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들어가며
- 지금, 오키나와
Ⅱ. 오키나와의 역사
1. 근대 오키나와 - 류큐왕국 멸망과 일본제국으로의 병합
2. 전전 오키나와 - ‘동화’의 한계
Ⅲ. 기지화의 역사
1. 전전 기지건설
2. 미군점령기 기지확장
3. 오키나와 일본복귀 이후 미군기지 문제
※ 참고문헌
- 지금, 오키나와
Ⅱ. 오키나와의 역사
1. 근대 오키나와 - 류큐왕국 멸망과 일본제국으로의 병합
2. 전전 오키나와 - ‘동화’의 한계
Ⅲ. 기지화의 역사
1. 전전 기지건설
2. 미군점령기 기지확장
3. 오키나와 일본복귀 이후 미군기지 문제
※ 참고문헌
본문내용
요성에 대한 인식의 과정으로인해 오키나와는 ‘태평양의 요석(keystone)'으로서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서 핵심적인 요소로 부각되었다.
미군은 대일평화조약 발효 이후 군용지임대차계약을 위한 포령 91호, ‘계약권’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포령 91호는 20년이라는 긴 기간을 계약기간으로 삼았으며 “코카콜라 한 병 값도 안된다”고 오키나와 주민들이 불만을 표시할 정도로 낮은 사용료를 책정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 미군은 신규의 토지접수를 위해 1953년 4월 3일, 포령 109호인 ‘토지수용령’을 공포하여 시행하였다. 이때부터 미군은 무장군인을 출동시켜 농민들의 완강한 저항을 제압하고 토지접수를 실시하였다.
1954년 3월 미 민정부는 군용지료의 일괄지불이라는 미 육군성의 방침을 발표하는데, 이것은 미군이 정한 차지료의 16.6년치를 한꺼번에 지불함으로써 사실상 토지를 매수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오키나와측은 일괄지불 반대, 적정보상, 손해배상, 신규접수반대라는 ‘토지를 지키는 4원칙’을 내세우며 항의하였다. 동시에 행정부, 입법원, 시정촌장회, 군용지주의 단체인 토지련이 4자협의회를 결성하여 대미협상을 전개하였다. 이에 대해 미 하원 군사위원회는 특별분과위원회를 파견한다. 이 조사단이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가 이른바, ‘프라이스 권고’이다. ‘프라이스 권고’는 오키나와 기지가 ① 제약없는 핵기지로, ② 아시아 각지의 지역적 분쟁에 대처하는 미 전략의 거점으로서, ③ 일본이나 필리핀의 친미정권이 무너질 경우의 보루로서 지극히 중요하며, 군용지 정책을 포함한 당시까지의 미군지배 방식을 기본적으로 옳다고 하였다. ‘프라이스 권고’가 알려지자 오키나와에서는 4자협을 중심으로 4원칙을 관철하기 위한 광범위한 대중적 저항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섬 전체 투쟁(島ぐるみ)’ 이다.
(미군점령기 기지확장의 특징 정리하기)
3. 오키나와 일본복귀 이후 미군기지 문제
베트남전쟁의 악화와 더불어 미국의 오키나와 지배가 흔들리기 시작한 반면, 오키나와의 대중운동은 크게 발전하고 있었다. 당시까지 오키나와의 대중운동은 ‘일본복귀’를 지향하고 있었다. 미군지배 하에서 오키나와 민중의 정치적사회적 권리의 제약, 과도한 기지의 존재로 인한 부담을 적어도 ‘본토수준’으로 시정한 후에 일본 전체의 기지철거를 위해 노력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베트남전쟁을 거치면서 전쟁에 사용되고 있는 기지를 묵인하는 것 자체가 가해자적 역할을 하는 것 아닌는 사고가 확산되면서 ‘평화헌법 아래로의 복귀’라는 이념은 ‘반전복귀’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72년에 이루어진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는 ‘핵 없이’, ‘본토수준’으로 복귀되기 바랐던 오키나와 민중들의 염원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오키나와 반환협상의 대표인 와카즈미 케이와 키신저가 핵 반입에 관한 비밀합의의사록을 작성하고, 양국의 정상이 이에 서명함으로써 오키나와의 비핵화는 실현되지 못했다. 또한 과도한 기지의 부담도 ‘본토수준’으로 경감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위대가 ‘본토수준’으로 배치되기에 이르렀다. 오키나와현의 면적은 2,274.32㎢로 일본 전체의 0.6%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2005년 3월말까지 오키나와의 자위대기지는 34시설, 6.4㎢정도인데, 이는 일본 전체에서 시설수로는 1.2%, 면적상으로는 0.6%를 차지한다.
