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an, 1992, 11-38쪽 부분번역)
<성 베네딕도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우리안의 사막/ 토마스 머튼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 비현실성에 빠지는 것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는데,
그 까닭은 우리의 삶은 우리 외부의 실재와
초월적인 실재(實在)와의 생명력 있는 관계에 의해
우리 안에서 지속되고 성장하기 때문이다.
우리 삶이 비현실에 의존할 때 그 삶은 분명히 고갈되어 죽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삶을 살지 말아야 한다.
이 무익한 죽음을, 우리를 새로운 삶에로 들어가게 해주는
참되고 풍요롭고 희생적인 죽음이라고 오인하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은 없다.
우리를 참 삶으로 이끌어 주는 죽음은 현실의 도피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완전한 선물로 내어 놓는 것이며,
이는 곧 현실에의 전적인 헌신을 의미한다.
우리가 창조된 사물들을 다만 우리 자신의 이기적인 이해관계에만 관련시켜 바라봄으로써 오인되는, 환영(幻影)으로 가득 찬 거짓 현실을 포기할 때,
우리를 참 삶에로 이어 주는 죽음이 비로서 시작된다.
우리는 피조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서 피조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봄으로써
피조물을 포기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하는 동안에 우리는 피조물들의 실체와 실상과 진실을 꿰뚫어 보게 되는데,
피조물의 이러한 본질은 우리가 피조물들을 우리 자신의 밖에 놓고 한 걸음 물러서서
올바르게 바라볼 때만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사물들에 집착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사물들을 올바로 바라볼 수 있다.
우리가 사물들을 놓아 줄 때 우리는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평가하기 시작한다.
그때에 비로소 우리는 그것들 안에서 하나님을 보기 시작할 수 있다.
사물들 안에서 하나님을 하나님을 발견할 때
우리는 어둠 속에서 어려운 관상의 길을 나설 수 있게 되는데,
이 길의 끝에서 우리는 하나님 안의 사물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막의 교부들은, 사막이 인간에게 전혀 가치가 없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막은 하나님 보시기에 지극히 가치 있는 것으로서 창조되었다고 믿었다.
광야는 인간에게 아무것도 제공해 주지 않기 때문에 인간이 결코 사용할 수 없는 땅이었다.
거기에는 인간이 흥미를 둘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고, 인간이 개척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광야는 선택된 민족이 오직 하나님의 보살핌만을 받으며 40년 동안 방황한 장소였다.
이스라엘 민족이 약속된 땅을 향하여 바로 여행했더라면 몇 달 만에 그곳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고,
또 항상, 광야에서의 시간들을 하나님하고서만 보낸 삶의 목가적인 시절로 회상하도록 계획하셨다.
사막은 다만 그 자체로 존재하기 위해 창조되었지,
인간이 다른 어떤 것으로 변형시키라고 창조되지는 않았다.
산과 바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사막은 그 자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
즉 고독하고 가난하며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피조물,
그 자신과 창조주 사이에 어떤 중요한 계획도 끌어들이지 않는 피조물의 필연적인 주거지이다.
이것은 이론적으로 맞는 말이다. 그러나 고려해야 할 또다른 요소가 있다.
첫째로 사막은 광란의 장소라는 점이다.
둘째로 사막은 '이집트 북부의 광야'로 쫓겨나
'목이 타는 메마른 지역에서 방황하는' 악마의 도피처이다.
갈증은 인간을 미치게 만드는데,
악마는 바로 우월성 안에 안주하여 다른 모든 것들을 배척했기 때문에
잃어버린 자신의 우월성에 대한 일종의 갈증으로 미쳐 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하여 사막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미치지 않도록,
또 공허와 분노로 가득 찬 불모의 낙원에 사는 악마의 종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의 사막을 보라. 어떠한가?
오늘날의 사막은 바로 끔찍한 피조물이 새로이 탄생하는 곳으로서
하나님이 축복하신 것을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파괴하려고 하는 힘의 시험 장소이다.
인간이 가장 위대한 과학적 업적을 이룩한 금세기에 광야는 마침내 진면목을 드러내고 있다.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사막에서 자신의 힘으로 살 수 있다.
인간은 그곳에 고립과 실험과 악덕으로 보호받는 환상의 도시들을 건설할 수 있다.
