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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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諸子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상태는 六朝時代를 거쳐 唐初에까지 계속되었다. 당초 때, 六德明이 <經傳釋文>을 만들 때에도 <老子>와 <莊子>는 수록을 했어도 <맹자>는 수록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무렵 <맹자>를 존숭하는 기운이 서서히 조성되어 당나라 후반기에는 古文家인 한유 . 유종원 등 적극적으로 <맹자>를 중시하는 인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유는 '성인의 도를 비우려는 자는 반드시 맹자부터 시작하라.'고 역설했고, 유종원도 <맹자>를 <논어>와 함께 六經에 다음가는 것으로 인정했다. 한편 <맹자>를 공적으로 인정시키려고 하는 움직임도 싹터 代宗 때에는 양관이 <논어>, <효경>, <맹자>를 합쳐 一經으로 하기를 청하고 당말 의종 때에도 피일휴가 <맹자>를 대학의 한 과목으로서 채택할 것을 상주했다. 둘 다 인정을 받지는 못했으나 이를 통하여 <맹자>를 존숭하는 기운이 싹트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宋代가 되자 <맹자>를 준숭하는 기운은 한층 높아졌다. 宋初에는 손석이 <孟子音義>를 저술했는데, 어것은 眞宗의 명령으로 찬술한 것으로서 <맹자>가 공적으로 인정된 시초다. 이후 점차 중시되어 신종 때에는 兼經이 되고 맹자를 공자묘에 合祀했으며, 왕안석은 <논어>와 함께 <맹자>를 과거과목으로 추가하고, 정자는 性善 . 養氣의 설을 前聖未發의 견해라고 크게 상찬했다. 南宋의 朱熹는 程子의 학문을 계승해서 <논어> , <맹자>, <대학>, <중용>의 넷을 존숭하고 사서란 이름을 책정하였다. 이로 인해 <맹자>도 경전으로서의 지위가 거의 확보되어 南宋 말 陳振孫이 <直齊書錄解題>에서 처음으로 <맹자>를 경전으로 취급하자 비로소 그 지위는 확고부동하게 되었다. 명대의 왕양명이나 이탁오와 같은 王學左波에서는 인간론이나 정치론을 펼 때는 <맹자>를 이용했도, 淸朝의 대진이 <맹자자의소중>을 필생의 작으로 저술한 것을 보아 <맹자>의 영향력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맹자>가 경전으로 높여져 가는 과정은 대력 상술한 바와 감으나, 그 도중에서 비난 공격을 받은 것도 적지 않았다. 이 역시 <논어>와 다른 점이다. 가장 오래된 것은 순자로서 그의 <비십이자편>에서는 자사와 함께 비난의 과녀이 되고 있다. 그후 후한 때의 왕충의 저서 <논형>에는 [자맹]이란 편이 있고, 다시 니려와 송대에는 <맹자>를 존숭하는 기운의 반동으로 많은 반맹론이 나타나 존숭파와의 논쟁이 심했었다. 풍휴의 <산맹자>, 이구늬 <상어>, 사마광의 <의맹> 등은 반맹자의 주된 것이다. 또 명태조는 자기 독재에 방해가 되는 부분을 깎아 버리고 <맹자절문>을 간행했다.
사실 혁명을 긍정하는 사상이나 '백성을 귀히 여기고 임금을 가볍게 본다,'는 생각은 위정자로서 못마땅하게 생각되었던 것이고, 체제유지를 하는 입장에서 보면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또 맹자의 거만스런 태도, 때로는 어른답지 않게 보이는 태도 등도 반감을 샀다. 그 문장도 경우에 따라서는 너무 지나치게 과격한 점도 없지 않다. 이런 것들이 <맹자>가 비난과 공격을 받는 주된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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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6.19
  • 저작시기2003.0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20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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