학교 교관, 궁내부 특진관에 승진 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
되자, 이듬해 이동녕, 정순만 등과 북간도로 망명하여, 그 곳에서 항일 민족 교육의 요람인 서전
의숙을 건립하고 숙장이 되었다. 1907년 이준 이위종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제2회 만
국 평화 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참석하여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했으나, 각 국가들의 이익 다툼으
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 해에 대한 제국의 주장을 밝힌 공고사 를 평화 회의에 참석한 각국
위원에게 보내고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여, 한국의 독립이 동양 평화의 관건임을 주장하였다. 조
국의 국권 회복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1917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생을 마쳤다. 1962년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상재 (1850-1927) 정치가, 사회 운동가. 호는 월남. 충청 남도 서천 출신. 1894년 갑오개혁내
각 총무국장에 올라, 탐관 오리를 몰아 내고 국운을 바로 잡기에 힘썼다. 서재필, 윤치호 등과 독
립 협회를 조직하고, 독립 협회가 주최한 만민 공동회 의장과 사회를 맡아 보았다. 1914년
YMCA(와이엠시에이) 를 비롯한 세브란스, 배제, 경신과 개성의 한영 서원, 광주의 숭일 군산의
연맹 등 YMCA를 모두 합하여 조선 기독교 청년회 전국 연합회를 조직하였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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