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개요
Ⅱ. 고조선의 멸망
Ⅲ. 고구려의 멸망
Ⅳ. 백제의 멸망
Ⅴ. 신라의 멸망
Ⅵ. 발해의 멸망
Ⅶ. 고려의 멸망
1. 신흥사대부의 진출
2. 공민왕의 개혁
3. 국제정세의 변화와 위화도 회군
4. 전제개혁
참고문헌
Ⅱ. 고조선의 멸망
Ⅲ. 고구려의 멸망
Ⅳ. 백제의 멸망
Ⅴ. 신라의 멸망
Ⅵ. 발해의 멸망
Ⅶ. 고려의 멸망
1. 신흥사대부의 진출
2. 공민왕의 개혁
3. 국제정세의 변화와 위화도 회군
4. 전제개혁
참고문헌
본문내용
은 것이었으므로 매우 타당성있는 반대였다. 또한 당시 왜구의 위협이 계속되었던 때였으므로 나라의 군사력이 모두 요동으로 빠지면 왜구의 침입에 대처할 수 없게 될 것도 분명한 것이었다. 이성계의 반대이유는 매우 타당성이 있었고, 우왕도 인정하였으나 최영의 요동공격결의는 확고한 것이어서 우왕도 이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고, 이성계도 뜻에 없는 출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마침 압록강물이 불어 건너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사기가 떨어진 장졸을 거느리고 요동을 공격하는 일은 무모한 것임을 깨닫고 회군을 단행하였다. 회군의 명분은 ‘상국을 침범하면 나라와 백성에게 화를 초래하게 된다.’ ‘임금 곁에 있는 악한 신하들을 제거하여 백성을 편히 살 수 있도록 해주겠다’ 는 것이었다.
이성계로서는 요동공격보다는 국내의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선결과제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정치경제사회종교 등의 말세적인 폐단의 개혁과 도탄에 빠진 민생문제의 해결이 당시의 절실한 과제였고, 명에 대한 사대의 표방은 국내정치의 개혁과 안정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었다. 고려에 대한 명의 불신과 위협이 계속되는 상태에서 고려의 정치개혁이나 안정은 획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성계의 회군에 당황한 우왕과 최영은 개경으로 돌아와 회군에 저항했으나 이성계의 군세를 당할 수 없었고, 최영은 고봉현에 유배되었다가 곧 功遼罪로 개경에 압송되어 참형되었다. 우왕은 폐위되어 강화에 안치되었고, 우왕의 아들 창이 그 뒤를 이었으나 재위 1년 6개월에 그쳤으며, 이성계의 실권은 확고하게 되었다. 이즈음 명도 고집하여 오던 철령위문제를 포기하였고, 이성계일파는 친명정책을 펴게 되었다.
4. 전제개혁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와 정도전조준 등 일파는 조민수의 주장에 의하여 옹립된 우왕의 아들 창왕마저 신씨라 하여 축출하고 공양왕을 세웠다(1389). 소위 廢假立眞 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정치적 실권은 완전히 권문세족에서 신흥사대부들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껏 신흥 사대부들에 의하여 주장되면서도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던 전제개혁을 단행하였다. 비록 李穡 등 온건한 개혁파의 반대가 있기는 하였으나, 그들은 정권에서 축출되었다. 대체로 성리학의 신봉자인 사대부 개혁론자들은, 권문세족과 마찬가지로 막대한 농장을 소유하고 국가의 경제를 좀먹는 불교의 사원 세력을 또한 배척하게 되었다. 요컨대 전제개혁은 신흥 사대부에 의한 경제적인 면에서의 구질서의 파괴요 신질서의 수립이었다.
전제개혁은 우선 전국의 토지에 대한 새로운 양전 작업으로부터 시작되었다(창왕 원년, 1389). 그리고는 다음해(공양왕 2년, 1390)에 종래의 公私田籍을 모두 불살라 버렸다. 그리고 드디어 공양왕 3년(1391)에는 새로운 전제의 기준이 되는 과전법을 공포하였다. 이에 의하면 과전은 경기도에 한하여 관료들에게 그 관직의 고하에 따라 분배하게 되어 있었다. 그 결과 이성계정도전조준 등의 일파가 다대한 과전을 받게 된 것은 물론이었다. 경기도 이외의 전국의 토지는 모두 공전으로 편입시켰고, 이를 위하여 농장은 몰수되었다. 이리하여 권문세족의 경제적 토대는 무너지게 되었고, 이것은 곧 그들의 몰락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것은 또 동시에 고려왕조 자체의 몰락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한편, 공전의 증대는 국가의 수입을 증가시켰다. 새로운 왕조 조선의 경제적 기초가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 일파가 새 왕조를 개창하기 위해서는 신흥사대부 내부의 또 다른 반대에 봉착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때의 신흥사대부는 대개 두 파로 갈라져 있었는데, 하나는 고려왕조의 적폐를 점진적으로 개혁하려는 이색정몽주 등의 온건파이고, 다른 하나는 왕조 자체를 바꾸려는 조준정도전남은 등의 역성혁명파였다. 그러나 군사권을 장악한 이성계가 공양왕을 옹립하고 전제개혁을 단행하여 경제적 실권까지 잡음에 따라 역성혁명파의 우세는 결정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유력한 반대자인 정몽주를 죽인 후 공양왕을 내쫓고 이성계를 추대하여 새 왕조를 개창하였으니, 이로써 고려왕조는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1392).
