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기울어져 있는 ‘게’자형 석실분이다. 이 중 유명한 벽화고분은 사방 벽과 천장을 잘 간 편마암 큰 돌 1장으로 만들어졌는데, 벽화는 4벽에 사신도, 천장에 연화 비운무늬가 그려져 있어 고구려와의 동계열적인 연관성을 보인다.
②유물 유적
1993년에 새로 건축해서 개관한 부여박물관에 가보면 토기, 전, 와당, 장신구류, 금속기, 불상. 돌도구 등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백제문양전으로 이름난 방형문양전의 예술성은 뛰어나다. 이중 가장 뛰어난 솜씨의 상형중공전은 현재의 시멘트 블록 같은 것으로 표면에 연화문 인동문이 함께 나타나 있다. 그리고 금속기에는 구아리에서 나온 청동귀면장식판이 특이하다.
청동추두는 한강변 시대 흐름과 연결되고 있는 점이 가치가 있는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물건 하나는 일본 덴리시의 이소노카미 신궁에 일본인이 국보로 받들고 있는 칠지도가 있다. 부여박물관에서는 그 모조품을 전시하고 있는데 이 묘한 일곱 개 가지가 있는 양날칼의 명문이 금 상감으로 파여있고 그 내용이 문제가 되고 있다. 쉽게 말해서 백제가 일본을 지배했느냐, 일본인들의 주장대로 백제가 일본왕에게 상납하여 복속했느냐가 초점인데, 앞서 언급했지만 이 칼의 진실을 감추다시피 하고 있는 일본인들이 정직하게 이를 다루어 백제의 야마토 지배를 밝혀내는 날이 있기를 고대한다. 불상은 확실한 출처가 잇는 것은 10여개, 모두 부여근처에 집중되어 있다. 당시의 일본인이 경영한 부여박물관 일지를 보면 우리나라, 특히 백제 후손들이 선조의 유물들을 소홀히 다룬 기록이 있다.
어쨌든 백제불상의 아름다움은 세계적이다. 기본적으로 극히 자연주의적이며 온화한 표정은 인간미가 가득 흐르고 모두가 이른바 ‘백제의 미소’를 머금은 것으로 삼국 중 가장 특색임을 자랑하고 있다. 불상으로는 서울 뚝섬 출토의 소금 동좌불상, 부여 북리의 금동보살입상, 결정적으로 사비시대 것인 금동 청동보살입상, 서산의 운산 금동여래입상 등이 있고, 서산과 태안의 마애불은 희귀하면서도 체구가 당당하고 힘이 넘쳐 후일 신라의 수많은 마애불의 선구자로서 주목 할 만 했다.
③탑
부여시내 정림사 터에 있는 석탑은 잘 정비된 백제석탑의 정형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전북 익산군 금마면의 미륵사지 석탑은 한국 최대의 석탑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 백제석탑은 형식에 있어서 수많은 일본의 목제 사탑의 원조구실도 했다.
-미륵사지 석탑
재료는 화강암, 방형기단에 사방 3단의 다층탑, 지금 남은 동 북벽 일부 외에는 모두가 붕괴되었고 층수도 6층밖에 안되나 원래 7층탑으로 축조 되었을 것으로 본다. 현재 높이 14.2m, 특색은 각 층의 넓이가 모두 사방3간이라는 점이다.
이 탑은 그 구조로 보아 분명 목재로 수없이 만들어졌다가 지금은 자취도 볼 수 없는 목조탑을 충실히 모방해서 만들었다는 학자들의 견해를 참작해서 본다면 이 미륵탑은 국내에 흩어져 있었던 목조탑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다.
또한 이 탑은 백제탑의 이른바 시원형식으로 불려져 여러 가지 면에서 한국석탑이 표본이요 효시라고 한다.
-정림사지 석탑
역시 화강암으로 된 5층 석탑의 완전한 형태를 갖춘 백제탑이다. 한때 탑신에 새겨진 당장 유인궤의 ‘대당평백제’라고 새겨진 글로 해서 오랫동안 평제탑으로 불렸었다.
모든 구조가 미륵사탑처럼 목조 건축을 모방했다는 전문가의 의견인데 백제지역에서 볼 수 있는 백제석탑의 전형적 형식을 나타내고 있다.
3. 결론
백제의 건국과 관련해서 비류가 시조인가 온조가 시조인가에 대한 의견은 아직도 분분하다. 온조가 왕위에 올라 백제를 건국한 것은 고구려 유리왕 2년(기원전 18년)이다. 따라서 비류와 온조가 남쪽으로 내려온 기원전 19년과는 시간상의 차이가 있고, 비류가 백제를 건국하고 약 5개월간의 제위기간을 거친뒤 온조가 왕위를 물려받았다는 내용이 있다. 비류가 백제를 건국하고 왕위에 앉았다고는 하지만 국가의 기틀을 세운 것은 온조이기 때문에 백제의 시조를 온조로 보고자한다.
