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제1장 부흥의 긴박성
제2장 부흥의 장애물
제3장 불신
제4장 오염된 교리
제5장 결함 있는 정통
제6장 죽은 정통
제7장 영적 무력증
제8장 부흥에 대한 갈망
제9장 부흥의 성격
제10장 부흥의 목적
제11장 부흥의 결과
제12장 부흥이 오는 방식
제13장 기도와 부흥
제14장 부흥을 위한 기도
제15장 부흥을 위한 기도의 동기
제16장 부흥의 내용
제17장 부흥과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남
제18장 부흥과 하나님의 선하심의 나타남
제19장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
제20장 부흥에 대한 부담감
제21장 하나님의 개입
제22장 부흥을 위한 이사야의 기도
제23장 부흥 기도의 열정
제24장 부흥
제2장 부흥의 장애물
제3장 불신
제4장 오염된 교리
제5장 결함 있는 정통
제6장 죽은 정통
제7장 영적 무력증
제8장 부흥에 대한 갈망
제9장 부흥의 성격
제10장 부흥의 목적
제11장 부흥의 결과
제12장 부흥이 오는 방식
제13장 기도와 부흥
제14장 부흥을 위한 기도
제15장 부흥을 위한 기도의 동기
제16장 부흥의 내용
제17장 부흥과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남
제18장 부흥과 하나님의 선하심의 나타남
제19장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
제20장 부흥에 대한 부담감
제21장 하나님의 개입
제22장 부흥을 위한 이사야의 기도
제23장 부흥 기도의 열정
제24장 부흥
본문내용
나님께서 우리를 징벌하시는 방식을 이해하면서 기도하는 것(걍팍한 마음을 부드럽게 녹여주시고 돌아오셔서 저를 법대로 처리하지 마소서! 하나님의 긍휼과 인애에 전적으로 자신을 던지는 것)
그렇다면 선지자는 자신의 논증과 탄원을 어떤 근거에서 하고 있는 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는 아무 공로와 자격이 없음과 심지어는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성, 자신의 마음의 부패조차 모르는 것을 인정하고 그저 “오 주여!”라는 말밖에 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탄원의 근거는 하나님과의 언약적인 관계입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나아갑니다. 그런 다음 마지막 논증은 겸손함과 확신과 담대함을 가지고 기도로 환원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서 “오 주여, 주께서 계속 이러한 일을 하실 수 있습니까? 저희는 당신의 백성들이 아닙니다. 그처럼 번성하도록 허락하신 이 사람들은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들이고 그들은 우리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들입니다. 오 하나님, 그러한 일을 계속 하실 수 있습니까? 아무리 우리가 약하고, 힘이 없고, 지금 현재 넘어져 있고, 반역했고, 죄악적이고, 자랑할 것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당신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이시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당신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살펴보소서. 우리를 보시고 미소를 던지시고 우리를 알아보시고 우리에게로 다시 돌아오소서. 오, 이제 더 이상 우리로부터 멀리 떠나 계시지 마소서. 돌아오소서... 선지자처럼 기도하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제24장 부흥: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심(이사야 64:1)
이사야의 마지막 간구는 부흥과 관련된 궁극적인 기도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단순한 축복을 비는 것보다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언제나 기도드려야 하는 것과, 하나님의 성령께서 찾아오셔서 부흥을 일으켜 달라고 특별하고 긴박하게 기도하는 것 사이의 차이와 같습니다. 이것은(쿠퍼의 찬송가의 한 소절) 비상하고 예외적인 것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것은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부흥이 무엇인가를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강림하시는 것입니다. 저자는 죠지 휫필트가 첼튼함에서 설교할 때 일어났던 일을 인용하면서 성령의 임재는 정상적인 교회의 생활이나 사역 속에서 만나는 가장 높은 체험을 훨씬 능가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출애굽기 19장에서 하나님의 강림 사건 속에서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 자신과 자신의 영광과 능력의 표증을 주셨기 때문에 그들은 광야를 여행할 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것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저자는 실로 우리의 기도에 있어서 문제거리의 절반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능력을 인식하는 데 실패한다는 사실에 기인한다고 말합니다. 원수들에 대해서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바로 하늘을 가르시고 산들을 요동케 하며, 주전자 물을 끓이듯이 바다를 끓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영존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능력, 선지자는 바로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나타날 수 있도록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는 이와 같이 기도해야 합니까? 선지자는 이 질문에 대해 답을 합니다. 첫 번째 이유는 ‘주의 대적으로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입니다. 이 사람들이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위한 열심히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교회는 세상적인 방법들과 조직을 사용했지만 기독교의 메시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 바로 고통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큰 표징을 보기 전까지는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입니다. 하늘을 가르시고 그 이름을 알리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마지막 기도는 64장에 나온 것처럼 하나님의 세계의 상태입니다. 오늘 이사야는 3절에서 하나님께서 과거에 하셨던 대로, 주께서 전에 행하신 일을 해주시기만 구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그래서 강하게 교회사를 읽어보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께서 과거 허락하신 수많은 구원을 보십시오. “우리의 생각 밖에 두려운 일을 행하시던 그 때에,” 그것이 바로 기도에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과거 2000년 전에 하나님은 하늘을 가르시고 그 아들을 보냈습니다. 그 아들이 영광의 구름으로부터 내려오셔서 동정녀의 태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셨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남은 것은 무기력한 열 두 제자뿐이었습니다. 그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넘쳐났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께서 하늘을 가르시고 강림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강림이십니다. 모든 부흥의 역사마다 이것은 되풀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늘을 가르시고, 강림하시고, 그 백성들 속에 오셔서 능력과 영광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또한 4절에 보는 것과 같이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가는 한계가 없습니다. 존 뉴톤이 “내 영혼아 네 가방을 준비하라, 예수께서 기도에 응답하시기를 좋아하시네”라고 시작되는 찬송시에서 보여주는 것같이 하나님은 한없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에 한계를 그을 필요성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하늘에 한계가 있으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당시와는 다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보다 높이 계신 분에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은 5절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의를 행하고 의 행함을 즐거워하는 자와 만나십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자비한 성품인 사랑과 긍휼은 영원하지만 진노는 잠정적이라는 사실을 말하며 격려를 줍니다.
