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目 次
서론.
본론.
1. 분노하는 민중과 동학의 성장
(1) 청・일 상인의 각축 속에 몰락하는 농민
(2) 내외의 수탈 속에 성장하는 동학
2. 동학농민전쟁의 전개
(1) 동학농민전쟁의 도화선이 된 고부민란
(2) 전주화약을 얻어 낸 제1차 동학농민전쟁
(3) 전주화약과 집강소
(4)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운 제2차 동학농민전쟁
결론.
참고문헌.
서론.
본론.
1. 분노하는 민중과 동학의 성장
(1) 청・일 상인의 각축 속에 몰락하는 농민
(2) 내외의 수탈 속에 성장하는 동학
2. 동학농민전쟁의 전개
(1) 동학농민전쟁의 도화선이 된 고부민란
(2) 전주화약을 얻어 낸 제1차 동학농민전쟁
(3) 전주화약과 집강소
(4)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운 제2차 동학농민전쟁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손병희가 가담하면서 납접과 북접의 연합이 극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결과 동학농민군의 수는 크게 불어나게 되었습니다. 농민군은 공주 일대에서 친일 관군 및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가장 치열한 전투는 공주 우금치에서 벌어졌습니다. 농민군이 공주로 진격하기 위해 우금치 언덕을 오르자 미리 숨어 있던 관군과 일본군은 기관총으로 반격하였습니다. 40여 차례나 계속된 공격으로도 우금치를 넘지 못한 농민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패하였습니다. 관군에게 쫓기던 전봉준은 원평 싸움을 마지막으로 일단 부대를 해산시켰습니다. 순창에 몸을 숨기고 있던 전봉준이 부하의 밀고로 체포되어 처형당하면서 동학농민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관군과 일본군의 계속된 추격에도 수년간 동학의 이름을 내건 단체들의 활동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는 동학농민전쟁의 전통이 민중 속에 끊임없이 살아남아 있음을 말해 주는 증거입니다. 비록 봉건 세력인 관군과 외세인 일본군의 공격으로 실패하였지만 동학농민군의 반봉건 정신은 갑오개혁에 상당 부문 수용되었으며 반외세 정신은 의병 투쟁으로 계승되었습니다.
결론.
옥양목은 옥처럼 흰 서양 천이란 뜻으로, 너비가 넓고 곱습니다. 인도에서 수탈한 면화를 영국 공장에서 대량생산했기 때문에 농촌에서 손으로 짠 무명보다 품질과 가격 면에서 우세하였다고 합니다. 1910년대 마포 나루터의 황포돗배는 돛단배를 가지고 운송과 도매업을 하던 경강상인은 기선을 가진 일본 상인을 규모와 자본 면에서 당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청일의 경제 침투와 방곡령은 식량이 부족해진 지방관이 다른 지방으로의 식량 유출을 금지시키는 조치, 방곡령은 조선, 중국, 일본에서 오래전부터 실시되던 지방관의 고유 권한이었습니다. 동학의 교세 확장은 경상전라충청의 삼남 지방은 외세와 봉건적 수탈이 극심한 지역으로 동학이 급속히 성장하였고 교조신원운동은 교조 최제우의 죄명을 씻고 포교의 자유를 달라는 주장을 했다고 합니다. 척왜양창의는 의병을 일으켜 일본과 서양을 물리치자는 뜻으로 외세의 경제 침략에 고통받는 농민들의 요구가 반영된 주장을 말하고 포접제는 마을 단위로 조직된 동학 신자들의 모임이 포입니다. 여러 개의 포가 모여 하나의 접을 이루었고, 포와 접을 통해서 동학은 농민들을 조직화시켰습니다. 접주는 동학의 지역 책임자를 말하고, 만선보 터는 전라북도 정읍시의 소재로 만석보 증축으로 인한 군민 강제 동원은 고부민란의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집강소에는 1명의 집강과 성찰동몽집사서기 등을 두어 실무를 처리하였고 전주와 남원 두 곳에 대도소를 설치하여 각 지역의 집강소를 통괄하였다. 이렇게 운영되는 집강소는 군량과 무기 관리는 물론 재판까지 맡아보는 지방의 실질적 자치 기구였습니다. 따라서 양반 중인 신분 사람들도 신변의 안전을 위해서 동학에 가입하는 사례가 많았습니다. 손병희는 남접 지도자들이 대부분 처형된 것과 달리, 해외 망명을 거쳐 돌아온 손병희는 3대 교주가 되어 동학을 재건하였습니다.
참고문헌
- 한국 근현대사 (김인기, 조왕호 지음) 두리미디어
그러나 관군과 일본군의 계속된 추격에도 수년간 동학의 이름을 내건 단체들의 활동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는 동학농민전쟁의 전통이 민중 속에 끊임없이 살아남아 있음을 말해 주는 증거입니다. 비록 봉건 세력인 관군과 외세인 일본군의 공격으로 실패하였지만 동학농민군의 반봉건 정신은 갑오개혁에 상당 부문 수용되었으며 반외세 정신은 의병 투쟁으로 계승되었습니다.
결론.
옥양목은 옥처럼 흰 서양 천이란 뜻으로, 너비가 넓고 곱습니다. 인도에서 수탈한 면화를 영국 공장에서 대량생산했기 때문에 농촌에서 손으로 짠 무명보다 품질과 가격 면에서 우세하였다고 합니다. 1910년대 마포 나루터의 황포돗배는 돛단배를 가지고 운송과 도매업을 하던 경강상인은 기선을 가진 일본 상인을 규모와 자본 면에서 당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청일의 경제 침투와 방곡령은 식량이 부족해진 지방관이 다른 지방으로의 식량 유출을 금지시키는 조치, 방곡령은 조선, 중국, 일본에서 오래전부터 실시되던 지방관의 고유 권한이었습니다. 동학의 교세 확장은 경상전라충청의 삼남 지방은 외세와 봉건적 수탈이 극심한 지역으로 동학이 급속히 성장하였고 교조신원운동은 교조 최제우의 죄명을 씻고 포교의 자유를 달라는 주장을 했다고 합니다. 척왜양창의는 의병을 일으켜 일본과 서양을 물리치자는 뜻으로 외세의 경제 침략에 고통받는 농민들의 요구가 반영된 주장을 말하고 포접제는 마을 단위로 조직된 동학 신자들의 모임이 포입니다. 여러 개의 포가 모여 하나의 접을 이루었고, 포와 접을 통해서 동학은 농민들을 조직화시켰습니다. 접주는 동학의 지역 책임자를 말하고, 만선보 터는 전라북도 정읍시의 소재로 만석보 증축으로 인한 군민 강제 동원은 고부민란의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집강소에는 1명의 집강과 성찰동몽집사서기 등을 두어 실무를 처리하였고 전주와 남원 두 곳에 대도소를 설치하여 각 지역의 집강소를 통괄하였다. 이렇게 운영되는 집강소는 군량과 무기 관리는 물론 재판까지 맡아보는 지방의 실질적 자치 기구였습니다. 따라서 양반 중인 신분 사람들도 신변의 안전을 위해서 동학에 가입하는 사례가 많았습니다. 손병희는 남접 지도자들이 대부분 처형된 것과 달리, 해외 망명을 거쳐 돌아온 손병희는 3대 교주가 되어 동학을 재건하였습니다.
참고문헌
- 한국 근현대사 (김인기, 조왕호 지음) 두리미디어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