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투스도 하나님의 품으로 갔다.
3. 제3시기
어거스틴은 고향에 돌아와 기독교회의 신앙운동을 위하여 수도원을 세울 계획을 하였으며 남은생에 책을 쓰는일과 힙포의 주교로 헌신하는 시기였다. 그는 고향 타가스테에 금욕주의자들의 작은 공통체를 만들어 남은 생애를 보냈다,
어거스틴은 387년 그의 나이 34세때 밀라노의 목회자 암부로시우스에게 세례를 받고 수도원 건립을 위하여 힙포에 가 392년 힙포의 장로가 되었으며 395년에는 발레리우스가 죽자 그의 뒤를이어 주교가 되었다. 이때 어거스틴은 주교직의 계승은 그의 또다른 생애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소명감을 깨닫고 주교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였다. 그는 설교하는 일과 성경의 해석 및 저술활동외에도 성직자를 위한 수도원을 설립하여 교역자 양성에 힘썼다. 또한 그는 400년경에 자신의 삶에 체험과 구원받은자로서의 찬양시인 참회록 참회록을 쓰게 되었다. 그가 참회록을 쓰게된 동기는 당시 사회에서 어거스틴을 성자요 교부중의 교부라고 위대하게 잃컬어지던 자신을 바로 설명하기 위하여 참회록을 쓰게된 동기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여러분들에게 위대하ㅣ게 보일지 모르지만 나도 죄인중에 죄인이었음을 고맥하며 자신이 있데 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은혜때문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하여 기록하게된것이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저서는 신의 도성이다. 이 책은 어거스틴의 필생에 대작으로서 413년에 시작하여 426년에 완성하였다. 이 책은 당시 지적 도전에 답하는 하나의 역사철학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자들의 변증서라고도 할수 있다.
당시 로마인들의 마음에는 이러한 사상들이 있었다. 옛날 로마의 신들을 섬길 때는 모든것이 평안하던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뒤에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는데 그 것은 로마의 신들이 노하여 로마가 멸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비난을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답변하는 입장에서 기록한 “왜 하나님은 로마의 멸망을 허락하셨을까?”에 대한 변증서이다.
로마가 외부로부터 침략을 받고 경제적으로 어려웁을 격게된것은 기독교를 받아 들여서가 아니라 기독교가 들어오기전에도 로마에는 무수한 재앙이 있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로마는 오히려 기독교를 받아 들이기 이 전에는 더욱 더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타락하였다. 그러나 로마가 기독교를 받아 들임으로 말미암아 이 만큼이나마 유지할 수가 있었으며 큰 유익을 얻게 된 것 이라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그의 세 번째 명작은 삼위일체론이다. 어거스틴은 삼위일체론에 관하여 서방신학을 최후로 확정시키는데 이를 만큼 발전시켰다. 초대 교회는 하나님에 대한 신학들이 정립되지 못한 시대였다.
아리우스의 성자에 신성과 인성의 문제라든지 터툴리안이나 오리겐이나 아다나시우스등은 성자와 성령이 성부에 종속되었다는 종속설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삼위일체 교리를 다룰 때 신의 단일성, 즉 일체성을 먼저 강조 하였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인격적으로 한 본질에 속하여 창조자 하나님과 전능한 삼위일체가 구별될수 없이 일하고 계신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 하나님이시다. 그 분은 홀로 계시며 위대 하시고 전능하시며 선하시고 의로우시며 자비하시며 보이는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다 지으신 분이시다.
어거스틴은 삼위 일체를 이렇게 부자간으로 설명을 하였다. 아버지는 사랑하는자요 아들은 사랑받는자요 성령은 그 두사이를 있는 사랑이시라고 보았다.