참고문헌
◇ 국사편찬위원회(1993), 한국사12, 경기도, 탐구당 문화사
◇ 국사편찬위원회(1999), 한국사, 국사편찬위원회
◇ 변태섭(2000), 한국사통론, 삼영사
◇ 이기백(1999), 한국사신론, 일조각
◇ 이이화(1998),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3, 한길사
◇ 한국사연구회, 한국사 연구입문
◇ 한국역사 연구회(1992), 한국의 역사, 역사비평사
이성계로서는 요동공격보다는 국내의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선결과제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정치경제사회종교 등의 말세적인 폐단의 개혁과 도탄에 빠진 민생문제의 해결이 당시의 절실한 과제였고, 명에 대한 사대의 표방은 국내정치의 개혁과 안정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었다. 고려에 대한 명의 불신과 위협이 계속되는 상태에서 고려의 정치개혁이나 안정은 획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성계의 회군에 당황한 우왕과 최영은 개경으로 돌아와 회군에 저항했으나 이성계의 군세를 당할 수 없었고, 최영은 고봉현에 유배되었다가 곧 功遼罪로 개경에 압송되어 참형되었다. 우왕은 폐위되어 강화에 안치되었고, 우왕의 아들 창이 그 뒤를 이었으나 재위 1년 6개월에 그쳤으며, 이성계의 실권은 확고하게 되었다. 이즈음 명도 고집하여 오던 철령위문제를 포기하였고, 이성계일파는 친명정책을 펴게 되었다.
4. 전제개혁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와 정도전조준 등 일파는 조민수의 주장에 의하여 옹립된 우왕의 아들 창왕마저 신씨라 하여 축출하고 공양왕을 세웠다(1389). 소위 廢假立眞 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정치적 실권은 완전히 권문세족에서 신흥사대부들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껏 신흥 사대부들에 의하여 주장되면서도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던 전제개혁을 단행하였다. 비록 李穡 등 온건한 개혁파의 반대가 있기는 하였으나, 그들은 정권에서 축출되었다. 대체로 성리학의 신봉자인 사대부 개혁론자들은, 권문세족과 마찬가지로 막대한 농장을 소유하고 국가의 경제를 좀먹는 불교의 사원 세력을 또한 배척하게 되었다. 요컨대 전제개혁은 신흥 사대부에 의한 경제적인 면에서의 구질서의 파괴요 신질서의 수립이었다.
전제개혁은 우선 전국의 토지에 대한 새로운 양전 작업으로부터 시작되었다(창왕 원년, 1389). 그리고는 다음해(공양왕 2년, 1390)에 종래의 公私田籍을 모두 불살라 버렸다. 그리고 드디어 공양왕 3년(1391)에는 새로운 전제의 기준이 되는 과전법을 공포하였다. 이에 의하면 과전은 경기도에 한하여 관료들에게 그 관직의 고하에 따라 분배하게 되어 있었다. 그 결과 이성계정도전조준 등의 일파가 다대한 과전을 받게 된 것은 물론이었다. 경기도 이외의 전국의 토지는 모두 공전으로 편입시켰고, 이를 위하여 농장은 몰수되었다. 이리하여 권문세족의 경제적 토대는 무너지게 되었고, 이것은 곧 그들의 몰락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것은 또 동시에 고려왕조 자체의 몰락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한편, 공전의 증대는 국가의 수입을 증가시켰다. 새로운 왕조 조선의 경제적 기초가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 일파가 새 왕조를 개창하기 위해서는 신흥사대부 내부의 또 다른 반대에 봉착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때의 신흥사대부는 대개 두 파로 갈라져 있었는데, 하나는 고려왕조의 적폐를 점진적으로 개혁하려는 이색정몽주 등의 온건파이고, 다른 하나는 왕조 자체를 바꾸려는 조준정도전남은 등의 역성혁명파였다. 그러나 군사권을 장악한 이성계가 공양왕을 옹립하고 전제개혁을 단행하여 경제적 실권까지 잡음에 따라 역성혁명파의 우세는 결정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유력한 반대자인 정몽주를 죽인 후 공양왕을 내쫓고 이성계를 추대하여 새 왕조를 개창하였으니, 이로써 고려왕조는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1392).
참고문헌
◇ 국사편찬위원회(1993), 한국사12, 경기도, 탐구당 문화사
◇ 국사편찬위원회(1999), 한국사, 국사편찬위원회
◇ 변태섭(2000), 한국사통론, 삼영사
◇ 이기백(1999), 한국사신론, 일조각
◇ 이이화(1998),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3, 한길사
◇ 한국사연구회, 한국사 연구입문
◇ 한국역사 연구회(1992), 한국의 역사, 역사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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