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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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영국혁명의 배경
1) 사회경제적 배경
2) 사상적 배경
3) 정치적 배경

2. 영국혁명의 전개과정

3. 영국혁명에 대한 해석
1) 영국혁명에 대한 다양한 해석
2) 영국혁명에 대한 긍정적 해석
3) 영국혁명에 대한 부정적 해석

본문내용

지배를 지지했으며, 이런 정치 문화는 내전 시기에도 계속 되었을 뿐만 아니라 왕정복고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기본적으로 당시 모든 사회 구성원들은 보수적이었고, 왕을 정점으로 하는 계층적 사회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수용하였다. 이처럼 그 당시에 대중적인 지지를 받았던 정치 문화는 분명히 보수 성향의 문화였다.
이 시기에 나타난 신형군의 행동은 영국 내전의 향방을 결정지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들은 이념적인 기반이 없이 움직여진 군대였다. 종교적인 면에서 볼 때 신형군은 세족적인 세력이 주도하는 특성을 가진 군대였고, 신형군 내에 종교가 가진 중요성은 미미하였다.
영국 내전 당시 민중들은 민중 투쟁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혁명을 결코 시도하지 않았다. 내전 당시 대중들은 정치 이념을 논의하고 근본적으로 사회 개혁을 하려는데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대부분의 서민들은 미신, 기적, 마술 등의 초자연적이고 비논리적인 것을 전폭적으로 신뢰하였다. 과거와 달리 퓨리턴들은 종교적인 면에서 혁명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퓨리턴 의회가 제정했던 종교와 도덕에 관한 법령들을 실제로 현실에 적용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고, 이들이 제정한 도덕 및 종교에 관한 법령은 장엄했던 법률 제정 취지와는 달리 완전히 실패하였다.
영국 혁명은 유럽 최초의 시민혁명이 아닌 유럽 최후의 귀족간의 전쟁이었다. 영국 내전은 중세적인 귀족 전쟁의 재판이었으며, 내전 중에 나타난 귀족간의 갈등으로 귀족들은 그들의 전통적인 군사권을 상실하였다. 내전은 영국 최후의 귀족간의 전쟁이었으며, 영국 내전은 정치적 야망을 가진 일부 상원과 하원 의원들에 대한 왕당파의 방어전쟁 이었다.
4) 수정주의적 해석의 정당성
수정주의의 대표적인 학자인 러설은 영국 내전은 영국을 포함한 브리튼 전 지역들이 관계된 사건이었기 때문에 영국 내전(English Civil War)이 아닌 브리튼 내전(British Civil War)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영국 내전은 영국 차원이 아닌 브리튼 차원에서 연구되어야 한다. 영국과 스코틀랜드가 전쟁을 일으켰던 근본적인 원인은 종교에 있었다. 브리튼의 세 왕국인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는 한 왕 아래에 각기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다른 종교와의 갈등은 그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영국이 당시에 직면하고 있는 종교 문제는 영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 모든 유럽 각국이 가진 공통된 문제였다. 다만 영국만이 가진 특이한 점이 있다면 한 왕 밑에 세 왕국의 문제, 종교적인 문제, 재정 및 정치적인 조직의 와해라는 세 가지 문제가 동시에 발생하였다는 사실이었다. 이와 같이 세 가지 문제가 동시에 나타났다는 점에서 영국 내전은 우연성을 내포하고 있다.
스튜어트 초기 왕의 정부는 구조적 모순에서 연유된 재정문제를 가지고 있었으며, 의회 또한 무능하여 이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스튜어트 왕들이 무능하고 비효율적으로 정부를 운영했기 때문에 내전이 발생하였다는 휘그 학자들의 견해는 의미가 없다. 왕이 시행했던 종교정책도 반대세력을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문제는 영국 사회 구조 자체에 있었다. 왕이 시행한 정책은 성공적이었으며, 왕의 무능이나 왕의 정책 실패가 영국 내전의 원인은 아니었다.
전통적인 휘그 학자들은 영국혁명이 영국 사회에 위대한 유산을 남겼다고 주장하여 왔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허구일 뿐이다. 영국 혁명에서 구현한 자유는 남자들만의 것이었고 여성의 존재는 무시되어 왔다. 이러한 여성사에 관한 한 영국 내전은 결코 혁명적이지 못하였다. 또한 내전이 당시 사람들에게 준 고통은 대단하였고 내전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사람들의 이념이 얼마나 숭고했던가에 관계없이 내전은 매우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였을 뿐이었다.
(4) 해석에 대한 정리
지금까지 혁명은 부패하고 비합리적인 체제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으며, 인류에 위대한 유산을 남겼다고 주장하는 휘그-마르크스주의 견해와 혁명은 그것이 어떤 혁명이었든 간에 일으킬 가치가 없었으며 혁명의 목표가 아무리 바람직하고 이상적이었다고 하더라도 혁명은 인류에게 불행만을 초래하였다고 주장하는 수정주의 견해를 살펴보았다.
영국 혁명이 부정적인 결과만을 야기 시켰다는 수정주의적 해석에 본인은 동조할 수 없다. 물론 혁명의 진행 과정은 폭력적이었고,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그러나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영국의 구조적 모순이 해결되었을 것이라는 수정주의 견해는 논리적 오류에 빠진 것 같다. 혁명을 통해 영국은 구조적 모순을 어느 정도 완화할 수 있었다. 혁명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았던 간에 영국 혁명은 유럽에서 혁명의 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으며, 민중들에게 자유, 평등의 이념을 확산시킨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휘그-마르크스주의, 수정주의 두 해석 중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르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 이 두 견해는 분명 영국 혁명에 관한 다양한 견해를 통해 폭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게 하며, 서로에 대한 비판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이 갖는 모순점을 발견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영국혁명은 절대 왕정을 타도하고 의회의 주권을 확립해주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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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3.07
  • 저작시기20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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