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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개요

Ⅱ. 최제우의 생애

Ⅲ. 최제우의 사상

Ⅳ. 최제우의 神(신)개념

Ⅴ. 최시형의 생애

Ⅵ. 최시형의 사상

Ⅶ. 최시형의 위상

참고문헌

본문내용

깨달음이었다. 최시형은 생애 말기에 가장 핵심적인 깨달음을 ‘向我設位’, ‘天語’ 등의 법설을 통해 교도들에게 전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 법설들에서 나타나는 사상은 ‘모든 것이 한울님’이라는 사상으로, 기존의 유교적 질서나 윤리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최시형은 36년간 동학교단을 이끌어 오는 과정에서 신지식인들의 영향으로 유교적 색채가 드러나는 법설이나 통문을 내리기도 했으나, 그것은 ‘신지식인들’을 지도하고 관리하기 위한 방법의 한가지였으며, ‘신지식인들’은 최시형의 종교적 사상이나 세계관에 본질적으로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최시형은 주문수련 등의 꾸준한 종교적 수련을 통해서 ‘유교’를 뛰어넘는 깨달음을 얻었고, 이러한 종교적 각성은 입도 초기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것이었다.
Ⅶ. 최시형의 위상
최제우의 재세 시 동학에는 일정한 수준의 진보적 의식을 지닌 비판적 지식인층과 무귀천사상, 유무상자에 매료된 민중이 동시에 존재했다. 최제우는 비판적 지식인들과 함께 시와 결을 토론하고 교리문답을 실행했으며, 영해 접주 박하선, 영덕의 강수(강시원), 단양 접주 민사엽, 경주 부서 접주 강원보 등 상당한 학문적 기반을 가진 비판적 지식인들을 동학의 지도층으로 규합해 나갔다.
최시형은 머슴, 조지소의 용공, 화전민 등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던 민중 출신으로, 용담에서 최제우가 새로운 도를 편다는 소문을 듣고 1861년 직접 최제우를 찾아가 동학에 입도했다. 그러나 동학에 입도한 최시형은, 비판적 지식인들이 동학의 중심세력으로서 지도층을 형성하고 있었던 데 비해 그다지 주목받는 인물은 아니었고, 따라서 1862년 12월 말 최제우가 16명의 접주를 임명하였을 때에도 제외되었다.
최시형은 교리에 관심을 가졌던 비판적 지식인들과는 달리, 오로지 동학의 가르침의 핵심이 담겨 있는 주문수련을 중심으로 독실한 수련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 마침내 종교적 수련을 통해 한울님의 가르침을 듣기도 하였고 신비한 종교체험도 할 수 있었으며, 기존의 지배적 유교사상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동학에서 닦는 도야말로 無極大道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민중 층에 속한 최시형은 당시 지배적이었던 유교적 사유체계의 영향을 적게 받았기에 비판적 지식인들에 비해 이러한 깨달음이 용이했던 것이다. 최시형의 입도 초기 신비체험에 대한 자료는 崔先生文集道源記書에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慶翔이 꿇어앉아 묻기를 “기름 반 종지로 21일 밤을 새웠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놀라운 힘(조화)의 큰 체험이다. 그대는 마음에 홀로 기뻐하고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라”고 하였다. 慶翔은 또 “이후로 포덕을 해도 됩니까?”라고 물었다. 선생은 “포덕하라.”고 대답하였다.
입도 당시 주목받지 못했던 최시형은 사회적 신분이나 경제적 지위, 그리고 학문적 배경이 별로 없는 민중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실한 수련생활로 점차 동학 내에서 모범적인 제자로 부각되었고, 최제우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1863년 12월 9일 宣傳官 鄭雲龜에 의해 최제우와 지도층 제자들이 체포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3월 10일, 최제우는 대구에서 처형되었다. 동학은 교조가 처형되고 지도층 제자들이 유배됨에 따라 지도부의 공백상태를 맞게 되었다. 동학의 지도층으로 활동했던 비판적 지식인들이 상당수 제거되었기에,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민중 출신이지만 모범적인 제자로 인정받던 최시형이 지도자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최시형은 최제우의 유족들을 보살폈으며, 남아있는 교도들과 함께 혼란한 동학을 수습하려고 노력했다.
한편, 동학 내부의 비판적 지식인 세력은 최제우의 체포와 처형 과정에서 그 세력이 약해졌으나, 시일이 흐르면서 사회현실에 불만을 가진 상당수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이필제를 중심으로 다시금 세력을 형성해 나갔다. 이들은 영해 일대에서 신분상승을 꾀하다 탄압을 받은 동학교도들인 영해일대의 新鄕 세력들과, 이러한 新鄕들의 불만을 이용하여 난을 도모하려는 변란 세력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1871년 무렵에는 최시형 중심의 세력보다 더 큰 세력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필제를 중심으로 한 세력은 1870년 10월 최시형에게 접근하여 교조신원을 위해 봉기할 것을 설득하였다. 최시형은 이 무렵 동학 내에서 주도권을 확립하지는 못했기에, 이들의 요구를 마침내 수락했고, 1871년 3월 10일에 경상도 일대 19개 고을 교도들 수백 명과 함께 영해부를 습격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이 체포되거나 죽었고 영해민란은 5일 만에 실패로 끝났다.
그런데, 이필제와 그를 뒤따르던 동학의 비판적 지식인층이 ‘영해민란’을 통해서 목표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교조신원’을 목표로 삼았다. 그들은 교조의 신원을 통해서 자신이 속한 ‘동학’이 당시의 유교와 마찬가지로 한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사상임을 인정받고자 했다. 그렇지만 내부적으로는 교조신원이라는 종교적 동기보다 사회적 동기가 강했다. 주로 서얼출신 新鄕 세력인 영해지역 동학교도들은 당시의 지배체제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영해민란을 통해 이러한 불만을 표출한 것이었다. 사회적 동기가 강했던 동학 내부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최시형보다는 그들과 같은 계층 출신인 이필제에게서 동질감을 느끼고 이필제를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필제를 중심으로 한 비판적 지식인들은 영해민란의 실패로 대부분 죽거나 유배되었고, 동학 내에서 이들의 세력은 無力化되었다. 따라서 영해민란으로 인해 동학이 입은 피해가 컸지만, 오히려 1871년 ‘영해민란’의 실패 직후 동학 안에서 최시형의 지위는 확고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 박맹수, 최시형 연구 : 주요활동과 사상을 중심으로, 한국학대학원, 1995
◈ 이미숙, 최제우˙최시형의 여성관, 2005
◈ 윤석산, 동학교조 수운 최제우, 모시는 사람들, 2004
◈ 오문헌, 해월 최시형의 생활정치 사상 연구, 연세대학교, 1994
◈ 정경홍, 侍天人間, 개벽사, 1992
◈ 石井壽夫, 敎祖 崔濟愚에 있어서 東學思想의 歷史的 展開, 歷史學 硏究 제 11권 제 1호,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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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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