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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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중국의 시각

◆한국의 시각

역사전쟁에서 패할 경우 우리의 역사는?

고구려는 중국 동북지역 역사에 출현했던 소수민족 정권이다

고구려는 漢나라 안에 있던 지방정권

`동북공정`이란?

본문내용

'고구려 멸망 후 신라로 내려간 사람보다 중국인으로 동화된 숫자가 많은 것은 사실'이라며 '하지만 멸망을 전후한 시기에 고구려인들이 겪는 역사적 변화를 살펴보면 중국학계의 주장은 대단한 억지'라고 지적했다.
'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이 함락된 후에도 고구려 지역에는 상당수의 주요 성들이 여전히 저항하고 있었다. 이적의 보고에 의하면 669년에 이르기까지도 신성주, 요동성주, 안시성 등 11개의 성이 아직 항복하지 않았고, 또 압록수 이북의 성 7개가 도망했다고 한다. 이 해 2월에는 보장왕의 외손인 안승이 4천여 호를 이끌고 신라에 귀부하기도 했다. 보장왕이 당에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요동지역의 대표적인 큰 성들이 항복하지 않았고 이미 점령한 지역에서도 성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도망해 버리는 등 당의 지배를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강사는 이와 함께 '고구려인의 끈질긴 부흥운동과 당나라의 고구려인 집단 이주 정책 등으로 현실적으로 중국 사회에 적응할 수 밖에 없었다'고 설명하며 '고구려인들은 당나라에 속해 있으면서 고구려인의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당나라도 이들을 시종 전쟁포로로 대접했다'고 꼬집었다. 단순히 유민을 많이 흡수했다고 해서 역사 자체를 가져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지적이다.
안병우 한신대 교수는 중국의 역사학자 손진기의 “고구려와 고려는 인적 구성과 영토 배경도 다르며, 송사(宋史) 고려전에서 고구려와 고려를 같은 나라로 기술한 것은 착오”라는 주장을 소개하면서, 고려시대 서희와 거란의 소손녕과의 담판 내용으로 고려인의 고구려 계승 의식을 설명했다.
'성종 12년 요의 대군이 침입하자 서희는 거란 군영에 찾아가 소손녕과 회담했다. 이때 서희는 고려가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나라 이름도 고려라고 하고 평양을 도읍지로 삼았으며, 고구려 땅의 경계로 따진다면 요의 동경(東京)도 그 경계 안에 있다고 반격했다. … 요는 고구려 땅을 차지하고 있는 사실을 강조했을 뿐,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박경철 강남대 교수는 수, 당의 고구려 침공을 ‘중국 내 소수민족이 세운 정권의 실정을 응징한 내전’으로 규정하려는 중국 학계의 움직임에 대해, '각종 사료를 볼 때 수, 당은 고구려 백제 신라를 모두 오랑캐로 파악하고 있었다'며 '고구려만 유독 자기 대내 정책의 대상으로, 또 고구려와의 전쟁을 내전으로 단정지음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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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5.13
  • 저작시기2005.0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10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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