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성령론-구원론 부교재(차영배 교수) 요점정리
본문내용
의 교리를 내세운다. 그는 디3:5절에서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우리에게 성령을 풍성히 부어주신 넓은 의미로 중생으로 보고 성령세례로 간주한다.
행2:38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여기에서 ‘죄사함을 받으라’와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사이에 “kai”(그리하면, 그리고)는 연속적인 연결사이다. 그러나 문제는 연속적인 사건이라고 해서 동시에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 차교수의 말이다.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와 성령의 선물을 받는 것은 반드시 동시에 일어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때로는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고, 그렇지 않고 시차가 있을 수도 있다. 더구나 회개하고 구속함을 받는다는 동사는 과거능동인데 이것이 명령일 때는 단순현재를 가리킨다. 그러나 성령의 선물을 “받으라”는 동사는 미래형이다.
이러한 예로 행8:16절을 들 수 있다.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분명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는 세례 받는 사건과 성령을 받는 사실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았다. 존 스토트는 이 사건을 비정상적인 사건으로 단정한 바 있다.
이에 대해서 차교수는 존 스토트의 이러한 판단에 대해서 자신의 주장과 모순되는 자가당착이라고 말을 하였다. 그는 예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와 성령 세례는 반드시 동시에 일어나야 할 이유가 없고, 또 그렇지도 않았다는 것이 더 성경적이고,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말한다.
더구나 존 스토트가 동시에 일어났다는 사건으로 고넬료의 가정을 드는데. 이것에 대해서도 고넬료의 경우도 엄밀한 의미에서 동시에 일어난 것은 아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완전히 동시에 일어난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 외에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것은 성령의 세례는 넓은 의미의 중생과 같은 것을 볼 수 있으나, 좁은 의미의 중생과는 구별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성령의 세례와 성령의 충만과의 관계는 제자들과 사도바울, 사마리아 교인들과 고넬료, 에베소의 12제자들 등은 첫 충만이 곧 성령의 세례라고 말한다.
그는 어떤 사람(Pache)은 행1:4-5절 이후 성령의 세례를 받으라는 명령이 없다는 주장을 가지고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을 다르게 말하는데 그것은 온당치 않다고 말한다. 그러한 견해는 서신에 없다고 교리화 할 수 없다는 것으로 성경완전영감에 어긋나며, 이단적 사고방식에 가깝다고까지 말한다.
그리고 엡5:18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구절은 성령의 세례를 받은 것을 전제한 말씀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면서 아직도 충만함을 입은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은 성령의 세례를 받으라는 말씀과 동일한 것일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서신에 명령이 없다고 해서 우리에게 아무 의무가 없는 것은 아니다면 일축시킨다.
5. 성령세례의 조건
차교수는 조건과 관련하여 어떻게 정립하느냐에 따라 알미니안 주의와 개혁신학이냐로 판가름 난다고 말한다. 오순절 계통에서는 성령세례의 조건을 믿음, 회개, 기도, 순종, 전적의지, 세례, 죄사함들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조건은 사도바울이 강력하게 반대하였다(갈3:2-14).
기도는 믿음의 발로이다. 믿음이 없이는 기도도 못한다. 순종은 성령을 받은 후에 일어나는 모습이다. 순종하는 것은 현재이고, 성령을 받는 것은 그 전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회개요, 믿으면 곧 죄사함을 받게 된다. 이것을 가시적으로 인치기 위해 세례를 받는다. 전적인 신뢰도 성령을 받아야 참으로 의뢰하게 된다.
그 전에는 육신이 마음의 원대로 따르지 않는다. 베드로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가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했지만 세 번 부인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는 것은 오직 믿음이 조건이다. 갈라디아 3:6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보셨다고 한다.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고, 믿고, 또 믿음으로 성령을 받는 일은 모두 성령으로 시작하는 일이다(갈3:3).
성령으로 시작했으면 끝까지 성령으로 마쳐야 한다. 우리는 성령을 믿음으로 받는다. 믿음은 성령을 받는 수단이다. 물론 성령을 받으면 강한 믿음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 성령을 받기 전에도 믿음이 있었다. 이 믿음으로 성령을 받아 더욱 강한 믿음을 가지게 된다.