백제는 삼국 중에 가장먼저 한강유역을 점령하였다. 한강유역의 비옥한 토지와 전라도지역의 평야를 기반으로 고대국가로의 발전이 빨랐다. 또한, 한반도의 서쪽에 위치를 하였기 때문에 대륙의 문화수용이 빨랐다. 일찍이 중국과의 외교를 통하여 대륙의 문물과 문화, 정치제도를 수용하였다. 중국의 관제를 그대로 베낀 것이 아니라 모방을 한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베낀 것과 모방의 차이점은 없다고 말을 한다. 하지만 모방은 원래의 것을 자신에게 맞는 것으로 새로 탄생시키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보았을 때 백제는 대륙의 문물을 무조건적인 수용이 아닌, 자주권과 독립성을 지키면서 수용을 하였다고 하겠다.
백제는 중국과의 교역을 통하여 문화의 수준이 엄청난 속도로 발전했다. 물론 대륙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대가로 조공무역을 하였다. 하지만 이때의 조공무역은 군 - 신의 관계가 아닌 국가 - 국가의 관계로서 국제사회에서의 친분을 나타내어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백제의 문화는 지하의 문화라고 말을 한다. 지상에 드러난 것들은 거의 없을 정도로 그 수량은 미미하다. 하지만 백제의 문화에서 지하의 문화는 신라의 문화 못지않은 것이다.
고대국가의 백제는 동북아시아의 호랑이 고구려의 왕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고대의 초강대국 중국과도 대등한 교역을 할 정도로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고, 왜에 의학박사등 여러 학자들을 파견 할 정도의 학문적 지식과 금동대향로, 칠지도, 금동미륵반가사유상등을 만들어낼 빛나는 문화도 소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팔방미인의 백제, 동북아시아의 최강대국은 백제였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임길채2003년매몰된 백제 역사를 복원한다.범우사
김기홍1993년새롭게 쓴 한국 고대사역사 비평사
임병주1998년한권으로 읽는 삼국 왕조실록들녘
장인성2001년백제의 종교와 사회서경문화사
박현숙1999년 잊혀진 우리의 역사 백제이야기대한 교과서 (주)
고려 서적(주) 1994년 위대한 백제왕국, 다시 보는 그 역사
백제 연구소2003년 고대 동아시아와 백제서경
강인구1977년 백제 고분 연구일지사
유원재1996년 백제의 역사와 문화학연문화사
김철준1975년 백제사회와 그 문화지식산업사
②유물 유적
1993년에 새로 건축해서 개관한 부여박물관에 가보면 토기, 전, 와당, 장신구류, 금속기, 불상. 돌도구 등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백제문양전으로 이름난 방형문양전의 예술성은 뛰어나다. 이중 가장 뛰어난 솜씨의 상형중공전은 현재의 시멘트 블록 같은 것으로 표면에 연화문 인동문이 함께 나타나 있다. 그리고 금속기에는 구아리에서 나온 청동귀면장식판이 특이하다.
청동추두는 한강변 시대 흐름과 연결되고 있는 점이 가치가 있는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물건 하나는 일본 덴리시의 이소노카미 신궁에 일본인이 국보로 받들고 있는 칠지도가 있다. 부여박물관에서는 그 모조품을 전시하고 있는데 이 묘한 일곱 개 가지가 있는 양날칼의 명문이 금 상감으로 파여있고 그 내용이 문제가 되고 있다. 쉽게 말해서 백제가 일본을 지배했느냐, 일본인들의 주장대로 백제가 일본왕에게 상납하여 복속했느냐가 초점인데, 앞서 언급했지만 이 칼의 진실을 감추다시피 하고 있는 일본인들이 정직하게 이를 다루어 백제의 야마토 지배를 밝혀내는 날이 있기를 고대한다. 불상은 확실한 출처가 잇는 것은 10여개, 모두 부여근처에 집중되어 있다. 당시의 일본인이 경영한 부여박물관 일지를 보면 우리나라, 특히 백제 후손들이 선조의 유물들을 소홀히 다룬 기록이 있다.
어쨌든 백제불상의 아름다움은 세계적이다. 기본적으로 극히 자연주의적이며 온화한 표정은 인간미가 가득 흐르고 모두가 이른바 ‘백제의 미소’를 머금은 것으로 삼국 중 가장 특색임을 자랑하고 있다. 불상으로는 서울 뚝섬 출토의 소금 동좌불상, 부여 북리의 금동보살입상, 결정적으로 사비시대 것인 금동 청동보살입상, 서산의 운산 금동여래입상 등이 있고, 서산과 태안의 마애불은 희귀하면서도 체구가 당당하고 힘이 넘쳐 후일 신라의 수많은 마애불의 선구자로서 주목 할 만 했다.
