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의 외교 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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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서희의 외교 담판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거부하고 그 사자 30인을 섬에 유배하고 낙타는 만부교(萬夫橋)아래 매어 놓아 다 굶어 죽게 하였다. 결국 냉담해진 양국관계를 개선시키려는 거란의 의도는 달성하지 못하고 단호하게 거절을 당했다.
반면에 고려는 중원국가들과의 교섭을 게을리 하지 않고 이들 국가와 연합하여 거란공략을 꾀하고 이들 세력을 이용하여 거란의 침입을 견제하려고 했다. 중원국가들 또한 가장 강적이 거란이므로 이들 역시 고려와 연결하여 배후세력을 삼아 거란을 견제하는데 이용했다.
시간이 갈수록 고려에 대한 거란의 감정은 점점 악화되어 마침내 무력보복을 꾀하였다. 정종 2년(947)에 거란이 침입하려 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고려에서는 광군(光軍) 30만을 조직하여 이에 대비한 일이 있는데, 이것은 이러한 양국 사이의 갈등을 시사한 것이라고 본다. 즉 고려거란간의 불화가 다시 동북아시아의 복잡한 국제정세와 얽히면서 양국은 무력충돌을 하게 되었다.
당시 거란은 중국 대륙 북부지방 일부를 발판으로 하여 송과 무력 충돌을 거듭하고 있던 터라서 그의 적대국가는 고려나 여진보다는 송이었다. 한편 송은 건국 이래로 문약에 흘러 국력이 악화되어 동북방면으로부터 강대한 거란의 침략을 받고 있었다. 이에 바다를 접하고 동쪽에 있는 고려와 동맹을 맺어 거란의 세력을 고려가 배후에서 견제해 주기를 바랐다.
송은 장차 거란을 쳐 燕雲지방
을 수복하기 위해 한국화(韓國華)를 고려에 보내 원병을 청하고 공동전선을 펼 것을 제의하였으나 고려는 거란과의 전쟁에 대해 부담감을 느끼고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송의 한국화는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하여 고려로부터 겨우 출병 약속을 받고 돌아갔다. 그러나 실제로 고려에서는 출병을 하지 않았다. 이런 불리한 국제정세에 처해 있던 거란은 聖宗이 즉위하자 고려를 응징하기 위한 구체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거란과 고려 사이에는 발해가 망한 뒤에 동부 만주에 흩어져 살던 여진족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대개 거란의 治外에 있으면서 때로는 거란에 조공하는 정도였다. 그리고 압록강 西岸에는 발해의 유민이 세운 정안국(定安國)이라는 소국이 있었으며, 압록강 하류에는 압록 여진이 웅거하고 있었다. 이 압록강 하류 지역은 발해시대의 조공도(朝貢道)로서 중국과의 해상교통이 편리한 곳이었다. 그리하여 여진은 거란보다는 송과 친하여 친선관계를 맺고 있었다.
즉, 거란이 고려를 침략하기 위해서는 고려거란 양국 사이에 있으면서 송과 친교하던 압록 여진과 정안국을 먼저 공격해야만 했다. 거란은 최대한 고려 침략 의도를 숨기면서 2차례 걸쳐 여진을 정벌한 결과 여진, 정안국과 송과의 교통로는 차단되었고 여진은 완전히 복속시킨 후, 압록강 일대에 3개성을 구축하여 전진기지화했다. 이후 거란의 성종은 동경유수에게 고려 원정을 준비하도록 지시했고(992), 다음해에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공하기에 이르렀다.(993.8)
거란이 압록강 연안에 3개성을 구축하자 심대한 위협을 느낀 고려는 성종이 서경에 행차하여 불안해하는 백성을 안정시켰고 압록강 연안의 여진을 백두산 밖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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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12.29
  • 저작시기2010.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46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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