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대략적인 목차
본문내용
사학위 논문에서 이 방면에 대한 지적들을 여기에 인용 소개해 보겠습니다. 1) '호모우시우스의 정확한 의미:'세 위격 한 본질(실체)'이라는 소위 정통 삼위일체의 명제에서 '본질(실체)의 단일성'을 가리키는 '호모우시우스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서 아직도 학자들 간에 이견이 있습니다. 김석환 박사는 '호모우시우스'가 '숫자적인 단일성'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유적 단일성'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지금도 개혁주의 교회 안에서 끊이지 않고 있다고 하면서 '반틸'과 '고든클락'의 논박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위 김석환, 146-147, 344-345쪽). 2) 신격(Godhead)과 위격들, 신격과 본질간의 관계 : 그 동안의 삼위일체 연구는 주로 위격과 본질(실체)의 구별, 관계설정, 개념정의 등에 집중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골2:9이 말하는 한 신격(데오테스)과 세위격들 간의 관계, 본질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거의 전무합니다. 심지어 닛사의 그레고리가 구분한 신성과 신격의 용어구별 조차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생소합니다(241-242쪽). 3) 삼위일체 관련용어들의 확정 : 김석환 박사는 자신의 논문에서 '우시아'를 본질이나 본성이 아니라 '실체'로 번역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위 책, 28-29쪽). 또한 더 나아가서 히1:3의 휘포스타시스를 '본체'라고 번역했고 이를 장로교 총회헌법도 따라 사용한 점, Godhead 를 기준 없이 신성 또는 신격으로 혼용한 점, '한 하나님'을 '동일한 유개념'으로 파악하는 입장등이 문제가 있다고지적합니다(340-341쪽). 이분은 대안으로서 한국교회가 '삼위일체 전문용어의 번역에 관한 원칙'을 정하고 '전문심사위원회'를 구성하여 구체적인 검토작업을 펼칠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위에다가 저는 다음 두 가지를 추가하고 싶습니다. 4) 본질적인 삼위일체와 경륜적인 삼위일체 : 이종성 박사는 거의 대부분의 초대교부들이 이 두 방면의 삼위일체를 함께 지지했으며, 둘 중 하나만을 강조하고 다른 하나를 무시하면 이단적인 견해가 될 위험성이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이종성, 삼위이체론, 643쪽).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최삼경 목사나 이인규님은 똑같이 이러한 두 방면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삼위일체 개념에 익숙하지 않으십니다. 다행히 한국개혁신학회가 소개하고 있는 이승구님의 소논문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관계'에 대한 개혁주의적인 입장에 대한 글은 ( http://jsrhee.hihome.com/Import!edFiles/dogmatics.htm )은 이 방면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5) 성경본문중심의 삼위일체 해석 전통 수립: 지금까지 신학교육은 삼위일체에 대한 조직신학적인 접근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것은 전반적인 뼈대를 세워준다는 점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공헌을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성경본문에서 그 신학체계가 어떻게 대입되고 해석되는지에 대한 연구는 한국교계에 크게 미흡합니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윗트니스 리의 삼위일체 접근 방식은 철저하게 성경 본문 중심입니다. 그의 삼위일체론 연구인 신약의 결론-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책자 약 1900 쪽은 거의 대부분이 성경본문에 대한 해설로 이뤄져 있습니다. 물론 정통 교부들의 관점을 포함하여 교회역사상 논의되어 왔던 제반 삼위일체론 관련 학설들을 감안한 해석입니다. 삼위일체 토론을 마무리하면서 저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겠습니다.성경엔 삼위을 먹고 마시라는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나를 먹으라'(요6:48, 57)'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내게로 와서 마시라...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며 말씀하신 것이라'(요7:37, 39)' '우리가 ...한 몸이 되었고...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12:13) 등이 그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마치 우리 앞에 차려진 밥상과 같습니다. 차려진 음식을 알고 음미하며 먹으면 제일 좋습니다. 그러나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음식을 분석해서 그 모든 것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정작 음식을 먹지는 않는다면 그것은 제일 어리석은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양으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도록 이 땅에 오셨고(요10:10) 또 생명주는 영이 되셨습니다(고전15:45). 이 분을 우리는 날마다 주관적으로 체험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매일의 생활에서 자신이 부인되고 생명되신 그리스도를 살아야 합니다(갈2:20). 이것이 삼위일체를 추구하고 토론하는 목적입니다.
우리 주님은 양으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도록 이 땅에 오셨고(요10:10) 또 생명주는 영이 되셨습니다(고전15:45). 이 분을 우리는 날마다 주관적으로 체험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매일의 생활에서 자신이 부인되고 생명되신 그리스도를 살아야 합니다(갈2:20). 이것이 삼위일체를 추구하고 토론하는 목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