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명의 여명 : 고인돌에서 대형옹관묘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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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Ⅱ. 전라도의 고인돌이야기
1. 전라도 고인돌 분포 현황
2. 전라도 고인돌의 특징
3. 고인돌로 본 전라도의 선사시대

Ⅲ. 영산강 유역 옹관묘 이야기
1. 옹관묘의 현황
2. 영산강 유역 옹관묘의 특징
3. 옹관묘로 본 고대사회의 변화와 성격 (4~6세기)

Ⅳ. 맺음말 (고인돌과 옹관묘 이야기)

본문내용

한 이러한 문화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백제의 지배문화와 접목이 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지역의 고인돌을 축조하였던 이들은 농경과 어로를 생업으로 하였고, 강변이나 해안의 낮은 구릉지대를 거주지로 선택하였던 것으로 보아 전남지역의 해안이나 강변은 최적의 생활공간으로 선택되기에 적합하였을 것이다.
또한 이 지역의 고대문화는 강한 지역적 특성을 지닌 대형 옹관묘로 살펴보았다. 영산강 유역은 고대사회에 독자적인 토착세력이 문화권을 형성하면서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 옹관고분 중에서도 반남면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金銅冠), 환두대도(環頭大刀)는 바로 그 같은 사회 성격의 지배자가 착용하였음직한 유물로, 고분의 규모나 출토 유물의 내용이 바로 옹관묘를 사용했던 집단의 사회적 배경이나 정치적 문화적 수준, 영향력을 살펴보게 하고 있다. 그러나, 5세기 말이 되면 백제의 정치적인 지배하에 들어간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백제의 지배세력의 묘제를 대표하는 석실분이 이 지역에 새롭게 조영되고 있으며, 그것이 옹관묘제의 소멸시기와 대체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전기의 석실분은 옹관묘의 전통이 유지되면서 토착지배세력들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석실분이 유입되어 공존한 것이 아닐까 추측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전남지역문화의 토착적 전통이 강했던 이들 문화세력들을 포섭하는 과정은 굴복이라기보다 지역에 따라 타협, 포용, 혹은 연대관계로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시기 이후 백제의 정치 문화적인 영향력이 점차 강하게 파급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에 대해서 앞으로 영산강유역 고대문화의 주인공이 과연 누구이며, 그들의 사회가 어떻게 발전하였는지 연구해야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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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학교 국사학과, 『영산강 문화권』, 역사공간,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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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2.25
  • 저작시기2007.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85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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