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제 1절 전후 처리
I. 파리강화회의
II. 평화의 모색
III. 배상금 문제
제 2절 민주주의의 발전과 한계
I. 민주주의의 발전
II. 영국의 쇠퇴
III. 프랑스
IV. 미국의 번영
I. 파리강화회의
II. 평화의 모색
III. 배상금 문제
제 2절 민주주의의 발전과 한계
I. 민주주의의 발전
II. 영국의 쇠퇴
III. 프랑스
IV. 미국의 번영
본문내용
보통선거가 실시됨, 노동당의 진출로 자유당이 보수당과의 틈바구니에 끼어 쇠퇴함,
나. 상선의 40% 파괴, 국제무역 조직이 파괴됨, - 수출부진, 산업위축, 실업자가 100만 명으로 증대, 영국은 세계의 공장의 자리를 내놓게 됨, 1926년 250만 명의 노동자 총파업 발생했으나 중산층 이상의 시민의 협조로 위기 모면함, 그러나 불황과 실업은 여전하였다.
2. 대전 후 제국의 편제에 변화
가. 전후 영국의 자치령은 전후 개별적으로 국제연맹에 가입하였다. 1931년의 웨스트민스터 조례는 1926년의 제국회의의 보고서에 입각하여 본국과 자치령이 국왕에 대한 공통의 충성으로 결합될 뿐 기타 모든 점에서 동등하며 상호독립적임을 규정하였다.
나. 그리하여 본국과 자치령은 영국연방을 형성하여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연맹, 아일랜드자유국, 및 뉴펀들랜드가 이에 포함되었다.
3. 잠에서 깨어난 인도
가. 인도는 1차 대전에서 자체의 비용으로 110만 명의 군인을 영국을 위해 해외로 파견하였다.
나. 1919년 3월 인도에서 반영폭동 발생, 1920년 4월 펀잡의 반란, 특히 1919년 4월 암니차르(Amnitsar)에서 영국군이 무저항 인도인을 수천 명 학살한 사건을 계기로 근대적인 독립운동이 시작됨
다. 경제력과 군사력에서 여유를 잃은 1차 대전 이후의 영국은 이제 병합이나 직접지배라는 노골적인 힘에 의존하여 인도로 가는 길인 중동을 무리하게 장악하였지만 정작 인도는 이탈해나가기 시작했다.
4. 여타 지역의 반란
가. 1919년 5월 아프가니스탄에서 충돌이 일어나 영국군 병사를 급파한 순간, 이라크에서 대규모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라크 발란을 진압하기 위해 1차대전에서 중동전에 지출한 액수보다 많은 비용을 지출해야 했다.
나. 아일랜드에서도 1919년을 계기로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마침내 영국은 1949년 아일랜드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다.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영국은 유화정책을 취했다. 즉 힘에 의한 대처의 비효율성과 자국의 힘의 약함을 느끼면서도 지배에 대한 집념을 보여줌,
III. 프랑스
1. 일차대전 중 가장 큰 피해를 입음 : 200만 명 전사, 30만의 가옥과 2만개의 공장이 파괴됨.
2. 프랑스의 대독안전 보장 요구가 미국과 영국의 반대로 관철되지 않음 : 프랑스는 라인 강 서부를 분리시켜 라인란트 공화국을 만들어 프랑스의 세력 하에 두기를 원했으나 좌절됨, 또한 미영불의 방위동맹이 계획되었으나 미국상원이 베르사이유 조약을 거부함으로써 좌절되었다.
3. 1923년 루우르 탄광 점령 : 독일의 소극적인 저항으로 목적 달성 못하고, 군대유지비만 가중됨,
4. 1924년 좌파 연합이 정권을 장악하고, 대외협조의 방침을 정함에 따라 1924년 루우르에서 철군함. 1925년 로카르노 협정에 참가함,
5. 인플레이션의 지속됨, 비록 1928년 평가절하를 계기로 국제무역이 호전되어 프랑스 경제는 안정을 되찾고, 다시 번영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다가 1932년에 세계경제대공황에 직면하였다.
6. 1935년 인민전선의 성립
IV. 미국의 번영
가. 미국의 금보유고는 세계의 절반인 46억불, 뉴욕이 런던을 대신하여 세계 금융의 중심지로 부상함,
나. 미국 중공업의 발전은 전시 채권의 포기를 상쇄하고도 남음,
다. 미국이 고립주의적 정책으로 복귀함, 그러나 워싱턴 국축회의와 부전조약을 담당하였다.
