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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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삶의 밑바탕
1. 도토리밥에서 쌀밥까지
2. 벌거숭이가 잘 꾸민 옷을 입기까지
3. 동굴 집에서 기와집까지
4. 성 다산의 상징에서 쾌락의 수단으로

Ⅱ삶의 애환
1. 축제와 놀이
2. 만남 사랑 그리고 결혼
3. 삶과 죽음의 길이 여기 있음에
4. 농가의 살림살이

Ⅲ생업과 터전
1. 황금 나락 들판에 가래 짚고 서서
2. 우쭐대던 장인 초라해진 장이
3. 시장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는데
4. 든든한 산성 화려한 도성
5. 고대의 인구주택센서스

본문내용

지 풍요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었다.
2. 우쭐대던 장인 초라해진 장이
(1) 돌을 녹이고 흙을 빚어서
삼국시대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농경이 종사했으며 그나마 색다른 직업을 가진 이들이 수공업자, 장인이었다. 장인들은 귀족들의 사치로 엄청난 물품을 만들어 냈으며 전쟁 시에는 각종 무기를 만드는 데 온 힘을 기울였고 평상시에는 농기구와 공구를 만들었다.
철기시대에는 장인 집단이 출현하고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각종 물품이 널리 사용되었다.
(2) 장이로의 전락
삼국시대 수공업자는 비교적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렸다. 하지만 삼국시대 후기 장인들은 국가에 공물을 바치고 부역에 동원되는 신세로 전락했다. 더욱이 관영 공방과 민영 공방의 구분이 현저해지면서 관영 공방의 장인은 노비 신분으로 민영 공방의 장인도 비록 양인이지만 사회적으로는 천민 취급을 받으며 살았다. 그리고 고려시대 이후로 장인들은 대장장이, 미장이의 표현과 함께 지위가 현저히 떨어지게 되었다.
3. 시장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는데
(1) 삼국시대 시장 스케치
신라는 처음으로 동시가 그리고 통일신라시대에 서시와 남시가 개설되었다. 세 개의 시장은 모두 금성 안에 있었고 감독 관청인 시전이 설치되어 시장의 상인과 상업세에 대한 관리뿐 아니라 도량형, 상품 가격, 등을 일일이 간섭하고 염격하게 규제했다.
초기의 시장은 이렇게 국가의 간섭과 통제가 심해서 시장 안에 관리 사무소가 설치되고 상인들은 일정한 곳에 집단적으로 거주해야 했다.
(2) 시의 원초적 모습
삼국시대의 시장은 큰 가뭄이 있으면 시장의 자리를 옮겨 그곳에서 용을 그려 놓고 기우제를 지냈다. 이처럼 하늘에 대한 제사와 인민에 대한 통치가 이루어지던 성스러운 장소 이것이 바로 우리 역사상 최초로 나타나는 시의 원초적인 모습이다. 고대인들은 기상이변이나 자연재해가 일어나면 하늘이나 조상신들이 자신을 벌주기 위해 조화를 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원시적인 시는 요즘의 시장과는 많이 달라서 제의가 벌어질 뿐 아니라 중요한 정사가 논의되고 죄인의 처형과 사면이 이루어지며 물품의 취합과 재분배가 행해지던 복합적인 공간이었다.
(3) 장사꾼 시에 나타나다
정시 상황이 바뀌고 시의 주인공인 샤먼들이 세속 사회로 진출하면서 시의 기능이나 성격이 변화해 갔다. 사회 질서가 복잡해지고 주변 나라들과의 충돌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재정이 분리되어갔다. 이에 따라 종래 시가 갖고 있던 정무 기능은 국왕을 중심으로 한 조정으로 넘어가면서 이제 시는 더 이상 복합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공간이 아니고 하늘에 대한 전통적인 제사를 올리는 종격적인 장소로 축소되었다.
이에 따라 시에서는 상업의 싹이 서서히 싹트고 있었다. 제수 용품을 가져다 바치고 그 대가로 신의 가호를 보장받으며 재분배 과정을 통해서 물품을 받아 오는 것 자체가 일종의 거래 행위였다.
4. 든든한 산성 화려한 도성
(1) 지방 통치의 거점, 국토방위의 중심