1972년을 전후하여, 일본 본토의 미군기지는 1968년의 약 3만 헥타르에서 1974년에는 9,702헥타르로 약 3분의 1로 줄어들지만, 오키나와의 미군기지는 겨우 몇 %가 줄어들었을 뿐이다. 당시 일본의 정치인관료들은 미군기지의 정리통합에 대해서 “일본 본토가 아니라 오키나와의 다른 기지로 이전하도록”미국에 요청하고 있었다. 결국, 오키나와 반환을 즈음해서 이루어진 기지의 정리통합에서도 오키나와에 기지를 집중시킴으로써 일본 본토에서 기지가 문제시되는 상황을 피하려는 미일 양 정부의 의도가 관철된 것이다.
오키나와 반환 이후, 미군기지의 문제를 살펴보면 기지의 시설건수나 면적이 꾸준히 축소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72년 5월, 복귀 당시에 오키나와의 미군기지는 87시설로 그 면적이 28,660.8㏊에 달했는데 2005년에는 37시설에 면적은 23,671.3㏊가 되었다. 복귀 당시에 비해서 면적상으로 17.4%가 줄어들었으니 매년 0.5%정도씩 감소되어 온 셈이다.
그러나 이것이 오키나와에서 기지의 부담이 축소되어 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먼저, 1950년대를 거티면서 오키나와에서 무차별적으로 진행된 기지 확장으로 인해서 추가적인 확장의 필요성은 크지 않았다.
둘째, 이와 더불어 무차별적인 기지건설의 과정에서 여러 곳에 산재한 기지를 정리통합하는 것이 비용이나 관리의 효율성, 기지의 통합적 운용면에서 더 이익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셋째, 복귀 후 오키나와에서는 베트남전 종전과 더불어 베트남에더 철수해 온 해병대의 즉응전투태세를 유지하기 위한 각종 훈련이 캠프 한센, 캠프슈와브, 북부훈련장을 중심으로 격렬하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특히 미 해병대의 실탄포격훈련은 현도 104호선을 봉쇄하고 진행되어 주민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 참고문헌
- 오키나와 문제와 일본 외교의 특징 김지연(Jeeyeon KIM)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한국정치외교사논총, 제32집 제2호 2011.2, page(s): 337-362
- 오키나와의 아이덴티티 문제와 자문화인식 이지원(Lee Chiwon)
한국사회사학회, 사회와역사, 통권 제78집 2008.6, page(s): 223-276
- 오키나와(沖繩)의 기지화·군사화에 관한 연구 정영신(Jeong Young Sin)
한국사회사학회, 사회와역사, 통권 제73집 2007.3, page(s): 145-184
- 류큐오키나와(인)의 아이덴티티 형성사 -문학 텍스트를 중심으로- 손지연
일본학연구 [KCI 등재] 제33집 2011년 5월, pp.203-234 단국대학교 일본연구소
- 기지의 섬, 오키나와 : 현실과 운동 / 정근식 / 논형 / 2008
- 경계의 섬, 오키나와 : 기억과 정체성 / 정근식 / 논형 / 2008
미군은 대일평화조약 발효 이후 군용지임대차계약을 위한 포령 91호, ‘계약권’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포령 91호는 20년이라는 긴 기간을 계약기간으로 삼았으며 “코카콜라 한 병 값도 안된다”고 오키나와 주민들이 불만을 표시할 정도로 낮은 사용료를 책정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 미군은 신규의 토지접수를 위해 1953년 4월 3일, 포령 109호인 ‘토지수용령’을 공포하여 시행하였다. 이때부터 미군은 무장군인을 출동시켜 농민들의 완강한 저항을 제압하고 토지접수를 실시하였다.
1954년 3월 미 민정부는 군용지료의 일괄지불이라는 미 육군성의 방침을 발표하는데, 이것은 미군이 정한 차지료의 16.6년치를 한꺼번에 지불함으로써 사실상 토지를 매수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오키나와측은 일괄지불 반대, 적정보상, 손해배상, 신규접수반대라는 ‘토지를 지키는 4원칙’을 내세우며 항의하였다. 동시에 행정부, 입법원, 시정촌장회, 군용지주의 단체인 토지련이 4자협의회를 결성하여 대미협상을 전개하였다. 이에 대해 미 하원 군사위원회는 특별분과위원회를 파견한다. 이 조사단이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가 이른바, ‘프라이스 권고’이다. ‘프라이스 권고’는 오키나와 기지가 ① 제약없는 핵기지로, ② 아시아 각지의 지역적 분쟁에 대처하는 미 전략의 거점으로서, ③ 일본이나 필리핀의 친미정권이 무너질 경우의 보루로서 지극히 중요하며, 군용지 정책을 포함한 당시까지의 미군지배 방식을 기본적으로 옳다고 하였다. ‘프라이스 권고’가 알려지자 오키나와에서는 4자협을 중심으로 4원칙을 관철하기 위한 광범위한 대중적 저항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섬 전체 투쟁(島ぐるみ)’ 이다.
