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병자호란의 배경
- 정묘호란[丁卯胡亂] -
2. 병자호란의 발발 ((1636년(인조 14) 12월∼1637년 1월에 청나라의 제2차 침구(侵寇)로 일어난 조선·청나라의 싸움. ))
3. 병자호란의 전개
4. 남한산성의 방어와 강화조약
5.북벌계획
- 정묘호란[丁卯胡亂] -
2. 병자호란의 발발 ((1636년(인조 14) 12월∼1637년 1월에 청나라의 제2차 침구(侵寇)로 일어난 조선·청나라의 싸움. ))
3. 병자호란의 전개
4. 남한산성의 방어와 강화조약
5.북벌계획
본문내용
존중히 여기는 유림들이고 또 하나는 병자란에 순절한 열사들의 족척(族戚)들이었다. 이에 해당되는 인물들이 곧 송시열(宋時烈) · 김집(金集) · 김상헌(金尙憲) · 송준길(宋浚吉) 등이었으며, 이들과 더불어 극비리에 북벌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특히 효종의 북벌계획은 주자(朱子)가 말한 '오랑캐가 중원(中原) 사람을 얻어 중국제도를 가르쳐 받아 오랑캐가 점점 쇠하고 미약해진다'고 하는 이론에 근거를 두고 있어 무용(武勇)이 그처럼 날쌔던 청인이 오래지 않아 미약해지고 말 것이며 그 때가 오기까지 무비(武備)를 닦아서 전쟁을 일으키면 중원의 의사 호걸이 반드시 내응하여 정청복명(征淸復明)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그 시기를 북벌 계획으로부터 10년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는 그 나름대로 청의 형세를 세심히 관찰한 결과 저들은 반드시 망할 형세에 있음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전(前)의 한시(汗時)에는 형제가 매우 번성하였는데 지금은 점점 소모하였고 전의 한시에는 인재가 심히 많더니 지금은 모두 용악(庸惡)하고 전의 한시에는 오로지 무비(武備)만을 숭상하였는데 지금은 무비는 점차 퇴폐하여지고 자못 중국의 일(문약화(文弱化)를 일컬음)만을 본받으려 한다. ……지금의 한은 비록 영웅이라고 하나 주색에 이미 심하게 빠져 그 형세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註5]」
이처럼 효종은 청이 머지 않아 멸망할 증세를 안고 있음을 확신하였으며, 이와 같은 확신 위에서 북벌을 계획하였다. 그는 '포수(砲手) 10만명을 양성하되 자식 사랑하듯 하여 모두 용감하게 죽을 수 있는 군사'를 양성하고, 또 청측에서는 두만 · 압록강 대안으로부터 요동 심양 천리길은 청(淸) 조상의 발상지라는 명목으로 아무도 들어가 살지 못하게 하여 광활한 황무지가 되어 있어 군대가 산해관(山海關) 밖까지 진격하여 가는 데는 아무 어려움이 없으며, 또 우리나라에서 보내는 세폐(歲幣)는 저들이 모두 심양과 요동에 두었으므로 이것을 군수용으로 사용할 수 있으며, 산해관까지 가면 명의 유민과 조선 피로인이 적극 내응한다고 믿었다. 효종은 이러한 계획 수행을 위하여 송시열과 독대(獨對)하는 모험까지 감행하였다. 독대란 국왕이 신하를 만날 때 사관(史官) 승지(承旨) 등을 대동치 않는 것으로 이는 원래 국법으로 금해져 있는 것이었다. 효종은 원년(1650)에 훈련대장을 연로한 구인후(具仁**) 대신 이시백(李時白)으로 임명하고 병기를 정비하고 성지(城池)를 수축하였다. 효종의 이러한 북벌 준비는 김자점(金自點) 등의 반대 세력에 의하여 청에 밀고되었고 이로 인하여 한 때 북벌계획 수행에 차질을 가져오는 듯하였으나 송시열 등이 효종에게 북벌을 계속 권고하여 효종3년(1652)에는 인조 이래의 어영군(御營軍)을 제도화하여 군보(軍保)를 정하고 어영청(御營廳)이라 하여 이완(李浣)을 어영대장으로 삼았다. 또 금군(禁軍)을 내삼청(內三廳)이라 하고 여기에 기마대(騎馬隊)를 두었고, 내구(內廐)에 양마(良馬)를 길러 벌대총(伐大郎)이라 하고, 융복(戎服)의 팔소매를 좁게 하여 활동이 편하도록 개량하였으며, 훈련원의 군원수도 확충하여 수시로 열병(閱兵)을 하였다.
한편 군비확충의 재원 마련을 위하여 직접 군역의 의무가 없는 공경(公卿) 등 상류층에게서도 포(布) 1필(疋)을, 또 승려에게서도 미(米) 3석을 거두어 상하 군민을 모두 북벌전체제에 동원하였다.
숭명반청(崇明反淸) 사상이 도도한 시대풍조를 이루고 있었던 당시 이러한 북벌계획이 민간 사이에서도 국가의 당연한 일인양 공명하여 전쟁의 준비 태세를 갖출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북벌계획은 청의 국운이 날로 융성하여져 가고 있어 좀처럼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다.