교회의 죄악과 교회의 배도와, 반역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보시고 노하십니다. 그러나 만일 교회가 진실로 회개하고 진실로 그 분을 찾으면,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만나주실 것입니다. “만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신 4:29).
오 하늘을 가르시고 속히 임하소서.
천(사람)의 마음들로 주의 것이 되게 하소서. - 윌리암 쿠퍼 -
그렇다면 선지자는 자신의 논증과 탄원을 어떤 근거에서 하고 있는 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는 아무 공로와 자격이 없음과 심지어는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성, 자신의 마음의 부패조차 모르는 것을 인정하고 그저 “오 주여!”라는 말밖에 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탄원의 근거는 하나님과의 언약적인 관계입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나아갑니다. 그런 다음 마지막 논증은 겸손함과 확신과 담대함을 가지고 기도로 환원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서 “오 주여, 주께서 계속 이러한 일을 하실 수 있습니까? 저희는 당신의 백성들이 아닙니다. 그처럼 번성하도록 허락하신 이 사람들은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들이고 그들은 우리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들입니다. 오 하나님, 그러한 일을 계속 하실 수 있습니까? 아무리 우리가 약하고, 힘이 없고, 지금 현재 넘어져 있고, 반역했고, 죄악적이고, 자랑할 것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당신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이시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당신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살펴보소서. 우리를 보시고 미소를 던지시고 우리를 알아보시고 우리에게로 다시 돌아오소서. 오, 이제 더 이상 우리로부터 멀리 떠나 계시지 마소서. 돌아오소서... 선지자처럼 기도하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제24장 부흥: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심(이사야 64:1)
이사야의 마지막 간구는 부흥과 관련된 궁극적인 기도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단순한 축복을 비는 것보다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언제나 기도드려야 하는 것과, 하나님의 성령께서 찾아오셔서 부흥을 일으켜 달라고 특별하고 긴박하게 기도하는 것 사이의 차이와 같습니다. 이것은(쿠퍼의 찬송가의 한 소절) 비상하고 예외적인 것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것은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부흥이 무엇인가를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강림하시는 것입니다. 저자는 죠지 휫필트가 첼튼함에서 설교할 때 일어났던 일을 인용하면서 성령의 임재는 정상적인 교회의 생활이나 사역 속에서 만나는 가장 높은 체험을 훨씬 능가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출애굽기 19장에서 하나님의 강림 사건 속에서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 자신과 자신의 영광과 능력의 표증을 주셨기 때문에 그들은 광야를 여행할 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것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저자는 실로 우리의 기도에 있어서 문제거리의 절반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능력을 인식하는 데 실패한다는 사실에 기인한다고 말합니다. 원수들에 대해서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바로 하늘을 가르시고 산들을 요동케 하며, 주전자 물을 끓이듯이 바다를 끓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영존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능력, 선지자는 바로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나타날 수 있도록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는 이와 같이 기도해야 합니까? 선지자는 이 질문에 대해 답을 합니다. 첫 번째 이유는 ‘주의 대적으로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입니다. 이 사람들이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위한 열심히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교회는 세상적인 방법들과 조직을 사용했지만 기독교의 메시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 바로 고통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큰 표징을 보기 전까지는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입니다. 하늘을 가르시고 그 이름을 알리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마지막 기도는 64장에 나온 것처럼 하나님의 세계의 상태입니다. 오늘 이사야는 3절에서 하나님께서 과거에 하셨던 대로, 주께서 전에 행하신 일을 해주시기만 구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그래서 강하게 교회사를 읽어보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께서 과거 허락하신 수많은 구원을 보십시오. “우리의 생각 밖에 두려운 일을 행하시던 그 때에,” 그것이 바로 기도에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과거 2000년 전에 하나님은 하늘을 가르시고 그 아들을 보냈습니다. 그 아들이 영광의 구름으로부터 내려오셔서 동정녀의 태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셨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남은 것은 무기력한 열 두 제자뿐이었습니다. 그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넘쳐났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께서 하늘을 가르시고 강림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강림이십니다. 모든 부흥의 역사마다 이것은 되풀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늘을 가르시고, 강림하시고, 그 백성들 속에 오셔서 능력과 영광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또한 4절에 보는 것과 같이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가는 한계가 없습니다. 존 뉴톤이 “내 영혼아 네 가방을 준비하라, 예수께서 기도에 응답하시기를 좋아하시네”라고 시작되는 찬송시에서 보여주는 것같이 하나님은 한없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에 한계를 그을 필요성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하늘에 한계가 있으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당시와는 다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보다 높이 계신 분에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은 5절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의를 행하고 의 행함을 즐거워하는 자와 만나십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자비한 성품인 사랑과 긍휼은 영원하지만 진노는 잠정적이라는 사실을 말하며 격려를 줍니다.
교회의 죄악과 교회의 배도와, 반역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보시고 노하십니다. 그러나 만일 교회가 진실로 회개하고 진실로 그 분을 찾으면,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만나주실 것입니다. “만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신 4:29).
오 하늘을 가르시고 속히 임하소서.
천(사람)의 마음들로 주의 것이 되게 하소서. - 윌리암 쿠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