삼국은 국경의 요충지 곳곳에 성곽을 쌓았다. 그 성곽은 단순한 방어 시설에 그치지 않고 지방 통치의 중심지 구실을 하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은 한반도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었다. 만주를 차지하고 있던 고구려는 중국 세력과 대결하면서 랴오둥 벌판에 크고 작은 수많은 성을 쌓았다. 대외적으로 전쟁을 하면서 성 하나를 잘 지키는 것은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대외 방어 체계의 중심이 되는 큰 성에는 항상 많은 식량을 모아 두고 만일을 대비하였다.
(2) 시공자 실명제 실시
성이 적군에게 함락되면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끌려가서 노비가 되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성을 잘 지켜 내는 것은 바로 자신의 목숨이 걸린 중대한 문제였다. 성을 잘 지키는 것 못지않게 성을 튼튼하게 쌓는 일도 중요했다. 따라서 성 하나를 쌓는 것은 한 고을의 일이 아니라 국가적인 차원에서 계획되고 실행되었다. 성 쌓는 일은 무척이나 괴롭고 힘든 일이었다. 많은 인력이 동원되었고 또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당시 성을 쌓는데 수많은 남자들이 동원되어 여자들이 농사를 지을 정도였고 농가는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3) 국왕이 사는 특별시
도성은 좁은 의미로 왕이 사는 궁궐과 종묘, 사직이 있는 곳을 둘러싼 성곽을 가리킨다. 철기가 보급되고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읍락 중 중심이 되는 국읍이 생겨났고 이들에 의해 주변의 읍락들이 통합되면서 소국이 성립되었다. 또 소국들이 점차 통합되면서 사로국과 같은 중심지는 도성이 되었고 최고 권력자인 왕의 주거지는 궁궐로 발전하게 되었다.
5. 고대의 인구주택센서스
(1) 삼국시대에도 인구조사를 하였을까?
수천 년 동안 아주 느리게 증가하던 인구가 산업과 의학이 획기적으로 발달한 근대에 들어서면서 급격한 속도를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인구조사를 과연 하였을까? 고려나 조선시대에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호구조사를 실시하였다. 주로 백성들의 노동력을 징발하기 위한 목적에서 실시하였기 때문에 역역 부담자인 성인 남자와 가호를 기준으로 파악을 하였었다. 통일신라의 경우 신라촌락문서를 통해 비교적 안정된 지배 체제를 바탕으로 엄밀한 파악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경우는 사비성이 있던 부여 궁남지에서 ‘중구’ ‘소구’ 라는 표현이 나오는 목간이 발견되면서 백제에도 호적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경우는 광개토왕릉 비문에 고구려에서 왕릉을 지키는 수묘인을 정할 때 가호를 일정한 등급으로 나누어 징발한 사실이 나와 있다. 이처럼 삼국은 이미 호적을 통한 인구조사가 실시되었다고 볼 수 있다.
(2) 당시의 인구는 얼마나 되었을까?
백제의 경우는 3세가 중엽경에 오늘날의 경기, 충청, 전라도 지역에 해당하는 마한 지역에 10만 호 정도가 있었다. 당시 1호당 평균 5명 정도로 잡으면 마한지역은 대략 50만 정도로 추정되며 전체 인구는 100만에 도달했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경우는 신라 총병력 20여만 명이므로 전체 인구는 약 100만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의 경우는 전성기의 인구가 약 100만면 고구려가 멸망할 때 가호 수는 약 70만 호 전체 인구수는 약 350만명 정도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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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10.17
  • 저작시기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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