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역사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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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구려 역사의 전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3page
고구려 역사의 전개 
◎ 성립과 발전
◎ 집권적 국가체제의 성립과 대외팽창
◎ 후기의 변동과 멸망

4~25page

기원1. 고구려 민족의 기원
기원2. 고구려 부족연맹체의 성립과 발전

초기1. 고대국가로의 성립
초기2. 고대국가로의 발전
초기3. 한군현과의 투쟁
초기4. 초기 정복활동

중기1. 후한과의 투쟁1(1세기~2세기초)
중기2. 후한과의 투쟁2(2세기 초~3세기)
중기3. 위와의 투쟁
중기4. 연과의 투쟁
전성기1. 광개토대왕기
전성기2. 장수왕기

후기1. 수문제의 침입
후기2. 수양제의 침입
후기3. 당 태종의 침입(안시성전투)
후기4. 나당연합군과의 전쟁과 멸망

본문내용

주시켰다. 이는 당시 고구려 말기의 인구 69만 7천호의 약 20분의 1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고구려 사회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망동이었다. 당나라의 이러한 지배정책은 곧바로 고구려 유민들의 강력한 저항을 촉발하게 하였다.
669년 검모잠 일파의 부흥운동이 일어났으며, 이어 안시성 등지에서 봉기가 잇달았다. 한편, 신라는 당나라에 대한 공세를 취하면서 유민들의 부흥운동을 지원하였다. 그리하여 670년에는 신라장군 설오유와 고구려장군 고연무가 이끄는 연합군이 압록강을 넘어 작전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당나라는 이에 대처해 수차례 원정군을 투입하였다. 고구려 유민의 부흥운동은 671년 안시성이 함락되고, 672년 부흥군이 패배하자 평양부근일대의 고구려유민이 신라로 넘어감으로써 좌절되었다. 그 뒤 당나라군과의 전쟁은 신라군에 의해 주도되었다. 한편 요동과 그밖의 옛 고구려영역에서 상당수의 유민들이 신라로 넘어와 합류하였다. 그리고 유민들 중 일부는 몽고고원의 돌궐 영내로 이주하여 몇 개의 집단을 형성해 돌궐 가한의 통치하에서 자치적인 단위를 형성하였다.
고구려 유민집단은 676년 이후 당나라가 요동지역에 산재한 고구려 유민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보장왕을 요동주도독조선왕으로 삼아 고구려 유민들을 다스리게 하였으나, 요동에 돌아온 보장왕은 곧 속말말갈과 연결하여 반당운동을 획책하였다. 681년 보장왕을 중심으로 하는 일단의 부흥운동이 있었으나 당에게 탄로나서 다시 당에 소환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지속적인 고구려 유민들의 항쟁에 위협을 느낀 당나라가 다시 대규모로 유민을 당나라 내지에 이사시켰다. 한편으로는 당나라에 저항한 유민들이 계속 신라와 동부만주, 그리고 돌궐로 이주해갔다. 그 결과 요동지역에 거주하는 유민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게 되었다.
한편, 당나라의 영주부근에 강제로 이주되어 있던 유민집단은 696년 거란족의 반란에 따른 혼란을 틈타 일부 말갈족 집단과 함께 동으로 탈주하여 동부만주에 국가를 건설하였다. 이에 만주지역에 흩어져 있던 고구려유민들은 급속히 그 아래로 규합되었다. 이것이 곧 나중에 발해가 된다. 고구려유민은 발해의 중심세력을 형성하였다. 중국 내지와 돌궐방면의 유민은 점차 그 지역 주민들 사이에 흡수, 동화되었다. 요동에 남아 있던 고구려유민은 안녹산의 난 이후 일시 소고구려국을 세워 자립하였으나, 곧 이어 9세기 전반 발해에 병합되었다.
수백년 동안 한반도와 만주지역에 걸쳐 강대한 국가와 찬란한 문화를 건설하였던 고구려의 자취는 그 유민들과 함께 신라와 발해로 나뉘어 계승되었다.
고구려의 맥2. 당 세력의 축출, 발해로의 계승
