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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로서의 온전한 율법의 부재.
만인 제사장 제를 주창하려면 마땅히 제사장이 관할하는 '법' 이 있어야 합니다. 제사장이란 하나님의 율법을 관장하는 직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는 그들이 만든 '교리'는 있을지언정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이란 법을 주관하는 사람인데 법이 없으니 제사장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인 제사장제' 는 신약의 서신내용을 인용하여 만들어낸 것이지만 논리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학문적으로는 '가설'도 될 수 없는 상태입니다. 현재 신학의 범위 안에서 만인 제사장제의 성경적 논증은 불가능합니다. 이 사실을 신약 성경의 내용으로 간단히 확인시켜 드리겠습니다.
성경배열 순서대로입니다.
요한복음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 복음서의 가르침은 모두 비사, 즉 비유로 되어 있습니다. 복음서 내용은 밝히 이르고 있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
요한복음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 요한복음은 복음서의 마지막 책인데 감당치 못하므로 다 이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 사도행전 초반의 부활이후 첫 전도 때 베드로가 한말입니다. '보고 듣는 이것' 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것'의 실체가 요한 계시록 이전의 서신에 있느냐하면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 온전한 것이 아직 안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 에베소서의 기록은 '비밀'을 '대강' 기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야고보서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 야고보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이렇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온전한 율법, 즉 불완전한 모세율법이 아닌 또 다른 '들여다보는' 율법이 있다고 말하고 있고 그것을 보는 것이 곧 행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이 들여다볼 수 있는 온전한 율법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서신에는 온전한 것의 '예고'나 혹은 '이미 있는 것'에 대한 '간접적' 서술만 있을 뿐이며 이외에도 그 실체가 '없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는 문구는 매우 많습니다.
그러면 결국 이 그리스도가 모세의 율법을 완전하게 한 것의 실체인 완성된 '들여다보는 율법'이 있기는 있는데 신약 성경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학 안에는 이'들여다보는 율법'이 분명히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학은 그리스도의 '공의 실현'이라는 논리를 핵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신학에는 '공의실현논리'는 있는데 그 실현의'과정'에 관한 논리만 있고 '결과'에 대한 논증은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대체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들이 무 논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무속적인 주장들입니다.
"십자가로 다 이루어 졌으니 그것을 믿으면 구원 받는다",
"하나님은 사랑이니 사랑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다"
등등의 무 논리적 주장들이 공의 실현의 '결과' 인 '온전한 율법'이 없다는 사실을 가리는 수단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결과'없는 과정 논리는 종국에 '그냥 믿어'라는 결론을 도출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신경정신과 적으로 문제있는 환상, 환청과 같은 무속적 신비주의에 힘을 실어 주게 되었고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에 끌리는 인생들의 마음은 그리로 향해 갔던 것입니다.
만인 제사장 제를 주창하려면 마땅히 제사장이 관할하는 '법' 이 있어야 합니다. 제사장이란 하나님의 율법을 관장하는 직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는 그들이 만든 '교리'는 있을지언정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이란 법을 주관하는 사람인데 법이 없으니 제사장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인 제사장제' 는 신약의 서신내용을 인용하여 만들어낸 것이지만 논리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학문적으로는 '가설'도 될 수 없는 상태입니다. 현재 신학의 범위 안에서 만인 제사장제의 성경적 논증은 불가능합니다. 이 사실을 신약 성경의 내용으로 간단히 확인시켜 드리겠습니다.
성경배열 순서대로입니다.
요한복음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 복음서의 가르침은 모두 비사, 즉 비유로 되어 있습니다. 복음서 내용은 밝히 이르고 있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
요한복음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 요한복음은 복음서의 마지막 책인데 감당치 못하므로 다 이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 사도행전 초반의 부활이후 첫 전도 때 베드로가 한말입니다. '보고 듣는 이것' 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것'의 실체가 요한 계시록 이전의 서신에 있느냐하면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 온전한 것이 아직 안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 에베소서의 기록은 '비밀'을 '대강' 기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야고보서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 야고보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이렇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온전한 율법, 즉 불완전한 모세율법이 아닌 또 다른 '들여다보는' 율법이 있다고 말하고 있고 그것을 보는 것이 곧 행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이 들여다볼 수 있는 온전한 율법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서신에는 온전한 것의 '예고'나 혹은 '이미 있는 것'에 대한 '간접적' 서술만 있을 뿐이며 이외에도 그 실체가 '없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는 문구는 매우 많습니다.
그러면 결국 이 그리스도가 모세의 율법을 완전하게 한 것의 실체인 완성된 '들여다보는 율법'이 있기는 있는데 신약 성경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학 안에는 이'들여다보는 율법'이 분명히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학은 그리스도의 '공의 실현'이라는 논리를 핵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신학에는 '공의실현논리'는 있는데 그 실현의'과정'에 관한 논리만 있고 '결과'에 대한 논증은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대체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들이 무 논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무속적인 주장들입니다.
"십자가로 다 이루어 졌으니 그것을 믿으면 구원 받는다",
"하나님은 사랑이니 사랑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다"
등등의 무 논리적 주장들이 공의 실현의 '결과' 인 '온전한 율법'이 없다는 사실을 가리는 수단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결과'없는 과정 논리는 종국에 '그냥 믿어'라는 결론을 도출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신경정신과 적으로 문제있는 환상, 환청과 같은 무속적 신비주의에 힘을 실어 주게 되었고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에 끌리는 인생들의 마음은 그리로 향해 갔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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