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해군이 스스로 하늘의 버림을 받았으니 폐출하는 것은 본시 마땅하나 죽임에 이르게 되면 노신이 일찍이 신하 노릇을 하였기 때문에 차마 들을 수 없습니다. 마땅히 이제부터 떠나가겠습니다.'전인봉,『유배지에서 만난 한국역사』, 민미디어, 1999, 156쪽
인조 또한 광해군을 죽일 생각은 없었기에 인목대비를 여러 번 찾아가 정중히 간청하여 겨우 허락을 받았다. 이리하여 광해군, 폐비, 폐세자, 폐세자빈을 강화도에 동문과 서문에 각각 위리안치 시켰다. 이들이 안치되어 울타리 안에 갇혀 살기 시작한 지 두 달쯤 후에 폐세자는 사약을 받고, 세자빈은 자실하게 되면서 장성한 아들과 며느리를 잃은 광해군은 1년 반쯤 뒤에 아내 유씨와도 사별하게 된다. 광해군은 그 후 제주도로 보내져 초연한 자세로 자신의 삶을 이어갔다. 긴 세월 동안 그는 다시 기회가 주어질지도 모른다는 일념으로 묵묵하게 희망을 안고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1641년 귀양생활 18년 수개월 만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 후 광해군은『광해군일기』를 통해 기록으로 남겨졌다. 그러나 이 책을 편찬한 사람들이 인조반정을 주동하거나 또는 방조한 서인세력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많은 부분이 왜곡, 조작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Ⅴ.맺음말
광해군의 평가는 현대 정치적 논리에 따라 그 평가가 좌우된다. 대부분의 실학자들의 평가는 명나라를 배신했다는 측면과 폐모살제의 패륜으로 그 평가가 부정적이다. 반면에 식민사학자들은 광해군을 택민군주(澤民君主)로 해석하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식민사학자들은 광해군의 외교문제만을 주의하는 경향이 있어 자칫 잘못하면 조선사가 명나라와 청나라의 변동에 의해 좌우된다는 만선사관의 연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 또한 광해군이 실시한 내치(內治)를 보면 대동법의 실시와 양안, 호적정비를 통한 국가 재정 정비,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재 간행과 동의보감 편찬으로 편찬사업에 기여하는 등 광해군을 개혁의 발단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광해군이 대동법의 확대 시행을 지연시켜 개혁을 늦췄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후궁이라는 점과 차자라는 정통성의 약점으로 임해군, 영창대군을 죽였다는 살제(殺弟)와 인목대비를 폐비 시켰다는 폐모로 패륜을 저질렀다 하여 그 평가가 부정적이다. 또한 대북정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과 정통성의 결함을 궁궐공사 단행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행사함으로서 통치력의 부재와 민심이반을 불러왔다는 문제점도 가졌다. 외교적으로도 광해군의 중립외교에 대해 여러 가지로 평가되고 있다. 중립외교가 가능한가의 문제점과 광해군이 후금과 명나라의 전쟁에 군사를 파병하여 그 피해가 컸다는 점으로 실리외교는 아니었다는 점과 후금과의 화친이 가지는 진정성이 실리주의인가 아니면 기회주의인가의 여부가 문제되고 있다. 이와 같이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기존의 부정적인 평가와 함께 양쪽 입장에 관한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요즘 들어 특히 광해군의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그가 살았던 역사적 사실과 우리가 처한 현실이 하나의 이슈로서 부각되고 있거나, 현실에서 그 당시 역사적 사실을 인용하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미국, 일본, 중국 등 주변 열강 속에서 헤매고 있는 오늘날 우리의 처지를 반영하여 그는 역사상 몇 안되는 탁월한 외교 전문가로 재평가 받고 있다. 특히 세계화 시대로 주변 국가와의 외교적 문제가 더욱 중요해진 오늘날 기존과 그 이후에 있었던 왕들과 달리 유연한 외교정책을 맺었던 광해군에 대한 문제가 수면위로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왕위를 빼앗기고 쫓겨난 결과만 놓고 본다면 그는 실패자라는데 이의가 없지만 그 이유만으로 그의 행적을 덮어놓고 무시할 순 없다. 그의 개혁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그는 당론의 폐해를 통감하고 이를 초월하여 좋은 정치를 해보려고 누구보다 애썼다. 그러나 자신이 대북파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당론을 초월할 수 없었던 한계와 폐모살제의 패륜과 동아시아의 정세가 명을 중심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정치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박성순,『선비의 배반』, 고즈윈, 2004.
박영규,『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웅진, 2004.
이덕일,『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석필,1997.
이성무,『조선시대 당쟁사1』, 동방미디어(주), 2000,
전인봉,『유배지에서 만난 한국역사』, 민미디어, 1999.