라. 쿨리지(Collidge), 1923-1929) 대통령 시대는 전례 없는 호경기였다. 증권시장의 호황, 미국인의 생활 수준 크게 향상됨, -- 미국의 자동차 보유 대수는 세계의 80%, 전화는 61%,
나. 상선의 40% 파괴, 국제무역 조직이 파괴됨, - 수출부진, 산업위축, 실업자가 100만 명으로 증대, 영국은 세계의 공장의 자리를 내놓게 됨, 1926년 250만 명의 노동자 총파업 발생했으나 중산층 이상의 시민의 협조로 위기 모면함, 그러나 불황과 실업은 여전하였다.
2. 대전 후 제국의 편제에 변화
가. 전후 영국의 자치령은 전후 개별적으로 국제연맹에 가입하였다. 1931년의 웨스트민스터 조례는 1926년의 제국회의의 보고서에 입각하여 본국과 자치령이 국왕에 대한 공통의 충성으로 결합될 뿐 기타 모든 점에서 동등하며 상호독립적임을 규정하였다.
나. 그리하여 본국과 자치령은 영국연방을 형성하여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연맹, 아일랜드자유국, 및 뉴펀들랜드가 이에 포함되었다.
3. 잠에서 깨어난 인도
가. 인도는 1차 대전에서 자체의 비용으로 110만 명의 군인을 영국을 위해 해외로 파견하였다.
나. 1919년 3월 인도에서 반영폭동 발생, 1920년 4월 펀잡의 반란, 특히 1919년 4월 암니차르(Amnitsar)에서 영국군이 무저항 인도인을 수천 명 학살한 사건을 계기로 근대적인 독립운동이 시작됨
다. 경제력과 군사력에서 여유를 잃은 1차 대전 이후의 영국은 이제 병합이나 직접지배라는 노골적인 힘에 의존하여 인도로 가는 길인 중동을 무리하게 장악하였지만 정작 인도는 이탈해나가기 시작했다.
4. 여타 지역의 반란
가. 1919년 5월 아프가니스탄에서 충돌이 일어나 영국군 병사를 급파한 순간, 이라크에서 대규모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라크 발란을 진압하기 위해 1차대전에서 중동전에 지출한 액수보다 많은 비용을 지출해야 했다.
나. 아일랜드에서도 1919년을 계기로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마침내 영국은 1949년 아일랜드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다.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영국은 유화정책을 취했다. 즉 힘에 의한 대처의 비효율성과 자국의 힘의 약함을 느끼면서도 지배에 대한 집념을 보여줌,
III. 프랑스
1. 일차대전 중 가장 큰 피해를 입음 : 200만 명 전사, 30만의 가옥과 2만개의 공장이 파괴됨.
2. 프랑스의 대독안전 보장 요구가 미국과 영국의 반대로 관철되지 않음 : 프랑스는 라인 강 서부를 분리시켜 라인란트 공화국을 만들어 프랑스의 세력 하에 두기를 원했으나 좌절됨, 또한 미영불의 방위동맹이 계획되었으나 미국상원이 베르사이유 조약을 거부함으로써 좌절되었다.
3. 1923년 루우르 탄광 점령 : 독일의 소극적인 저항으로 목적 달성 못하고, 군대유지비만 가중됨,
4. 1924년 좌파 연합이 정권을 장악하고, 대외협조의 방침을 정함에 따라 1924년 루우르에서 철군함. 1925년 로카르노 협정에 참가함,
5. 인플레이션의 지속됨, 비록 1928년 평가절하를 계기로 국제무역이 호전되어 프랑스 경제는 안정을 되찾고, 다시 번영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다가 1932년에 세계경제대공황에 직면하였다.
6. 1935년 인민전선의 성립
IV. 미국의 번영
가. 미국의 금보유고는 세계의 절반인 46억불, 뉴욕이 런던을 대신하여 세계 금융의 중심지로 부상함,
나. 미국 중공업의 발전은 전시 채권의 포기를 상쇄하고도 남음,
다. 미국이 고립주의적 정책으로 복귀함, 그러나 워싱턴 국축회의와 부전조약을 담당하였다.
라. 쿨리지(Collidge), 1923-1929) 대통령 시대는 전례 없는 호경기였다. 증권시장의 호황, 미국인의 생활 수준 크게 향상됨, -- 미국의 자동차 보유 대수는 세계의 80%, 전화는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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