사막에서 하룻밤 사이에 솟아나는 번쩍거리는 도시들은,
이제는 더 이상 세상을 평화로 밝혀주려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나님 도시의 모상(模像)이 아니다.
이 도시들은 그 옛날, 인간이 '그 이름을 펼쳐 하늘에까지 닿게 하기 위해'
시날 사막에 쌓아 올렸던 거대한 바벨탑과 유사하지도 않다.
그러나 이 도시들은 광야의 얼굴에 나타난 악마의 영악하고 야비한 미소이며,
저마다 형제를 염탐하는 비밀로 가득 찬 도시들이다.
이 도시의 혈맥 속에서는 돈이 인공의 피처럼 흘러가고,
이 도시의 자궁에서는 결정적이고도 엄청난 파괴 도구가 태어날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도시들의 성장을 보면서도 우리 자신의 마음을 정화시킬
그 어떤 일을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인간이 돈과 기계를 사막으로 옮겨 가 살면서,
그리스도께서 하셨듯이 악마와 싸우지 않고,
오히려 권력과 부를 주겠다는 악마의 약속을 믿고 그의 천사 같은 지혜를 예찬한다면,
사막 자체는 어디로든지 다른 곳으로 옮겨 갈 것이다.
모든 곳이 사막이다.
모든 곳이 인간이 속죄하고 악마와 싸우며 하나님의 은총으로
마음을 정화시키는 고독의 터전이다.
사막은 절망의 고향이다.
이제 그 절망은 모든 곳에 있다.
우리의 내적인 고독이 패배를 수용하는 데 있다고 생각하지 말자.
우리가 무언중에 패배를 동의한다면 우리는 그 어느 것에서도 벗아 날 수 없다.
절망은 바닥없는 심연이다.
절망에 동의하고, 또 동의했다는 것을 잊으려고 노력함으로써 절망을 막으려고 생각하지 말라.
그렇게 한다면 우리의 사막은 절망에 직면해서도 결코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십자가에 대한 희망으로 절망을 극복하는 것이며, 끊임없이 절망과 싸우는 것이다.
그 싸움이 곧 우리의 광야다.
우리가 용감하게 그 투쟁에 맞선다면 우리는 우리 곁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발견할 것이다.
그 투쟁에 직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그분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성 베네딕도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우리안의 사막/ 토마스 머튼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 비현실성에 빠지는 것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는데,
그 까닭은 우리의 삶은 우리 외부의 실재와
초월적인 실재(實在)와의 생명력 있는 관계에 의해
우리 안에서 지속되고 성장하기 때문이다.
우리 삶이 비현실에 의존할 때 그 삶은 분명히 고갈되어 죽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삶을 살지 말아야 한다.
이 무익한 죽음을, 우리를 새로운 삶에로 들어가게 해주는
참되고 풍요롭고 희생적인 죽음이라고 오인하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은 없다.
우리를 참 삶으로 이끌어 주는 죽음은 현실의 도피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완전한 선물로 내어 놓는 것이며,
이는 곧 현실에의 전적인 헌신을 의미한다.
우리가 창조된 사물들을 다만 우리 자신의 이기적인 이해관계에만 관련시켜 바라봄으로써 오인되는, 환영(幻影)으로 가득 찬 거짓 현실을 포기할 때,
우리를 참 삶에로 이어 주는 죽음이 비로서 시작된다.
우리는 피조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서 피조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봄으로써
피조물을 포기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하는 동안에 우리는 피조물들의 실체와 실상과 진실을 꿰뚫어 보게 되는데,
피조물의 이러한 본질은 우리가 피조물들을 우리 자신의 밖에 놓고 한 걸음 물러서서
올바르게 바라볼 때만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사물들에 집착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사물들을 올바로 바라볼 수 있다.
우리가 사물들을 놓아 줄 때 우리는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평가하기 시작한다.
그때에 비로소 우리는 그것들 안에서 하나님을 보기 시작할 수 있다.
사물들 안에서 하나님을 하나님을 발견할 때
우리는 어둠 속에서 어려운 관상의 길을 나설 수 있게 되는데,
이 길의 끝에서 우리는 하나님 안의 사물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막의 교부들은, 사막이 인간에게 전혀 가치가 없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막은 하나님 보시기에 지극히 가치 있는 것으로서 창조되었다고 믿었다.
광야는 인간에게 아무것도 제공해 주지 않기 때문에 인간이 결코 사용할 수 없는 땅이었다.