1. 어거스틴의 신학사상
어거스틴의 대표작 가운데 3가지는 첫째가 자신의 삶에 체험적인 회심을 기록한 고백록을 들수 있다 고백록은 그가 회심하여 돌아온 뒤 글을 얼마 되지 않은 400년경에
3. 제3시기
어거스틴은 고향에 돌아와 기독교회의 신앙운동을 위하여 수도원을 세울 계획을 하였으며 남은생에 책을 쓰는일과 힙포의 주교로 헌신하는 시기였다. 그는 고향 타가스테에 금욕주의자들의 작은 공통체를 만들어 남은 생애를 보냈다,
어거스틴은 387년 그의 나이 34세때 밀라노의 목회자 암부로시우스에게 세례를 받고 수도원 건립을 위하여 힙포에 가 392년 힙포의 장로가 되었으며 395년에는 발레리우스가 죽자 그의 뒤를이어 주교가 되었다. 이때 어거스틴은 주교직의 계승은 그의 또다른 생애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소명감을 깨닫고 주교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였다. 그는 설교하는 일과 성경의 해석 및 저술활동외에도 성직자를 위한 수도원을 설립하여 교역자 양성에 힘썼다. 또한 그는 400년경에 자신의 삶에 체험과 구원받은자로서의 찬양시인 참회록 참회록을 쓰게 되었다. 그가 참회록을 쓰게된 동기는 당시 사회에서 어거스틴을 성자요 교부중의 교부라고 위대하게 잃컬어지던 자신을 바로 설명하기 위하여 참회록을 쓰게된 동기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여러분들에게 위대하ㅣ게 보일지 모르지만 나도 죄인중에 죄인이었음을 고맥하며 자신이 있데 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은혜때문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하여 기록하게된것이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저서는 신의 도성이다. 이 책은 어거스틴의 필생에 대작으로서 413년에 시작하여 426년에 완성하였다. 이 책은 당시 지적 도전에 답하는 하나의 역사철학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자들의 변증서라고도 할수 있다.
당시 로마인들의 마음에는 이러한 사상들이 있었다. 옛날 로마의 신들을 섬길 때는 모든것이 평안하던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뒤에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는데 그 것은 로마의 신들이 노하여 로마가 멸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비난을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답변하는 입장에서 기록한 “왜 하나님은 로마의 멸망을 허락하셨을까?”에 대한 변증서이다.
로마가 외부로부터 침략을 받고 경제적으로 어려웁을 격게된것은 기독교를 받아 들여서가 아니라 기독교가 들어오기전에도 로마에는 무수한 재앙이 있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로마는 오히려 기독교를 받아 들이기 이 전에는 더욱 더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타락하였다. 그러나 로마가 기독교를 받아 들임으로 말미암아 이 만큼이나마 유지할 수가 있었으며 큰 유익을 얻게 된 것 이라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그의 세 번째 명작은 삼위일체론이다. 어거스틴은 삼위일체론에 관하여 서방신학을 최후로 확정시키는데 이를 만큼 발전시켰다. 초대 교회는 하나님에 대한 신학들이 정립되지 못한 시대였다.
아리우스의 성자에 신성과 인성의 문제라든지 터툴리안이나 오리겐이나 아다나시우스등은 성자와 성령이 성부에 종속되었다는 종속설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삼위일체 교리를 다룰 때 신의 단일성, 즉 일체성을 먼저 강조 하였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인격적으로 한 본질에 속하여 창조자 하나님과 전능한 삼위일체가 구별될수 없이 일하고 계신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 하나님이시다. 그 분은 홀로 계시며 위대 하시고 전능하시며 선하시고 의로우시며 자비하시며 보이는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다 지으신 분이시다.
어거스틴은 삼위 일체를 이렇게 부자간으로 설명을 하였다. 아버지는 사랑하는자요 아들은 사랑받는자요 성령은 그 두사이를 있는 사랑이시라고 보았다.
1. 어거스틴의 신학사상
어거스틴의 대표작 가운데 3가지는 첫째가 자신의 삶에 체험적인 회심을 기록한 고백록을 들수 있다 고백록은 그가 회심하여 돌아온 뒤 글을 얼마 되지 않은 400년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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