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와 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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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통일신라와 발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통일신라

☆ 대외교류

발해

☆ 시대 개관

☆ 영토와 문화

☆ 연구경향과 쟁점

본문내용

떼어내려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시각들은 역사적 사실을 올바로 파악하는 데에 장애물이 되고 있다.
무덤 연구를 그러한 사례로 들 수 있다. 발해 초기 지배자들이 묻쳐 있는 육정산고분군에서는 북한의 주장처럼 고구려 요소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석실묘 등의 구조나 내외부 시설 등에서 고구려 전통을 강하게 띠고 있지만, 관곽의 사용, 화장이나 다인장의 존재, 2차장 및 짐승뼈 고반과 관련된 매장 습속, 말갈식 도기라고 하는 통형관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부장품 양상에서 말갈적 요소도 많이 섞여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발해의 건국집단에는 고구려 전통은 물론이고 말갈 전통도 상당 부분 섞여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속말말갈의 중심지인 길림시 일대의 고분 변화 과정도 잘못 해석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통상적으로 속말말갈족이 토광묘를 조영하다가 석축묘(석관석곽석실묘)로 이행하였다가 발해 건국 뒤에 육정산고분군 조성 단계로 넘어간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래야만 육적산고분군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는 석축묘의 주인공이 속말말갈족이 되고, 그에 따라 속말말갈 주체설이 ,증명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고 증거로만 본다면, 오히려 육정산고분군의 석축묘가 길림시 일대의 속말말갈족에게 영향을 주면서 발해 건국 뒤에 토광묘에서 석축묘로 변화된 것으로 보는 것이 순리적이다. 이렇게 되면 고구려의 석축묘 전통이 육적산고분군을 거쳐 길림시 일대의 속말말갈족에게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결국, 국가적 이해관계를 벗어나 사실 자체를 바라보는 유연한 시각을 가질때에 발해사가 제대로 규명될 수 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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