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해방 이후 1947년 3.1시위 직전까지의 제주도 상황과 조선공산당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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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8.15 해방 이후 1947년 3.1시위 직전까지의 제주도 상황과 조선공산당 활동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8․15 해방 - 1947년 3․1시위 직전의 제주도 정치․사회 상황
2. 조선공산당 제주도위원회의 조직과 활동

본문내용

시에 좌익의 승리가 전도, 나아가 전국에 확산되는 선전효과를 거두자는 데 있었다. 그래서 즉각적인 거부선언이 당연한 것이었지만, 제주도당은 2, 3일의 시간여유를 두어 선전효과를 거두는 것과 중앙에 제주도당의 진의를 해명함과 동시에 그자리에서 당선거부를 발표하는 이중의 효과를 기대하였다. 이 입법의원 참가 목적은 일정정도 성과를 거두었지만, 11월 4일의 입법의원 개원일이 연기되는 바람에 두 사람의 상경이 늦어졌기 때문에 좌익도 입의에 참가했다는 미군정과 우익측의 선전을 가져오는 역효과도 초래하였다.
그리고 당중앙의 거부방침에도 불구하고 입법의원 참가라는 제주도당의 결정은 조직규율상 항명에 가까운 것으로 일종의 반당적인 행위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제주도당은 입의 참가는 입법의원의 창설을 반대한다는 근본원칙에 위배됨이 없이 다만 선거투쟁에 국한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앙 보이콧트와 별반 다름이 없다고 인식하였다.
이는 제주도당이 중앙당과의 관계에서 일정정도 자율성을 유지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 이러한 관계는 4·3봉기 때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조직의 정식계통으로 볼 때 이것은 당조직의 이상을 뜻하는 것으로 중앙이 제주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읍당의 결정은 형식상 적어도 도당의 결정을 받고 도당을 통해 하달되어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읍당에서 면당으로 횡적 연락을 했다는 것은 당시 제주도당이 미약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당시 제주도당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중앙의 통제를 일정정도 벗어났다는 것은 제주도당이 4·3봉기라는 무장투쟁을 독자적으로 결정하게 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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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10.10
  • 저작시기2012.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7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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