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소위 ‘비판적’ 부르디외
2. 도구와 분석들
3. 재생산에서 생산으로: 관계 그리고 시간
4. 진리와 반역
2. 도구와 분석들
3. 재생산에서 생산으로: 관계 그리고 시간
4. 진리와 반역
본문내용
양식을 폭로하는 일, 즉 A라는 음악 = 부르조아지, B라는 음악 = 프롤레타리아트 라는 공식은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지배의 도구가 폭로되어 스스로를 구별시켜주지 못할 때가 되면, 지배계급은 이미 또 다른 도구를 마련할 것이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지배의 비밀을 쫓는 숨바꼭질 대신에 부르디외의 분석은 상징투쟁이 벌어지는 양상을 분석한다. 계급투쟁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관계 속에서 각자의 위치를 점하기 위한 투쟁 즉 상징투쟁의 과정이다. 이 상징투쟁은 경제정치문화 등의 칸막이쳐진 영역 모두를 포괄한다. 부르디외의 자본 개념은 실천이 일어나는 장 속에서 자신의 자본을 확장하고 상징자본을 규정내리며 획득하려는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을 분석하기 위한 도구이다. 이는 고정된 계급 행위자들이 독점하고 있는 비밀스러운 ‘무엇’을 폭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쫓고 쫓기는 급박한 경주는, 누가 앞에 있으며 그가 무엇을 지니고 있는가를 만천하에 폭로하여 끝나지 않는다. 행위자들은 이미 불평등함을 알고 있다. 특정 장 내에서만 인정받는 자본인 상징자본과, 모든 행위자들 사이에서 공유되어 장을 유지시키는 게임의 룰이 무엇인가를 밝힘으로써 지배/피지배를 설명할 수 있다. 지배자의 억압과 피지배자의 고통이라는 대비로 계급투쟁을 설명할 수 없다. 나름대로 자신의 위치를 상승시키거나 고수하려는 각각의 실천과 전략들의 결과로 지배는 계속된다. 눌린 자를 자각시켜야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의 노력, 적극성이 어떻게 굴절되고 있는가, 그의 불만, 분노를 포함하는 인식이 어떻게 공모하고 있는가가 문제이다.
구조와 개인 사이를 매개한다는 설명을 고집한다면, 아비투스는 절충 개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즉 결정론의 시각에서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옹호하는 시각에서도 만족스럽지 않다. 아비투스는 자유와 결정론이 대립하는 틀내에서는 자리매김될 수 없다. 구조화된, 구조화하는 구조인 아비투스는, 미래와 이어지는 현재의 과거로서, 끊임없는 변화가 질서 속에 포섭되는 과정을 고찰하기 위한 도구이다. 행위자가 주관적 기대와 객관적 조건을 연결하고 불확실함에 투자하는 순간에 실천감각이 작동한다. 실천감각의 작동은 즉각적이다. 아비투스에 의한 실천의 조정은 무의식적인 것이기 때문에, 한없이 자유롭고 규칙에 얽매이지 않은 듯한 곳에서 가장 완벽한 지배는 지속된다. 이와 같은 분석은 아비투스의 자연스러움을 거북하게 한다. 이 불쾌한 분석, 아비투스의 결정론은 이미 결정된 것들을 밝혀냄으로써 지배의 순환을 끊고 새로운 게임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하는 자유의 조건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고찰되는 변혁이 흔히 말하는 진정한 변혁이나 해방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밝혀두어야 겠다. 변혁은 단지 새로운 룰에 의한 게임의 시작을 의미한다. 아비투스는 엄청난 격동조차 삼켜버리며 그 지배는 영원하다. 행위자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자신에게 각인된 과거의 조건을 현재로 그리고 미래로 연결시킨다. 부르디외가 말하는 변혁은 끊임없는 이어져야할 어긋남, 항상 미완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일탈 이상이 아니다.
오인, 상징권력 개념은 이데올로기나 지배의 교묘한 속임수를 폭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만일 지배상태가 사회내의 구조적 모순을 은폐한다면 올바른 인식을 위한 방법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옳음과 그름을 명확히 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내올 수 있는 올바른 인식은 있을 수 없다. 오인이나 상징권력은 관계 속에서 나오며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행위자 모두가 실천하기 위해 자신의 마주하는 상황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승인하며 그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모든 인식은 오인이다. 상징권력은 가시적인 형태로 명령내리고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숨겨져 있고 암묵적이기에 효과를 지닌다. 이러한 파악을 통해 완벽한 수혜자나 완벽한 피해자란 없으며 모두의 공모에 의해 장 안에서의 게임이 유지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과정은 불평등한 자본의 분배상태, 지배/피지배 상황 등에 대한 암묵적 승인을 포함한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한 행위자의 실천을 지배상태에 대한 일관되고 완벽한 저항이나 옹호 중 하나로 깨끗이 갈라놓을 수 없다. 모든 인식이 오인이며 언제나 미완성이라는 사실은, 변혁(저항)이 고착화된 하나의 지배상태의 한 측면 대한 반대일 수 있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새로운 지배를 용인하고 공고히 하는 상징권력으로 작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하나의 오인에 이어 나타나는 또 다른 오인은 장에서 벌어졌던 모든 전략들의 결과이며 이미 현실 속에 배태되어 있다. 또한 전략의 결과로 변화된 또 하나의 현재 속에서 과거의 비판은 상징폭력의 기반으로 변모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부르디외의 분석 속에서 진정한 변화, 변혁을 위한 조언을 찾으려 한다면 헛수고이다. 그가 말하는 반역은 그 앞에 놓인 것이 무엇이든간에 그것을 넘어서는 실천과 스스로가 꿈꾸는 특정한 미래에서 벗어나는 고통스러움을 의미한다. 해결해야 할 문제점과 그 이후 도달하게 될 저쪽 편, 그리고 그 이행의 방법을 찾아 낼 수는 없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비판하고자 하는 그리고 반역을 꿈꾸는 기존의 바램을 반역한다. 오히려 그의 분석은 숨가쁘게 도착한 종착점에 다시 출발선을 그어놓는다. 비판 혹은 진리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 이 점이 그의 분석에 ‘비판적’이라는 형용사를 붙이기 힘겨운 이유이자, 그에 대한 독해가 다른 길을 가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참고문헌>
P. Bourdieu, 1994,『혼돈을 일으키는 과학』, 문경자 역, 솔.
― , 1995,『상징폭력과 문화재생산』, 정일준 편역, 새물결.