효종은 북벌의 웅지(雄志)를 품은 채 재위 10년 만에 승하하였고, 아울러 그 계획도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북벌계획은 당시 국제 정세로는 거의 실현되기 어려운 것이었음은 더 논할 바 없다. 그러나 북벌계획은 반청모화사상(反淸慕華思想)을 더욱 뿌리 깊게 정착시키고 중화문명은 오직 우리나라에만 남았다는 문화적 교만심에 가까운 우월감 만을 북돋우어 문명의 고루성과 침체성만을 남기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문화적 우월감은 북벌론(北伐論)을 쉽게 포기할 수 없게 하였다. 숙종조에 이르러서도 병자호란에서의 강화(講和)는 종사(宗社)를 위해 죽음을 참은 것이고 만성(萬姓)을 위해 치욕을 거둔 것이니 효종의 뜻을 이어 군사를 다듬어 북벌을 수행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되었다.[[註6]
「전(前)의 한시(汗時)에는 형제가 매우 번성하였는데 지금은 점점 소모하였고 전의 한시에는 인재가 심히 많더니 지금은 모두 용악(庸惡)하고 전의 한시에는 오로지 무비(武備)만을 숭상하였는데 지금은 무비는 점차 퇴폐하여지고 자못 중국의 일(문약화(文弱化)를 일컬음)만을 본받으려 한다. ……지금의 한은 비록 영웅이라고 하나 주색에 이미 심하게 빠져 그 형세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註5]」
이처럼 효종은 청이 머지 않아 멸망할 증세를 안고 있음을 확신하였으며, 이와 같은 확신 위에서 북벌을 계획하였다. 그는 '포수(砲手) 10만명을 양성하되 자식 사랑하듯 하여 모두 용감하게 죽을 수 있는 군사'를 양성하고, 또 청측에서는 두만 · 압록강 대안으로부터 요동 심양 천리길은 청(淸) 조상의 발상지라는 명목으로 아무도 들어가 살지 못하게 하여 광활한 황무지가 되어 있어 군대가 산해관(山海關) 밖까지 진격하여 가는 데는 아무 어려움이 없으며, 또 우리나라에서 보내는 세폐(歲幣)는 저들이 모두 심양과 요동에 두었으므로 이것을 군수용으로 사용할 수 있으며, 산해관까지 가면 명의 유민과 조선 피로인이 적극 내응한다고 믿었다. 효종은 이러한 계획 수행을 위하여 송시열과 독대(獨對)하는 모험까지 감행하였다. 독대란 국왕이 신하를 만날 때 사관(史官) 승지(承旨) 등을 대동치 않는 것으로 이는 원래 국법으로 금해져 있는 것이었다. 효종은 원년(1650)에 훈련대장을 연로한 구인후(具仁**) 대신 이시백(李時白)으로 임명하고 병기를 정비하고 성지(城池)를 수축하였다. 효종의 이러한 북벌 준비는 김자점(金自點) 등의 반대 세력에 의하여 청에 밀고되었고 이로 인하여 한 때 북벌계획 수행에 차질을 가져오는 듯하였으나 송시열 등이 효종에게 북벌을 계속 권고하여 효종3년(1652)에는 인조 이래의 어영군(御營軍)을 제도화하여 군보(軍保)를 정하고 어영청(御營廳)이라 하여 이완(李浣)을 어영대장으로 삼았다. 또 금군(禁軍)을 내삼청(內三廳)이라 하고 여기에 기마대(騎馬隊)를 두었고, 내구(內廐)에 양마(良馬)를 길러 벌대총(伐大郎)이라 하고, 융복(戎服)의 팔소매를 좁게 하여 활동이 편하도록 개량하였으며, 훈련원의 군원수도 확충하여 수시로 열병(閱兵)을 하였다.
한편 군비확충의 재원 마련을 위하여 직접 군역의 의무가 없는 공경(公卿) 등 상류층에게서도 포(布) 1필(疋)을, 또 승려에게서도 미(米) 3석을 거두어 상하 군민을 모두 북벌전체제에 동원하였다.
숭명반청(崇明反淸) 사상이 도도한 시대풍조를 이루고 있었던 당시 이러한 북벌계획이 민간 사이에서도 국가의 당연한 일인양 공명하여 전쟁의 준비 태세를 갖출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북벌계획은 청의 국운이 날로 융성하여져 가고 있어 좀처럼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다.
효종은 북벌의 웅지(雄志)를 품은 채 재위 10년 만에 승하하였고, 아울러 그 계획도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북벌계획은 당시 국제 정세로는 거의 실현되기 어려운 것이었음은 더 논할 바 없다. 그러나 북벌계획은 반청모화사상(反淸慕華思想)을 더욱 뿌리 깊게 정착시키고 중화문명은 오직 우리나라에만 남았다는 문화적 교만심에 가까운 우월감 만을 북돋우어 문명의 고루성과 침체성만을 남기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문화적 우월감은 북벌론(北伐論)을 쉽게 포기할 수 없게 하였다. 숙종조에 이르러서도 병자호란에서의 강화(講和)는 종사(宗社)를 위해 죽음을 참은 것이고 만성(萬姓)을 위해 치욕을 거둔 것이니 효종의 뜻을 이어 군사를 다듬어 북벌을 수행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되었다.[[註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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