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이행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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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상층지주계급은 더 이상 사회와 정치계에서 특권적인 지위를 독점할 수 없었다. 그들은 지방의 준(準)정치제도를 통해 농업잉여부분 및 농민을 조정하던 자신들의 특수한 지위를 잃었다. 구체제하에서 상층 지주계급이 누리던 특권과 제도적 권력기반은 국가를 완전히 관료체제화하고 대중을 직접적으로 정치에 참여토록 하는 데 장애가 되었다. 이러한 장애들은 혁명의 과도기의 정치투쟁과 계급변동으로 인해 제거되었다. 이와 동시에 혁명을 본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새로운 국가조직을 건설하려는 새로운 정치지도층은 국내에서의 반혁명적 시도와 의견의 불일치, 그리고 국외에서의 무력침입 등의 문제에 부딪혔다. 정치적 안정을 위협하는 이 같은 문제들을 성공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크게 보아 혁명지도층이 과거에 국가정치에서 소외되었던 하층계급집단, 즉 도시노동자들과 농민들을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상층지주계급은 한편으로 하층계급집단으로부터의 이득을,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국가조직의 출현으로 종래에 국가에서 얻을 수있었던 이득을 상실했다. 세 나라의 신체제 모두에서 국가사업에 대한 민중들의 참여도가 훨씬 높아졌다. 그리고 혁명기간 동안 형성된 새로운 국가조직은 구체제의 그것보다 한층 더 중앙집권화되고 합리적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것은 사회내에서는 보다 더 능률적이었고 국제적인 국가체계내에서 경쟁국을 능가할 만큼 강력하고 자주적일 수가 있었다.
세 혁명 모두에서 국가질서를 재정립하고 아래로부터의 계급변동에 의해 야기된 사회경제적 변혁을 정착시키고 국외의 경쟁국들에 대항하여 국가의 힘을 높이고 주권을 지키기위해 정치지도층과 정권이 출현했다. 만일 이렇게 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프랑스, 러시아, 중국혁명들을 "성공적인" 사회혁명이라 부를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들은 고작해야 1848년의 독일과 1905년의 러시아의 경우처럼 유산된 혁명들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완전한 의미의 혁명은 그것이 자유주의적인 것이건 사회주의적인 것이건 그리고 미국의 식민지에서 일어났건 중국에서 일어났건 관계없이 구체제에서 존재했던 것보다 더 중앙 집권화되고 더 강력한 정부를 성립시켰다는 사실은 널리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뜨겁게 논쟁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대부분의 성공적인 혁명들이 혁명 기간중에 표현된 목표들을 수행한다는 의미에서 과연 성공적이었는가 이다. 학자들은 이제 이러한 질문들을 검증할 양적 증거들을 개발하기 시작했는데 그 결과는 역사사회학에서 가장 논쟁적인 몇 가지 업적들이다. 엑스타인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경제 발전 정도와 경제 조직의 형태가 비슷한 나라들을 비교해 보면, 혁명을 겪은 나라들은 일반적으로 보다 균등한 토지 분배를 이루었고 특히 쿠바는 혁명을 겪지 않은 다른 나라들보다 보건 및 교육문제에서 많은 진보를 이룩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루이스 벡은 쿠바혁명이 구체제에서보다 더 느리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경제 발전을 낳았다고 주장한다.
■서유럽에서의 국민국가 건설에 대한 틸리의 견해
첫째, 국가건설에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었는데 그것을 위하여 수없이 많은 인명과 고통, 그리고 토지, 재화, 혹은 노동의 비자발적 양도가 대가로 바쳐져야 했다. 그것의 근본적인 이유는 유럽에서의 초기 국가건설이 분권화 되어 있던 전형적인 농업사회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이다. 국가건설자들은 일차적으로 수 많은 준 자치적 정치단위들을 제거하거나 복속시켜야 했고, 그다음에는 라이벌 국가들과 사활을 건 경쟁을 벌여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세원의 확보와 군사력의 증가가 무엇보다 중요했으며 국가 건설자들은 토착 지배계급 세력과 정치적 연맹을 맺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때맞추어 시작된 자본주의의 발달은 국가건설에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자원의 신분적 해방을 통하여 국가의 조세원을 증대시켰을 뿐만 아니라 많은 지역에서 대지주 계급들로 하여금 국가건설자들에게 정치적인 보호를 요청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둘째, 틸리는 군대와 전쟁, 그리고 국가간의 관계에 각별한 관심을 보인다. 사실상 국가건설에 소요된 경비의 내역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상비군의 설치와 전쟁의 준비였다. 전쟁에서의 승패가 국가의 생존 여부에 직접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지만, 전쟁에 대비하는 과정과 특히 전쟁에서의 승리는 국가건설에 관련된 다른 핵심적 문제까지 해결해 주는 부수효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근대적'이라고 부르는 대부분의 정치참여 형태도 사실은 유럽의 국가건설 자들이 군대를 만들고 세금을 거두어 들이며 경쟁자들과 효과적인 동맹관계를 형성하고 지지자와 복종자들을 보호하면서 '보통사람'들에 의한 반란의 위협을 물리치고자 노력하는 동안에 생긴 '의도하지 않은' 결과라는 것이다. 전쟁의 결화는 또한 전후 국가체계를 결정짓는 계기로서 작용하여 왔는데, 베스트팔렌 조약에 이어 1815년의 비엔나 회의, 1919년의 베르사이유 조약, 그리고 1945년 이후의 동서 냉전체제는 유럽국가들의 본질과 상호관계, 그리고 상대적 강약을 일차적으로 규정하는 기제들이었다.
결론
세 혁명 모두 강화된 국가, 즉 보다 중앙집권적이고 관료적이며 국내외적으로 능동적인 힘을 가진 국가들을 낳았다. 이러한 사실은 한편으로 러시아나 중국에서처럼 자국내에서의 혁명투쟁이 반자본주의적이었는가, 아니면 프랑스에서처럼 결국 자본주의적 발전을 따르게 되었는가의 여부에 상관없이 어떤 일관된 영향력들이 세 혁명에 동일한 결과를 초래하는 데 작용했음을 시사해 준다. 그 한가지 영향은 국제적인 국가체계에서의 국가간의 혹심한 경쟁에서 왔다. 다른 제국과의 전쟁과 그들의 침입은 혁명적 위기의 산파격이었고 뒤이은 혁명정권은 국내의 무력투쟁에서 뿐만 아니라 군사적 위협을 주는 국제상황의 와중에서 국가권력을 공고히 했다.
프랑스, 러시아, 중국에서는 국가들이 서로 싸우는 상황 속에서 혁명을 본궤도에 올려놓는 일이 시급했고 따라서 이런 필요성으로 인해 혁명 기간 동안 중앙집권적이고 강압적인 행정조직을 건설하려는 지도층의 의지와 역량이 전면에 나타났고 그들의 혁명화된 사회질서내에서 국가를 조직하기 위한 목적으로 영구적인 권력 기반을 창조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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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6.14
  • 저작시기2003.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19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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