③탑
부여시내 정림사 터에 있는 석탑은 잘 정비된 백제석탑의 정형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전북 익산군 금마면의 미륵사지 석탑은 한국 최대의 석탑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 백제석탑은 형식에 있어서 수많은 일본의 목제 사탑의 원조구실도 했다.
-미륵사지 석탑
재료는 화강암, 방형기단에 사방 3단의 다층탑, 지금 남은 동 북벽 일부 외에는 모두가 붕괴되었고 층수도 6층밖에 안되나 원래 7층탑으로 축조 되었을 것으로 본다. 현재 높이 14.2m, 특색은 각 층의 넓이가 모두 사방3간이라는 점이다.
이 탑은 그 구조로 보아 분명 목재로 수없이 만들어졌다가 지금은 자취도 볼 수 없는 목조탑을 충실히 모방해서 만들었다는 학자들의 견해를 참작해서 본다면 이 미륵탑은 국내에 흩어져 있었던 목조탑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다.
또한 이 탑은 백제탑의 이른바 시원형식으로 불려져 여러 가지 면에서 한국석탑이 표본이요 효시라고 한다.
-정림사지 석탑
역시 화강암으로 된 5층 석탑의 완전한 형태를 갖춘 백제탑이다. 한때 탑신에 새겨진 당장 유인궤의 ‘대당평백제’라고 새겨진 글로 해서 오랫동안 평제탑으로 불렸었다.
모든 구조가 미륵사탑처럼 목조 건축을 모방했다는 전문가의 의견인데 백제지역에서 볼 수 있는 백제석탑의 전형적 형식을 나타내고 있다.
3. 결론
백제의 건국과 관련해서 비류가 시조인가 온조가 시조인가에 대한 의견은 아직도 분분하다. 온조가 왕위에 올라 백제를 건국한 것은 고구려 유리왕 2년(기원전 18년)이다. 따라서 비류와 온조가 남쪽으로 내려온 기원전 19년과는 시간상의 차이가 있고, 비류가 백제를 건국하고 약 5개월간의 제위기간을 거친뒤 온조가 왕위를 물려받았다는 내용이 있다. 비류가 백제를 건국하고 왕위에 앉았다고는 하지만 국가의 기틀을 세운 것은 온조이기 때문에 백제의 시조를 온조로 보고자한다.
백제는 삼국 중에 가장먼저 한강유역을 점령하였다. 한강유역의 비옥한 토지와 전라도지역의 평야를 기반으로 고대국가로의 발전이 빨랐다. 또한, 한반도의 서쪽에 위치를 하였기 때문에 대륙의 문화수용이 빨랐다. 일찍이 중국과의 외교를 통하여 대륙의 문물과 문화, 정치제도를 수용하였다. 중국의 관제를 그대로 베낀 것이 아니라 모방을 한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베낀 것과 모방의 차이점은 없다고 말을 한다. 하지만 모방은 원래의 것을 자신에게 맞는 것으로 새로 탄생시키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보았을 때 백제는 대륙의 문물을 무조건적인 수용이 아닌, 자주권과 독립성을 지키면서 수용을 하였다고 하겠다.
백제는 중국과의 교역을 통하여 문화의 수준이 엄청난 속도로 발전했다. 물론 대륙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대가로 조공무역을 하였다. 하지만 이때의 조공무역은 군 - 신의 관계가 아닌 국가 - 국가의 관계로서 국제사회에서의 친분을 나타내어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백제의 문화는 지하의 문화라고 말을 한다. 지상에 드러난 것들은 거의 없을 정도로 그 수량은 미미하다. 하지만 백제의 문화에서 지하의 문화는 신라의 문화 못지않은 것이다.
고대국가의 백제는 동북아시아의 호랑이 고구려의 왕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고대의 초강대국 중국과도 대등한 교역을 할 정도로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고, 왜에 의학박사등 여러 학자들을 파견 할 정도의 학문적 지식과 금동대향로, 칠지도, 금동미륵반가사유상등을 만들어낼 빛나는 문화도 소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팔방미인의 백제, 동북아시아의 최강대국은 백제였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임길채2003년매몰된 백제 역사를 복원한다.범우사
김기홍1993년새롭게 쓴 한국 고대사역사 비평사
임병주1998년한권으로 읽는 삼국 왕조실록들녘
장인성2001년백제의 종교와 사회서경문화사
박현숙1999년 잊혀진 우리의 역사 백제이야기대한 교과서 (주)
고려 서적(주) 1994년 위대한 백제왕국, 다시 보는 그 역사
백제 연구소2003년 고대 동아시아와 백제서경
강인구1977년 백제 고분 연구일지사
유원재1996년 백제의 역사와 문화학연문화사
김철준1975년 백제사회와 그 문화지식산업사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