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신라건국설화
2. 신라의 발전 과정
3. 후삼국의 성립
4. 문화의 성취
5. 조직의 발달
6. 쇠퇴의 이유
7. 삼국 통일의 의의 & 한계
♣ 참고문헌
2. 신라의 발전 과정
3. 후삼국의 성립
4. 문화의 성취
5. 조직의 발달
6. 쇠퇴의 이유
7. 삼국 통일의 의의 & 한계
♣ 참고문헌
본문내용
한 지역의 주요 철산지는 김해, 울산, 삼척, 경주(감은포)인데 이 중 동해와 남해를 끼고 있어 수출입에도 유리했던 경주 지역은 기존에 발굴된 주변 산록의 용광로지와 함께 거대한 제철단지를 이루며 부족연합체였던 신라를 왕국으로 발전시키는 국부의 원천이 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철기 제작을 위한 철광산의 개발, 제련, 제작 등에 종사하는 전문기술 집단이 요구됐고 이러한 철자원과 제철기술의 확보 여부는 국가발전에 중요한 관건이 됐다. 이 황성동 유적은 신라 국부의 원천이었기 때문에 신라의 중앙권력은 황성동 유적에서 철기를 제작하고 공급하는 일을 직접 관장했을 것이며 자연히 야장족들은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렸을 것이다.
경주 황성동 유적은 행정구역상 경주시 황성동 907-2번지 일대로서 경주시 서북편 해발 30m 내외의 비교적 평탄한 지대에 있다. 지난 90년 주택공사가 이곳에 아파트를 짓기로 함에 따라 미리 유적의 존재 유무를 확인하기 위해 발굴하게 됐는데 그 결과 청동기시대부터 신라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구(遺構)가 존재하는 복합유적임이 드러났다. 그 중에서도 특히 국내외의 주목을 받은 것은 우리 나라에서는 최초로 확인된 신라 초기의 철기제작 관련 유구들이었다.
철기제작 관련유구는 2세기대와 4세기대의 것이 있다. 전자는 주거지 안에서 이루어진 소규모의 단조(鍛造) 작업에 관련된 유구들이었고, 후자는 주로 주조(鑄造) 작업과 관련된 유구들이었다. 특히 쇠도끼 주조에 쓰였던 거푸집들이 다량 출토돼 각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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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 경주 황성동 제철 유적
신라의 발달된 제철기술을 한눈에 보여주는 유적들. 사진은 위로부터 용해로, 쇠도끼 거푸집, 신라의 대장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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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동 유적은 지표조사에 따라 석기 및 청동기, 원삼국시대, 삼국시대로 구분되는데, 토기, 석기, 청동기, 철기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그러나 6·25 전쟁 당시 이곳에 미군 포병 부대가 진주하면서 땅 속 지층이 교란돼 지금까지 정확한 조사가 이뤄지지 못하고 대강의 윤곽을 통해 추측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소규모 용광로인 제철로와 제철로에서 나온 기본 철괴를 재용해하는 제련로, 단조제품을 제조하는 단야로로 사용되었을 유구들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는 오늘날의 일관제철소와 거의 유사한 형태다. 또 백제시대의 제철 유구인 충북 진천 석장리가 5백평 정도의 규모인 것에 비해 황성동은 3천평에 걸쳐서 발굴됐으며 아직도 2천평 정도가 더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등 그 규모가 대단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황성동 주택 지역에서 발굴된 슬래그를 조사 분석한 결과, 한반도 남부지역 철광석의 특징으로 볼 수 있는 비소가 다량 농축돼 있어 황성동이 독자적인 제철 기술을 확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제재를 사용할 정도의 야금기술은 보유하지 않았지만 목탄을 환원재와 열 공급원으로 사용했으며 한번에 1백20㎏의 철을 생산할 수 있을 정도의 제련로를 갖춘 것으로 보인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던 저변에는 철강생산에 의한 경제적·군사적 안정, 나아가서는 정치적인 안정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황성동 일대는 일종의 일관제철소 역할을 수행하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기틀이 됐다. 그리고 이러한 신라의 발달된 제철기술은 백제의 제철기술과 함께 일본으로도 전해져 일본 고대 제철기술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이와 같이 찬란했던 제철기술을 보유했던 삼국시대나 현대가 철기문명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제철기술의 확립을 통해 강력한 국가체제를 구축했던 삼국시대의 융성과 발전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가야-신라-동해안(현 포항제철)을 잇는 철기 문화 창달. 우리 나라 중공업 발달의 구심점인 포항제철이 포항에 자리잡은 것은 신라 야장족의 맥이 인근 포항으로 면면이 이어져 내려온 것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유적을 대대적으로 발굴, 복원함으로써 철강문화적인 측면뿐 아니라 당시의 야장족이 국가 경제 및 사회, 나아가서는 국제 외교에 크게 기여했던 점을 오늘의 철강산업 및 기술의 정신적인 맥과 연계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신라가 달성했던 통일의 위업을 환동해권의 중심인 포항에서 시발해 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신형기 박사(포항산업과학연구원)
☞ '신라 쇠부리 나라' (삼국 통일의 비밀)
경주 황성동 유적은 행정구역상 경주시 황성동 907-2번지 일대로서 경주시 서북편 해발 30m 내외의 비교적 평탄한 지대에 있다. 지난 90년 주택공사가 이곳에 아파트를 짓기로 함에 따라 미리 유적의 존재 유무를 확인하기 위해 발굴하게 됐는데 그 결과 청동기시대부터 신라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구(遺構)가 존재하는 복합유적임이 드러났다. 그 중에서도 특히 국내외의 주목을 받은 것은 우리 나라에서는 최초로 확인된 신라 초기의 철기제작 관련 유구들이었다.
