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카프를 아느냐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전개과정 연도별 정리]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너희가 카프를 아느냐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전개과정 연도별 정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론

<2> 본론
(1)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결성.
(2) 내용․형식논쟁.
(3) 박영희의 제1차 방향전환
(4) 제2차 방향전환
(5)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강제 해체.

<3> 결론

본문내용

실패한 이반(離反)에 의해 표면의 공허한 포말로 되어 떠 있다'
고 하여 창작 방법에 대한 비판적인 논의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신유인이 말한 창작의 고정화에 대한 비판은 송영과 한설야에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송영은 작가에게 유물론의 관점에서 대상으로서의 현실을 전체로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한설야는 계급문학은 주제의 강화와 함께 기교 편중주의의 극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존의 계급문학의 유물론적 창작방법에 대한 비판은 결국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도입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1932년 11월 소련 예술조직위원회 제1차 총회 이후 종래 KAPF 및 볼프가 걸어왔던, 창작방법에 있어서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오류로 비판한 후 제기된 창작방법이다. 이후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1934년 8월 제 1회 작가동맹 규약으로 확인되어 각국으로 소개되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작가에게 혁명 발전에 있어서 진정한 현실, 즉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현실을 묘사할 것을 요구한다.3) 김윤식, 『韓國近代文藝批評史硏究』 (일지사, 1988) p.93에서 재인용
그리고 이러한 진정하고도,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현실을 예술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공산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노동자들을 교육하는 과제와 조화를 이룰 것을 요구한다. 한국에서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1933년에 도입되었다. 백철의 『문예시평』(《조선중앙일보》1933.3.2)의 「변증법적 창작방법에서 사회주의적 레아리즘으로」라는 논술과, 안막의 「창작방법문제의 재토의를 위하여」(《동아일보》1933.11.29~12.6)라는 논문이 나왔다. 당시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사회현실을 전면적으로 예술에 반영한다는 점과 사회주의 세계관과 사상성이 강조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한 논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적극 수용을 강조하는 한효박승국 대(對)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수용에 회의적인 김남천안함광김두용으로 대립되었다. 김남천안함광은 소련과 한국은 현실이 다르므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이들은, 변증법적 창작방법도 모른 채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넘어와서는 이것을 조직의 파경 및 우익적 전향의 구실로 삼아 자기 합리화의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카프 내부에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에 반해 한효박승극은 안함광김남천의 의견을 인식부족의 미망이라 하여 프로 대중이 존재하는 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한다. 김두용은 소련에 있어서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란 다른 나라에 있어서는 변증법적 리얼리즘이라고 하여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유물변증법은 근본적 차이가 아니라고 하였다.
한국의 프로문학은 엄격히 말하면 마르크스주의 문학이라 할 수는 없다. 마르크스주의에 기초를 둔 이데올로기 문학임은 틀림없으나 1920년대의 객관적 입장에서 볼 때 자체 내의 여러 오류를 아직도 청산하지 못했다는 것이며, 창작 방법론으로서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그런 혼란의 하나이다. 김윤식, 『韓國近代文藝批評史硏究』 (일지사 ,1988) P188
그러나 1935년 카프가 해산되었음에도 1936년까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한국 문단에 논의된 것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계급문학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출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조선프로예맹의 강제 해체
1933년 11월 예맹 조직 산하의 극단 '신건설'은 레마르크의 장편소설 「서부 전선 이상 없다」를 일본인 무라야마가 각색한 것을 창립 공연 작품으로 선정하여 만주 사변을 확대하고 있는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비판을 시도하여 하였다. 이 연극의 첫 공연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자 일본은 전주 공연 선전 전단 문구의 불온성을 빌미로 극단원과 조선프로예맹의 모든 관련자들을 체포하였다. 이것이 제 2차 검거 사건에 해당하는 '신건설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이해 조사받은 인물이 거의 백여 명에 이르렀으며, 조선프로예맹의 문인 38명이 모두 구금되었다. 또한 판결에서 일본 총독부는 조선프로예맹의 조직 성격을 정치적인 결사체로 규정하고 치안 유지법을 적용하였다. 이 판단은 예맹 조직이 공산주의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설된 조직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19인의 카프 문사에게 징역형과 함께 집행 유예 3년을 각각 언도하였다.
일본 경찰은 '신건설 사건'을 빌미로 조선프로예맹의 해체를 요구하였으며 1935년 5월 20일 일본 경찰 당국에 의해 조선프로예맹이 강제 해체되었다. 또한 강제 해체 이 후 사상범에 대한 보호 관리를 목적으로 사상범보호관찰법을 제정함으로써 전향을 강요하게 된다. 그리하여 박영희, 백철을 비롯한 상당수의 문인이 사상을 전향하게 되고 친일 행각을 벌이는 결과를 맞게 된다.
<3> 결론
우리 나라의 계급문학은 충실한 이론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지 못했다는데 한계가 있다. 계급문학의 이념 역시 외국의 사상을 받아들인 것인데, 그것이 일본을 한 번 거쳐서 직수입 되어 들어온 것이었다. 김기진은 이상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계급문학을 주창하였지만 계급문학은 무산계급의 저항과 자본주의 반대가 주 목적이 되어야 한다. 박영희 역시 초기에는 목적의식론을 강조하고, 예술가와 예술작품은 계급의식의 커다란 톱니바퀴의 하나라고 주장하다가 일관되게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지 않고 나중에는 문학의 부차적 임무를 강조하며 사상을 전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한 계급문학운동을 통한 일제에 대한 저항이 부족했고 조직 내에서의 분열로 인하여 건설적인 투쟁과 그 투쟁을 위한 문학을 펼치지 못했음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러한 탄탄하지 못한 성격으로 인해 조직이 쉽게 와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볼 문제
1. 권영민은 계급문학운동을 설명함에 있어 일본으로 유입되어 온 사상을 자세히 언급하지 않고 있다. 우리의 계급문학운동은 알다시피 일본에서 바로 직수입 되어온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일본 상황과의 고려 속에서 같이 연구되어야 한다.
2. 전향문학이라 불리우는 친일적 문학을 어떻게 볼 것인지 , 박영희는 어찌하여 자신의 사상을 완전히 극과 극으로 바꾸어 가면서 문학활동을 펼치게 된 것인지 논의해 볼 여지가 있다.
  • 가격1,4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12.10.10
  • 저작시기2014.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71515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