거기에는 인간이 흥미를 둘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고, 인간이 개척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광야는 선택된 민족이 오직 하나님의 보살핌만을 받으며 40년 동안 방황한 장소였다.
이스라엘 민족이 약속된 땅을 향하여 바로 여행했더라면 몇 달 만에 그곳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고,
또 항상, 광야에서의 시간들을 하나님하고서만 보낸 삶의 목가적인 시절로 회상하도록 계획하셨다.
사막은 다만 그 자체로 존재하기 위해 창조되었지,
인간이 다른 어떤 것으로 변형시키라고 창조되지는 않았다.
산과 바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사막은 그 자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
즉 고독하고 가난하며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피조물,
그 자신과 창조주 사이에 어떤 중요한 계획도 끌어들이지 않는 피조물의 필연적인 주거지이다.
이것은 이론적으로 맞는 말이다. 그러나 고려해야 할 또다른 요소가 있다.
첫째로 사막은 광란의 장소라는 점이다.
둘째로 사막은 '이집트 북부의 광야'로 쫓겨나
'목이 타는 메마른 지역에서 방황하는' 악마의 도피처이다.
갈증은 인간을 미치게 만드는데,
악마는 바로 우월성 안에 안주하여 다른 모든 것들을 배척했기 때문에
잃어버린 자신의 우월성에 대한 일종의 갈증으로 미쳐 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하여 사막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미치지 않도록,
또 공허와 분노로 가득 찬 불모의 낙원에 사는 악마의 종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의 사막을 보라. 어떠한가?
오늘날의 사막은 바로 끔찍한 피조물이 새로이 탄생하는 곳으로서
하나님이 축복하신 것을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파괴하려고 하는 힘의 시험 장소이다.
인간이 가장 위대한 과학적 업적을 이룩한 금세기에 광야는 마침내 진면목을 드러내고 있다.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사막에서 자신의 힘으로 살 수 있다.
인간은 그곳에 고립과 실험과 악덕으로 보호받는 환상의 도시들을 건설할 수 있다.
사막에서 하룻밤 사이에 솟아나는 번쩍거리는 도시들은,
이제는 더 이상 세상을 평화로 밝혀주려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나님 도시의 모상(模像)이 아니다.
이 도시들은 그 옛날, 인간이 '그 이름을 펼쳐 하늘에까지 닿게 하기 위해'
시날 사막에 쌓아 올렸던 거대한 바벨탑과 유사하지도 않다.
그러나 이 도시들은 광야의 얼굴에 나타난 악마의 영악하고 야비한 미소이며,
저마다 형제를 염탐하는 비밀로 가득 찬 도시들이다.
이 도시의 혈맥 속에서는 돈이 인공의 피처럼 흘러가고,
이 도시의 자궁에서는 결정적이고도 엄청난 파괴 도구가 태어날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도시들의 성장을 보면서도 우리 자신의 마음을 정화시킬
그 어떤 일을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인간이 돈과 기계를 사막으로 옮겨 가 살면서,
그리스도께서 하셨듯이 악마와 싸우지 않고,
오히려 권력과 부를 주겠다는 악마의 약속을 믿고 그의 천사 같은 지혜를 예찬한다면,
사막 자체는 어디로든지 다른 곳으로 옮겨 갈 것이다.
모든 곳이 사막이다.
모든 곳이 인간이 속죄하고 악마와 싸우며 하나님의 은총으로
마음을 정화시키는 고독의 터전이다.
사막은 절망의 고향이다.
이제 그 절망은 모든 곳에 있다.
우리의 내적인 고독이 패배를 수용하는 데 있다고 생각하지 말자.
우리가 무언중에 패배를 동의한다면 우리는 그 어느 것에서도 벗아 날 수 없다.
절망은 바닥없는 심연이다.
절망에 동의하고, 또 동의했다는 것을 잊으려고 노력함으로써 절망을 막으려고 생각하지 말라.
그렇게 한다면 우리의 사막은 절망에 직면해서도 결코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십자가에 대한 희망으로 절망을 극복하는 것이며, 끊임없이 절망과 싸우는 것이다.
그 싸움이 곧 우리의 광야다.
우리가 용감하게 그 투쟁에 맞선다면 우리는 우리 곁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발견할 것이다.
그 투쟁에 직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그분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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