최선경,『왕을 낳은 후궁들』,김영사, 2007.
한명기,『광해군』,역사비평사, 2000.
인조 또한 광해군을 죽일 생각은 없었기에 인목대비를 여러 번 찾아가 정중히 간청하여 겨우 허락을 받았다. 이리하여 광해군, 폐비, 폐세자, 폐세자빈을 강화도에 동문과 서문에 각각 위리안치 시켰다. 이들이 안치되어 울타리 안에 갇혀 살기 시작한 지 두 달쯤 후에 폐세자는 사약을 받고, 세자빈은 자실하게 되면서 장성한 아들과 며느리를 잃은 광해군은 1년 반쯤 뒤에 아내 유씨와도 사별하게 된다. 광해군은 그 후 제주도로 보내져 초연한 자세로 자신의 삶을 이어갔다. 긴 세월 동안 그는 다시 기회가 주어질지도 모른다는 일념으로 묵묵하게 희망을 안고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1641년 귀양생활 18년 수개월 만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 후 광해군은『광해군일기』를 통해 기록으로 남겨졌다. 그러나 이 책을 편찬한 사람들이 인조반정을 주동하거나 또는 방조한 서인세력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많은 부분이 왜곡, 조작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Ⅴ.맺음말
광해군의 평가는 현대 정치적 논리에 따라 그 평가가 좌우된다. 대부분의 실학자들의 평가는 명나라를 배신했다는 측면과 폐모살제의 패륜으로 그 평가가 부정적이다. 반면에 식민사학자들은 광해군을 택민군주(澤民君主)로 해석하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식민사학자들은 광해군의 외교문제만을 주의하는 경향이 있어 자칫 잘못하면 조선사가 명나라와 청나라의 변동에 의해 좌우된다는 만선사관의 연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 또한 광해군이 실시한 내치(內治)를 보면 대동법의 실시와 양안, 호적정비를 통한 국가 재정 정비,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재 간행과 동의보감 편찬으로 편찬사업에 기여하는 등 광해군을 개혁의 발단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광해군이 대동법의 확대 시행을 지연시켜 개혁을 늦췄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후궁이라는 점과 차자라는 정통성의 약점으로 임해군, 영창대군을 죽였다는 살제(殺弟)와 인목대비를 폐비 시켰다는 폐모로 패륜을 저질렀다 하여 그 평가가 부정적이다. 또한 대북정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과 정통성의 결함을 궁궐공사 단행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행사함으로서 통치력의 부재와 민심이반을 불러왔다는 문제점도 가졌다. 외교적으로도 광해군의 중립외교에 대해 여러 가지로 평가되고 있다. 중립외교가 가능한가의 문제점과 광해군이 후금과 명나라의 전쟁에 군사를 파병하여 그 피해가 컸다는 점으로 실리외교는 아니었다는 점과 후금과의 화친이 가지는 진정성이 실리주의인가 아니면 기회주의인가의 여부가 문제되고 있다. 이와 같이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기존의 부정적인 평가와 함께 양쪽 입장에 관한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요즘 들어 특히 광해군의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그가 살았던 역사적 사실과 우리가 처한 현실이 하나의 이슈로서 부각되고 있거나, 현실에서 그 당시 역사적 사실을 인용하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미국, 일본, 중국 등 주변 열강 속에서 헤매고 있는 오늘날 우리의 처지를 반영하여 그는 역사상 몇 안되는 탁월한 외교 전문가로 재평가 받고 있다. 특히 세계화 시대로 주변 국가와의 외교적 문제가 더욱 중요해진 오늘날 기존과 그 이후에 있었던 왕들과 달리 유연한 외교정책을 맺었던 광해군에 대한 문제가 수면위로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왕위를 빼앗기고 쫓겨난 결과만 놓고 본다면 그는 실패자라는데 이의가 없지만 그 이유만으로 그의 행적을 덮어놓고 무시할 순 없다. 그의 개혁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그는 당론의 폐해를 통감하고 이를 초월하여 좋은 정치를 해보려고 누구보다 애썼다. 그러나 자신이 대북파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당론을 초월할 수 없었던 한계와 폐모살제의 패륜과 동아시아의 정세가 명을 중심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정치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박성순,『선비의 배반』, 고즈윈, 2004.
박영규,『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웅진, 2004.
이덕일,『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석필,1997.
이성무,『조선시대 당쟁사1』, 동방미디어(주), 2000,
전인봉,『유배지에서 만난 한국역사』, 민미디어, 1999.
최선경,『왕을 낳은 후궁들』,김영사, 2007.
한명기,『광해군』,역사비평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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