고구려의 멸망으로 나라를 잃은 고구려 유민들은 요동 지방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항쟁을 벌여 나갔다. 이에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을 막아 보려는 갖가지 회유책과 대책을 세우느라 고심했다. 그러던 중 696년 요서 지방에서 거란족 이진충의 난이 일어나 당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이러한 혼란을 절호의 기회로 생각한 고구려의 장군 출신이었던 대조영은 말갈족의 지도자 걸사비우와 더불어 유민들을 이끌고 당의 통치를 벗어나려고 멀리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당은 대조영과 걸사비우의 이러한 움직임을 알고 곧 추격군을 보내 대조영과 걸사비우를 잡게 하였다.
당의 추격군을 피해 오던 중 말갈족의 지도자 걸사비우는 당군에게 죽음을 당하고 대조영은 당의 추격을 따돌리고 말갈족까지 인솔하여 길림성의 돈화현 동모산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웠다. 이것이 곧 발해의 성립이다. 처음에 발해는 "진"이라 국호를 정하였으나 훗날 발해라 개칭하였다.
716년 당나라와의 평화적 외교 기틀을 확립한 발해는 강력한 국가 건설을 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719년 대조영이 죽으면서 그의 큰 아들 대무예가 왕위를 물려 받았다. 그가 곧 발해의 2대 왕인 무왕이다. 무왕은 즉위 후 건원을 인안이라 하고 독립국가의 기틀을 더욱 다지기 위해 영토 확장에 주력하였다. 무왕은 주위의 여러 부족을 복속시키고 멀리 연해주 남단까지 영토를 확장하면서 동해로는 일본과의 교통로를 열어 나갔다. 726년 당나라와 흑수말갈문제로 다시 대립하게 되면서 발해는 15대 220여 년간 당과 대립과 화해를 교체하는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발해는 2대 무왕과 3대 문왕 대에 국가의 기초를 확립하였고, 10대 선왕 대에 영토와 국력을 가장 강대하게 만들었다. 이 시기에 발해는 `5경(京) 15부(府) 62주(州)'로 전국을 나누어 통치하였고, 당서(唐書) 에서는 이때 발해를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하였다. 그러나 발해는 후기에 가서 지역적 고립으로 오는 안일함에 빠져 중원에 적이 성장하고 있음을 파악하지 못하였다. 10세기 초에 거란족의 야율아보기가 거란족을 통합하여 자신들의 국가를 수립하였다. 야율아보기는 중국본토 경략에 앞서 후방의 우환을 없애기 위하여 927년 발해를 침략하게 된다. 거란은 발해가 거란족을 막기 위해 구축해 놓은 부여성을 점령하고 불과 20일 만에 발해의 마지막 왕인 대인전의 항복을 받게 된다. 이로써 발해는 제대로 방비하지 못하고 나라를 잃게 된다. 이후 발해의 유민들은 신라와 고려에 편입하게 된다.
한편 발해가 고구려의 후예임을 밝히는 근거는 역사 문헌에 자주 등장하는데, 그 예로 조선시대의 실학자인 유득공이 1784년에 집필한 발해고에서는 발해의 무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의 내용에 "고구려의 옛터를 회복한 것으로 부여의 유속이 있다.(復高麗之舊居 有扶餘之遺俗)"고 나타나는데 이는 발해가 고구려의 후예임을 암시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무왕의 아들이었던 문왕도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스스로 고구려의 국왕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발해의 역사적 규명은 고구려의 명맥을 이은 발해가 만주를 주무대로 활동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실학자 유득공이 신라와 발해를 "남북국시대"로 명명했던 사실에 주목할 필요도 있다.
한편 유등공 이후로 한치윤, 홍석주, 정약용, 김정호 등에 의해 이러한 발해사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가 되었고 오늘에 와서는 사학자들의 연구와 함께 일반인에게도 발해가 우리 민족이 만주를 경략했었음을 상기시키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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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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