(미군점령기 기지확장의 특징 정리하기)
3. 오키나와 일본복귀 이후 미군기지 문제
베트남전쟁의 악화와 더불어 미국의 오키나와 지배가 흔들리기 시작한 반면, 오키나와의 대중운동은 크게 발전하고 있었다. 당시까지 오키나와의 대중운동은 ‘일본복귀’를 지향하고 있었다. 미군지배 하에서 오키나와 민중의 정치적사회적 권리의 제약, 과도한 기지의 존재로 인한 부담을 적어도 ‘본토수준’으로 시정한 후에 일본 전체의 기지철거를 위해 노력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베트남전쟁을 거치면서 전쟁에 사용되고 있는 기지를 묵인하는 것 자체가 가해자적 역할을 하는 것 아닌는 사고가 확산되면서 ‘평화헌법 아래로의 복귀’라는 이념은 ‘반전복귀’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72년에 이루어진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는 ‘핵 없이’, ‘본토수준’으로 복귀되기 바랐던 오키나와 민중들의 염원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오키나와 반환협상의 대표인 와카즈미 케이와 키신저가 핵 반입에 관한 비밀합의의사록을 작성하고, 양국의 정상이 이에 서명함으로써 오키나와의 비핵화는 실현되지 못했다. 또한 과도한 기지의 부담도 ‘본토수준’으로 경감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위대가 ‘본토수준’으로 배치되기에 이르렀다. 오키나와현의 면적은 2,274.32㎢로 일본 전체의 0.6%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2005년 3월말까지 오키나와의 자위대기지는 34시설, 6.4㎢정도인데, 이는 일본 전체에서 시설수로는 1.2%, 면적상으로는 0.6%를 차지한다.
1972년을 전후하여, 일본 본토의 미군기지는 1968년의 약 3만 헥타르에서 1974년에는 9,702헥타르로 약 3분의 1로 줄어들지만, 오키나와의 미군기지는 겨우 몇 %가 줄어들었을 뿐이다. 당시 일본의 정치인관료들은 미군기지의 정리통합에 대해서 “일본 본토가 아니라 오키나와의 다른 기지로 이전하도록”미국에 요청하고 있었다. 결국, 오키나와 반환을 즈음해서 이루어진 기지의 정리통합에서도 오키나와에 기지를 집중시킴으로써 일본 본토에서 기지가 문제시되는 상황을 피하려는 미일 양 정부의 의도가 관철된 것이다.
오키나와 반환 이후, 미군기지의 문제를 살펴보면 기지의 시설건수나 면적이 꾸준히 축소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72년 5월, 복귀 당시에 오키나와의 미군기지는 87시설로 그 면적이 28,660.8㏊에 달했는데 2005년에는 37시설에 면적은 23,671.3㏊가 되었다. 복귀 당시에 비해서 면적상으로 17.4%가 줄어들었으니 매년 0.5%정도씩 감소되어 온 셈이다.
그러나 이것이 오키나와에서 기지의 부담이 축소되어 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먼저, 1950년대를 거티면서 오키나와에서 무차별적으로 진행된 기지 확장으로 인해서 추가적인 확장의 필요성은 크지 않았다.
둘째, 이와 더불어 무차별적인 기지건설의 과정에서 여러 곳에 산재한 기지를 정리통합하는 것이 비용이나 관리의 효율성, 기지의 통합적 운용면에서 더 이익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셋째, 복귀 후 오키나와에서는 베트남전 종전과 더불어 베트남에더 철수해 온 해병대의 즉응전투태세를 유지하기 위한 각종 훈련이 캠프 한센, 캠프슈와브, 북부훈련장을 중심으로 격렬하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특히 미 해병대의 실탄포격훈련은 현도 104호선을 봉쇄하고 진행되어 주민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 참고문헌
- 오키나와 문제와 일본 외교의 특징 김지연(Jeeyeon KIM)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한국정치외교사논총, 제32집 제2호 2011.2, page(s): 337-362
- 오키나와의 아이덴티티 문제와 자문화인식 이지원(Lee Chiwon)
한국사회사학회, 사회와역사, 통권 제78집 2008.6, page(s): 223-276
- 오키나와(沖繩)의 기지화·군사화에 관한 연구 정영신(Jeong Young Sin)
한국사회사학회, 사회와역사, 통권 제73집 2007.3, page(s): 145-184
- 류큐오키나와(인)의 아이덴티티 형성사 -문학 텍스트를 중심으로- 손지연
일본학연구 [KCI 등재] 제33집 2011년 5월, pp.203-234 단국대학교 일본연구소
- 기지의 섬, 오키나와 : 현실과 운동 / 정근식 / 논형 / 2008
- 경계의 섬, 오키나와 : 기억과 정체성 / 정근식 / 논형 /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