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현과 통기타 가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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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신중현과 미 8군 무대

◉미 8군 무대 최고스타 신중현

◉미 8군 무대의 전설 신중현

◉신중현의 밴드활동

◉신중현의 앨범들

◉신중현의 재기

◉뮤직파워

◉과거로의 회귀

◉통기타가수(송창식,김세환,이장희,양희은)

본문내용

대로된 펑키를 선보임으로써 화려한 재기를 꿈꾸었다.그러나 <뮤직파워> 1집은 히트곡 모임이 되어버렸고 대편성의 브라스 펑키밴드는 크게 성공하지 않았다. 이제 펑키/디스코는 80년대 들어 주류 팝시장에서는 신쓰 팝/뉴웨이브에 의해 흘러간 음악이 되어버렸다. 또한 조용필의 등장으로 변해버린 가요계 상황에서도 브라스 펑키밴드는 가요시장에 어울리지 않았다. 결국 대부분의 맴버를 교체하며 2집에 '내가 쏜 위성'을 발표한다.
<뮤직파워>1집에서 하고자했던 펑키는 신중현에게는 새로운 시도였고 도전이었지만 기대만큼의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신중현은 또 한번의 진정한 명예 회복을 위해 83년 <세 나그네>를 결성한다. 이남이와 함께 한 <세 나그네>는 <엽전들>의 80년대판이라 할수있다. 음악 역시 <엽전들> 때의 블루스를 기본으로 한 것들이었다. <세나그네> 는 신중현을 과거의 인물로 규정지었고 점차 그는 비주류음악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80년대들어 가요계의 사운드는 신세사이저를 중심으로한 화려한 편곡으로 급격히 재편되고 있었는데 반해 신중현은 그런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고 그런 그는 시대의 중심이 될수 없었다. 시대는 이제 그의 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통기타가수(송창식,김세환,이장희,양희은)
-세시봉
세시봉은 종로구 무교동에 있었던 <세시봉 클럽>의 가수들이다. 70~80년대에 세시봉이라는 클럽의 인기는 어마어마 했는데 특히 암울한 시대 속에서도 음악과 청춘에 대한 열정이 살아 숨쉬는 곳이었다. 세시봉의 주역은 송창식, 윤형주, 조영남, 김세환 등등 입니다. 그리고 세시봉은 C'est si bon이라는 불어로 정말 좋다. 멋있다. 라는 뜻이다.
-김민기&양희은
김민기와 양희은은 70년대 청년문화의 밑그림이다. 1971년 김민기가 만들고 양희은이 노래한 저항적 포크가요 '아침이슬'은 우리 현대사의 격변기와 동행하며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예고했다.
김민기는 일천한 한국 대중음악사에 전복의 충격을 안긴 혁명가다. 그를 통해 노래는 위안과 오락에 소용되는 일회용 소모품의 지위에서 벗어났다. 정치한 통기타의 미의식과 우리말 울림으로 대중음악이 역사 와 동행하는 통찰력의 산물임을 명쾌하게 입증했다.
김민기의 저항적 포크음악은 양희은과 운명처럼 조우함으로써 70년대 청년문화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이루게 된다. '친구' '아침이슬' '새벽 길''백구'…. 김민기 음악은 침잠과 고뇌의 무늬를 지녔다. 반면 양희은의 목소리는 도전적 패기와 환원할 수 없는 젊음에 넘쳤다.
당시 청년 지식인은 물론, 세월을 건너뛰어 87년 6월의 거리를 가득메웠던 시민들이 애국가 다음으로 이 노래를 몇번이고 부르며 미래에 대한 희망의 일체감을 단련시켰다.
김민기의 포크음악에는 서구 포크 기수들의 노래에는 없는 영웅적 비극성이 녹아있다. 이런 비극성은 당시 지식인과 대학생들의 '혁명적 낭만주의' 세계관을 형상화 했고, '통기타 신세대'는 이를 자기 세대의 성가로 재해석했다. 노래는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구실로 금지됐다가 87년 김민기는 마침내 정치적으로 해금됐다.

키워드

신중현,   통기타,   포크송,   가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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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12.03.15
  • 저작시기2011.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34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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