철기제작 관련유구는 2세기대와 4세기대의 것이 있다. 전자는 주거지 안에서 이루어진 소규모의 단조(鍛造) 작업에 관련된 유구들이었고, 후자는 주로 주조(鑄造) 작업과 관련된 유구들이었다. 특히 쇠도끼 주조에 쓰였던 거푸집들이 다량 출토돼 각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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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 경주 황성동 제철 유적
신라의 발달된 제철기술을 한눈에 보여주는 유적들. 사진은 위로부터 용해로, 쇠도끼 거푸집, 신라의 대장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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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동 유적은 지표조사에 따라 석기 및 청동기, 원삼국시대, 삼국시대로 구분되는데, 토기, 석기, 청동기, 철기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그러나 6·25 전쟁 당시 이곳에 미군 포병 부대가 진주하면서 땅 속 지층이 교란돼 지금까지 정확한 조사가 이뤄지지 못하고 대강의 윤곽을 통해 추측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소규모 용광로인 제철로와 제철로에서 나온 기본 철괴를 재용해하는 제련로, 단조제품을 제조하는 단야로로 사용되었을 유구들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는 오늘날의 일관제철소와 거의 유사한 형태다. 또 백제시대의 제철 유구인 충북 진천 석장리가 5백평 정도의 규모인 것에 비해 황성동은 3천평에 걸쳐서 발굴됐으며 아직도 2천평 정도가 더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등 그 규모가 대단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황성동 주택 지역에서 발굴된 슬래그를 조사 분석한 결과, 한반도 남부지역 철광석의 특징으로 볼 수 있는 비소가 다량 농축돼 있어 황성동이 독자적인 제철 기술을 확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제재를 사용할 정도의 야금기술은 보유하지 않았지만 목탄을 환원재와 열 공급원으로 사용했으며 한번에 1백20㎏의 철을 생산할 수 있을 정도의 제련로를 갖춘 것으로 보인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던 저변에는 철강생산에 의한 경제적·군사적 안정, 나아가서는 정치적인 안정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황성동 일대는 일종의 일관제철소 역할을 수행하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기틀이 됐다. 그리고 이러한 신라의 발달된 제철기술은 백제의 제철기술과 함께 일본으로도 전해져 일본 고대 제철기술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이와 같이 찬란했던 제철기술을 보유했던 삼국시대나 현대가 철기문명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제철기술의 확립을 통해 강력한 국가체제를 구축했던 삼국시대의 융성과 발전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가야-신라-동해안(현 포항제철)을 잇는 철기 문화 창달. 우리 나라 중공업 발달의 구심점인 포항제철이 포항에 자리잡은 것은 신라 야장족의 맥이 인근 포항으로 면면이 이어져 내려온 것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유적을 대대적으로 발굴, 복원함으로써 철강문화적인 측면뿐 아니라 당시의 야장족이 국가 경제 및 사회, 나아가서는 국제 외교에 크게 기여했던 점을 오늘의 철강산업 및 기술의 정신적인 맥과 연계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신라가 달성했던 통일의 위업을 환동해권의 중심인 포항에서 시발해 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신형기 박사(포항산업과학연구원)
☞ '신라 쇠부리 나라' (삼국 통일의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