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황룡사의 장륙존상(공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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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地,<宴坐石 상부는 평평하고 높이 1.5~2m, 둘레 약 5m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의 월성(月城:경주) 동쪽 용궁(龍宮)에 있었으며, 553년(진흥왕 14) 신궁(新宮)을 황룡사(皇龍寺)로 개조할 때는 불전 뒤에 이 연좌석이 있었다고 한다. 2번의 화재로 갈라진 것을 쇠로 붙여 보존하였으며, 몽골군이 침입하였을 때 땅 속에 파묻었다고 한다.
>猶在.
“너희 나라 황룡사는 바로 석가와 가섭불이 강연을 한 땅으로 연좌석이 아직도 남아있다.
故<天竺><無憂王 아육왕을 말한다.
>, 聚黃鐵若干斤泛海, 歷一千三百餘年, 然後乃到而國, 成安其寺, 蓋威緣使然也 인도는 불상의 출현이 서력 기원 전후한 시기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서력 기원전 3세기경에 재위했던 아육왕( 서기전 269~서기전 232년)이 불상을 만들었을 리 만무하고 또 그때로부터 무인선이 구리와 금을 싣고 800년이 넘게 바다를 떠다녔을 리도 없다. 따라서 무인선의 정박 사실을 모두 인정한다 해도 지리적이나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당시 불국토의 이상이 구현되었다고 생각하던 중국 남북조의 어느 나라에서 떠내 보낸 배라고 생각하는 견해가 다수이다.
.(與別記所載不同.)
이 때문에 천축의 무우왕이 금과 철을 조금씩 모아 바다에 띄워 보냈는데, 1,300여 년이 지난 후에야 너희 나라에 당도하여 완성해 그 절에 봉안했으니 아마 부처님의 위엄과 인연이 시킨 것이다.“(별기(別記)에 실린 것과 똑같다.)”
像成後, <東竺寺>三尊亦移安寺中.
불상이 완성된 후 동축사의 삼존 역시 황룡사 안으로 옮겨 모셔졌다.
寺記云: <眞平>五年甲辰, 金堂造成, <善德王>代, 寺初主眞骨<歡喜師>, 第二主<慈藏>國統, 次國統<惠訓>, 次<廂律師>云.
절 기록에는 “ 진평왕 6년 갑진년(584)에 금당이 만들어 졌으며 선덕여왕 시대에 이 절의 1대 주지는 진골 환희사 였고, 제2대 주지는 국통 자장이었으며, 그 다음은 국통 혜훈 이었고, 그 다음은 상률스님이다”라고 하였다.
今兵火已來, 大像與二菩薩皆融沒, 而小<釋迦>猶存焉.
지금은 병화 이래로 큰 불상과 두 보살상이 모두 녹아 없어지고 작은 석가상만 남아 있다.
讚曰
찬미하는 시에 다음과 같이 기린다.
塵方何處匪眞鄕, 香火因緣最我邦. 不是<育王>難下手, <月城>來訪舊行藏.
이 세상 어느 곳인들 참 고향이 아니련만
부처님 모실 인연은 우리나라가 으뜸이네.
이것은 아육왕이 손대지 못 할 일이 아니라,
월성 옛터를 찾느라고 그러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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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1.21
  • 저작시기2008.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49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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