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연구 배경
2. 연구 동향
(1) 주민구성문제
(2) 지리 고증
(3) 대외 관계
2. 연구 동향
(1) 주민구성문제
(2) 지리 고증
(3) 대외 관계
본문내용
실증적 연구가 늦었던 것은 신라의 삼국통일관에 대한 관심이 우선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한다. 양국이 계속 평화상태를 유지하였다고 보았고, 이로써 양국은 왕래가 빈번했으리라는 것이다. 이어 박시형의 이러한 서술을 보다 적극화하여 양국의 교섭이 {삼국사기}보다 더 빈번했을 것이라고 하고, {삼국사기}는 김부식이 고의로 발해를 말살하려다가 그만 부주의하여 남기게 된 실책의 소산이라 하고, 당시 동방의 국제정세가 어떻게 되여 있었던지 간에 적어도 이백수십년간 직접 국경을 접하고 있던 동족의 두 나라가 이와 같이 몰 교섭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라고도 하여 교섭이 빈번했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발해사}는 {삼국사기} 보다는 좀더 왕래가 많았을 것이라고 하면서 동족인 두 나라가 수백 년간 내왕이 매우 적었다고 하고, 그 이유는 전적으로 7세기 중엽 이후 심한 사대주의 외세의존 정책에 매달린 신라봉건 통치계급들의 죄악의 결과라고 하였다. 대립적인 면이 더 강조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발해와 신라의 관계에 있어 또 하나 중요한 기록은 {협계태씨족보}이다. 여기에는 발해와 신라의 관계에 있어 다른 곳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즉, 발해 무왕 19년 봄 2월에 발해 수군이 출동하여 신라군사와 합세하여 일본병선 300척을 물리쳤다고 하며, 발해 원왕(元王)[大虔晃] 8년에 황룡사 탑이 무너졌다고 발해에 알렸다고 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본기)가 성덕왕 30년과 경문왕 8년에 일본병선이 침입했다는 내용과 황룡사탑이 벼락을 맞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이에 대한 부분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