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통사 3권 요약 - 중세문학에서 근대문학으로의 이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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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문학통사 3권 요약 - 중세문학에서 근대문학으로의 이행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9.1 민족 수난에 대응한 문학
9.2 정통 한문학의 동요와 지속
9.3 소설시대로 들어서는 전환
9.4 문학의 근본 문제에 관한 재검토
9.5 문학 담당층의 확대
9.6 실학파문학의 새로운 방향
9.7 민요·민요시·악부시
9.8 시조의 변이와 사설시조의 등장
9.9 가사의 다양한 모습
9.10 불교·도교·천주교 문학
9.11 한문과 국문, 기록과 표현
9.12 설화·야담·한문단편
9.13 소설의 성장과 변모
9.14 서사무가에서 판소리계 소설까지
9.15 민속극의 저력과 변용

본문내용

. 민요의 가치를 한시에서 발현하려고 하는 진통에서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문학의 전형적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9.7.2 민요의 실상과 변모
민요의 기능이나 곡조뿐만 아니라 사설도 오래 두고 전승되며, 시대에 따라서 바뀔 수 있는 영역이 그리 크지 않다. 그러나 사회모순이 심각해지면서 풍자의 노래나 항거의 노래가 생겨나고, 그런 것을 창작해 퍼뜨리는 사람도 있었다. 조선 후기에 치열하게 전개된 민중 항쟁이 민요에도 나타나고 민요를 필요로 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민요는 누구든지 부를 수 있는 노래이고 일차적인 전승자는 농민이었다. 직업적인 소리패가 맡아서 발전시킨 공연물은 민요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 상례이다. 여러 곳의 장을 찾아다니는 장돌뱅이의 장타령, 구걸을 하러 다이면서 걸인들이 부르는 각설이타령은 그 자체가 공연물은 아니고 흉내 내면 흥미로워 민요의 특별한 갈래로 인정된다.
논매기 노래를 위백규의 시조 「농가구장」에서 받아들였다. 시집살이 노래는 성격이 단순하지 않다. 사대부 부녀자들의 규방가사는 시집살이의 민요와 지체와 품격이 다르지만 사친가라고 하는 것들이 있어 거의 같은 심정을 나타냈다. 시집살이를 견디지 못해 머리 깎고 중이 되어 친정에 가서 동냥을 하니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더라고 하는 서사민요도 비탄으로 일관한다. 유희요나 의식요도 다채롭게 마련되어 있으며, 그 나름대로 소중한 구실을 한다. 즐거움에도 서러움이 있고, 침통함이 지나치면 생기를 북돋운다. 동요는 아이들의 노래이며 놀이를 하면서 부른다. 허나 단순한 노랫말에 깊이 생각해야 할 의미가 숨어 있다고 하면서 정치적인 변동을 예견하거나 촉진하는 참요로 이해하는 경우도 이따금 있었다.
9.7.3 한시의 민요 수용
한시에서 민요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시도는 고려 후기 이래의 애민시 또는 농민시에서 거듭되었다. 강희맹의 「선농구」 연작이나 임제의 「전가원」 같은 것들은 특정 민요를 거의 그대로 옮겨다놓기까지 했다. 한시의 민요 수용은 한문소설의 설화 수용과 상통하는 의의를 가지면서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한문소설은 족보에 오르지 못할 사생아이지만, 한시는 한문학 집안의 종손이어서 지체가 달랐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문학은 민족적 자각을 가지고 민중의식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요구를 한시에서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앞장서서 실현하기로 작정한 시인들이 있었다. 시조나 가사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민요를 받아들이는 것이 한시의 우위를 지키는 길이었다.
한시가 민요시일 수 있기 위해서는 민요와 상통하는 느낌을 주어야 한다. 그럴 수 있는 방법을 최성대는 자기 나름대로 모색했다. 번거로운 구속이나 고민을 떨쳐 버리고 아름답고 환상적인 경지를 찾아 시를 동요에 접근시켰다. 「고잡곡」이 이러한 작품의 예이다. ‘메나리’의 한문 표기인 「산유화녀가」는 향랑에 관한 전승을 옮긴 작품인데, 버림받은 여인의 비극을 자세하게 다루었다는 특징이 나타난다.