― , 1995,『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上』, 최종철 역, 새물결.
― , 1990, In Other Words : Essay toward a Reflexive Sociology,
Stanford Univ. Polity Press.
― , 1990, The Logic of Practice, Stanford Univ. Polity Press.
R. Jenkins, 1992, Pierre Bourdieu , London; New York: Routledge.
구조와 개인 사이를 매개한다는 설명을 고집한다면, 아비투스는 절충 개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즉 결정론의 시각에서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옹호하는 시각에서도 만족스럽지 않다. 아비투스는 자유와 결정론이 대립하는 틀내에서는 자리매김될 수 없다. 구조화된, 구조화하는 구조인 아비투스는, 미래와 이어지는 현재의 과거로서, 끊임없는 변화가 질서 속에 포섭되는 과정을 고찰하기 위한 도구이다. 행위자가 주관적 기대와 객관적 조건을 연결하고 불확실함에 투자하는 순간에 실천감각이 작동한다. 실천감각의 작동은 즉각적이다. 아비투스에 의한 실천의 조정은 무의식적인 것이기 때문에, 한없이 자유롭고 규칙에 얽매이지 않은 듯한 곳에서 가장 완벽한 지배는 지속된다. 이와 같은 분석은 아비투스의 자연스러움을 거북하게 한다. 이 불쾌한 분석, 아비투스의 결정론은 이미 결정된 것들을 밝혀냄으로써 지배의 순환을 끊고 새로운 게임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하는 자유의 조건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고찰되는 변혁이 흔히 말하는 진정한 변혁이나 해방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밝혀두어야 겠다. 변혁은 단지 새로운 룰에 의한 게임의 시작을 의미한다. 아비투스는 엄청난 격동조차 삼켜버리며 그 지배는 영원하다. 행위자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자신에게 각인된 과거의 조건을 현재로 그리고 미래로 연결시킨다. 부르디외가 말하는 변혁은 끊임없는 이어져야할 어긋남, 항상 미완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일탈 이상이 아니다.
오인, 상징권력 개념은 이데올로기나 지배의 교묘한 속임수를 폭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만일 지배상태가 사회내의 구조적 모순을 은폐한다면 올바른 인식을 위한 방법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옳음과 그름을 명확히 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내올 수 있는 올바른 인식은 있을 수 없다. 오인이나 상징권력은 관계 속에서 나오며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행위자 모두가 실천하기 위해 자신의 마주하는 상황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승인하며 그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모든 인식은 오인이다. 상징권력은 가시적인 형태로 명령내리고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숨겨져 있고 암묵적이기에 효과를 지닌다. 이러한 파악을 통해 완벽한 수혜자나 완벽한 피해자란 없으며 모두의 공모에 의해 장 안에서의 게임이 유지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과정은 불평등한 자본의 분배상태, 지배/피지배 상황 등에 대한 암묵적 승인을 포함한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한 행위자의 실천을 지배상태에 대한 일관되고 완벽한 저항이나 옹호 중 하나로 깨끗이 갈라놓을 수 없다. 모든 인식이 오인이며 언제나 미완성이라는 사실은, 변혁(저항)이 고착화된 하나의 지배상태의 한 측면 대한 반대일 수 있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새로운 지배를 용인하고 공고히 하는 상징권력으로 작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하나의 오인에 이어 나타나는 또 다른 오인은 장에서 벌어졌던 모든 전략들의 결과이며 이미 현실 속에 배태되어 있다. 또한 전략의 결과로 변화된 또 하나의 현재 속에서 과거의 비판은 상징폭력의 기반으로 변모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부르디외의 분석 속에서 진정한 변화, 변혁을 위한 조언을 찾으려 한다면 헛수고이다. 그가 말하는 반역은 그 앞에 놓인 것이 무엇이든간에 그것을 넘어서는 실천과 스스로가 꿈꾸는 특정한 미래에서 벗어나는 고통스러움을 의미한다. 해결해야 할 문제점과 그 이후 도달하게 될 저쪽 편, 그리고 그 이행의 방법을 찾아 낼 수는 없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비판하고자 하는 그리고 반역을 꿈꾸는 기존의 바램을 반역한다. 오히려 그의 분석은 숨가쁘게 도착한 종착점에 다시 출발선을 그어놓는다. 비판 혹은 진리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 이 점이 그의 분석에 ‘비판적’이라는 형용사를 붙이기 힘겨운 이유이자, 그에 대한 독해가 다른 길을 가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참고문헌>
P. Bourdieu, 1994,『혼돈을 일으키는 과학』, 문경자 역, 솔.
― , 1995,『상징폭력과 문화재생산』, 정일준 편역, 새물결.
― , 1995,『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上』, 최종철 역, 새물결.
― , 1990, In Other Words : Essay toward a Reflexive Sociology,
Stanford Univ. Polity Press.
― , 1990, The Logic of Practice, Stanford Univ. Polity Press.
R. Jenkins, 1992, Pierre Bourdieu , London; New York: Routled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