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시대 크리스트교 발전과 정치적 의미
본 자료는 2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해당 자료는 2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2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머리말

본문
1. 초기 로마 : 다신교 사회
2. 크리스트교의 성립
3. 크리스트교 박해
4. 정치적 전환기 : 크리스트교 국교화

맺음말

본문내용

도 모른다.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서거한 후 로마 제국은 동서로 갈라졌다. 동로마 제국에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527-565)가 종교적, 세속적 영역을 완전히 통합시켰다(황제교황주의). 그리하여 교회는 최종적으로 국교가 되었으며 황제가 교회와 세상을 지배하였다. 이러한 투쟁과 대립을 통하여 황제들은 반기독교적 계파를 완전 제압하였고 크리스트교는 로마 제국의 영광이 남아있는 한 로마 제국 전역에 교회조직을 성립시켜 퍼지기 시작한다.
맺음말 : 로마제국의 멸망과 기독교의 정치적 이용
게르만족의 이동과 서로마제국의 몰락(476)으로 유럽의 역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역사 무대가 지중해로부터 유럽대륙으로 변하고, 게르만족이라는 새로운 역사의 주인공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들은 로마에 공인되어 있던 기독교를 받아들였기에 기독교는 그대로 이어졌고 힘을 더 갖게 되었다. 크리스트교가 유럽의 종교로서 확립된 것은 중세의 전성기인 12∼13세기 무렵이었다. 중세 카톨릭 교회는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중세 유럽사회의 유일한 통일적 계층 기구가 되었으며 따라서 중세 유럽은 하나의 '크리스트교 공화국' 이라 할 수 있다. 이에 크리스트교는 중세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어느 한 분야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으며 특히 정치적으로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막강한 힘을 지니게 된 교회의 장 교황과 세속의 장 황제의 대립은 중세 내내 치열 하게 진행되었다(카노사의 굴욕, 아비뇽 유수). 또한 중세 이후 오늘날까지 기독교의 신앙심은 명분이 필요한 많은 전쟁에 선동되어져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최근 계속되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은 본질적으로 영토를 획득하기 위한 전쟁일 뿐이며 종교는 그들의 단결심을 북돋아주는 역할과 명분을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일 뿐이다.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은 이라크의 독재종식과 대량살상 무기 확산을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마치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결로 비쳐지지만 그 침략의 이면에는 미국의 군수산업과 석유이권이 걸려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십자군 전쟁 역시
동양 정복을 통한 영토와 정치적 세력의 확장 대한 열망이 불러온 일종의 정복 전쟁이다. 역시 기독교와 이슬람이라는 종교적 차이를 내세워 자원병을 모집한 것이 아주 큰 효과를 거둔 것 이다.
콘스탄티누스이후 기독교는 끝임 없이 인간의 욕심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끌어다 쓴 일종의 방패막 역할을 해왔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의 기본에는 사랑과 평화라는 사상이 내재되어 있다. 종교가 그 본질을 잃지 않고 변질되지 않는다면 그 사회를 더욱 건전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 참고자료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기독교의 역사>, 김상근, 평단문화사, 2007.
<그리스도교>, 헬무트 피셔 지음, 예경, 2007
<역사 속의 기독교>, 알랭 코르뱅 외, 길, 2008.
<<서양고대사연구>>, 하인츠 벨렌, “로마황제이념의 기독교화에 관하여-콘스탄티누스 황제에서 테오도시우스 황제까지-”, 1994.
  • 가격1,000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10.07.03
  • 저작시기2010.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22683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