이제영의 「산유화육곡」은 민요와 더욱 밀착되어 있다. 산에 가서 나무하면서 부르는 신세타령 노래 어사용을 옮겨 놓았다. 그런데 민요는 모르고 한시만 보면 말이 어색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렵고 원래의 흥취를 느낄 수 없다.
민요를 한시로 옮기는 데 그치지 않고 민요시라고 할 수 있는 한시를 짓는 데 힘쓰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홍양호는 「유민원」에서 충청도 해변의 유민들이 겪는 참상을 노래하면서 그렇게 하고자 했다.
정약용은 그릇된 세상을 비판하고 개조하는 큰 포부를 가지고 문학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생각했다. 생활의 어려움을 하소연하는 노동요의 사설을 가져와 한시가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풍조를 혁신하려고 했다. 시가 잘못된 사회를 규탄해야 마땅하다고 하면서 그 방식을 여러모로 시험하다가 마침내 민요시라야 조선시라는 것을 깨달았다. 더불어 이학규가 남긴 민요시는 더욱 다채로워 지금도 널리 구전되고 있다.
9.7.4 국문시가의 한역
시조, 가사 등의 국문시가를 한문으로 번역하는 작업은 국문시가는 온전하지 못하거나 격이 났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국문시가를 역사 기록에 올리려면 국문이 아닌 한문으로 적어야 자료가 분명해진다고 여기기도 했다. 국문시가를 짓고 즐기는 데 남다른 열의를 보인 사람이라도 한역시를 따로 마련해 문집에 수록하도록 하는 경우가 이따금 있었다. 아주 훌륭한 작품이 한문이 아닌 국문인 점을 애석하게 여겨 후대인이 한역을 하기도 했다.
정철의 가사는 작품 자체의 가치 때문에 여러 사람이 번역했다. 우리말 노래를 평가하는 근거를 제공하는 작품을 한문만 상대하려고 하는 독자에게 전달해, 어떤 점이 뛰어난지 살피도록 했다.
이형상은 시조를 한시로 옮기면서 한시 고유의 형식에 구애되지 않았다. 번역시로 시조에 대한 이해를 돕고 시조의 평가를 높이는 데 기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기고, 번역시가 그 자체로서 독자적인 의의를 가진 작품일 수 있게 하자는 목표는 설정하지 않았다. 원작의 모습을 충실하게 전하는 것이 번역시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정현석이라는 사람이 당시 유행하던 노래와 춤에 관한 자료를 집대성해 1865년에 저술한 『교방가요』에 가장 많은 시조가 한역되어 있다. 국문시가가 많아지고 인기를 더해가면서 이유와 형태가 다양한 한역이 나타났다.
국문시가를 한문으로 번역하는 것은 국문시가의 격조를 높이겠다고 하는 이유를 표면에 내세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시가 국문시가에 다가서서 필요한 자양분을 얻어 민족문학으로 다시 태어나려고 한 것이 이면에 숨겨 둔 이유였다. 표리 불일치가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문학의 한 특징이었다.
9.7.5 악부시의 성격과 양상
‘악부’는 원래 옛적 중국에서 음악을 관장하는 관청 이름인데, 그 기관에서 수집한 민간의 노래를 지칭하는 데 전용되었다. 후대에는 민간의 노래를 본떠서 창작한 시도 ‘악부’라로 일컫다가, 노래 부를 수 있는 시를 ‘악부’라고 통칭하게 되었다.
우리도 중국에서처럼 노래 부를 수 있는 악부를 마련하는 시도가 있었으나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신흠은 중국 악부의 음률을 갖추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그러다가 음률은 우리 것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지향하는 바가 달라졌다. 음률 자체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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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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