나가는 말
지금까지 살펴본 차영배의 성령론은 몇 가지 점에서 좋은 평가를 내려야 할 것 같다. 첫째는 그 동안 중생 곧 성령세례라는 도식으로 인해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마리아 사건(8장)과 에베소 사건(19장)에 대해 넓은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약계에서는 아직도 8장과 19장에 대해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둘째, 중생에 대해서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생에 대한 견해와 성령세례에 대해서 시차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말하는 것이 성경의 역사적인 사건을 두고 하는 것이어서 퍽 인상적이다. 또한 그것이 구원의 서정이라는 도식에 매달려 해석하려는 자들에게 경종을 울렸다고 본다.
그의 주장이 일반적으로 순복음 신학이라고 치부하여 목욕물을 버리려다가 아이를 버리는 과오를 보게 하였다. 즉, ‘성령 충만’이라는 말이 순복음의 것 인양 간주하여 피했다. 그리고 무조건 벽을 쌓으려던 순복음 신학에 대해서 겸허히 손을 내밀 수 있는 작은 채널을 만들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그의 주장이 바빙크에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는 Chahvinck 이거나 Bavinck-Chah 일 수는 없다고 말하지만, 그의 논지의 주장과 결정적인 부분에서는 바빙크의 신학을 가지고 등장한다. 분명 그가 말하는 대로 바빙크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Chahvinck라고 할 정도로 의존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것은 또 하나의 도식에 성경을 맞추려는 잘못을 범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하여튼 그의 성령론은 기존의 학자들에게 논쟁거리를 제공하였다. 그의 세밀한 주장에 대해서 아직 분명하게 호응할 수 없지만, 필자에게 성령론에 대한 연구와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행2:38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여기에서 ‘죄사함을 받으라’와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사이에 “kai”(그리하면, 그리고)는 연속적인 연결사이다. 그러나 문제는 연속적인 사건이라고 해서 동시에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 차교수의 말이다.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와 성령의 선물을 받는 것은 반드시 동시에 일어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때로는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고, 그렇지 않고 시차가 있을 수도 있다. 더구나 회개하고 구속함을 받는다는 동사는 과거능동인데 이것이 명령일 때는 단순현재를 가리킨다. 그러나 성령의 선물을 “받으라”는 동사는 미래형이다.
이러한 예로 행8:16절을 들 수 있다.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분명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는 세례 받는 사건과 성령을 받는 사실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았다. 존 스토트는 이 사건을 비정상적인 사건으로 단정한 바 있다.
이에 대해서 차교수는 존 스토트의 이러한 판단에 대해서 자신의 주장과 모순되는 자가당착이라고 말을 하였다. 그는 예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와 성령 세례는 반드시 동시에 일어나야 할 이유가 없고, 또 그렇지도 않았다는 것이 더 성경적이고,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말한다.
더구나 존 스토트가 동시에 일어났다는 사건으로 고넬료의 가정을 드는데. 이것에 대해서도 고넬료의 경우도 엄밀한 의미에서 동시에 일어난 것은 아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완전히 동시에 일어난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 외에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것은 성령의 세례는 넓은 의미의 중생과 같은 것을 볼 수 있으나, 좁은 의미의 중생과는 구별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성령의 세례와 성령의 충만과의 관계는 제자들과 사도바울, 사마리아 교인들과 고넬료, 에베소의 12제자들 등은 첫 충만이 곧 성령의 세례라고 말한다.
그는 어떤 사람(Pache)은 행1:4-5절 이후 성령의 세례를 받으라는 명령이 없다는 주장을 가지고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을 다르게 말하는데 그것은 온당치 않다고 말한다. 그러한 견해는 서신에 없다고 교리화 할 수 없다는 것으로 성경완전영감에 어긋나며, 이단적 사고방식에 가깝다고까지 말한다.
그리고 엡5:18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구절은 성령의 세례를 받은 것을 전제한 말씀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면서 아직도 충만함을 입은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은 성령의 세례를 받으라는 말씀과 동일한 것일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서신에 명령이 없다고 해서 우리에게 아무 의무가 없는 것은 아니다면 일축시킨다.
5. 성령세례의 조건
차교수는 조건과 관련하여 어떻게 정립하느냐에 따라 알미니안 주의와 개혁신학이냐로 판가름 난다고 말한다. 오순절 계통에서는 성령세례의 조건을 믿음, 회개, 기도, 순종, 전적의지, 세례, 죄사함들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조건은 사도바울이 강력하게 반대하였다(갈3:2-14).
기도는 믿음의 발로이다. 믿음이 없이는 기도도 못한다. 순종은 성령을 받은 후에 일어나는 모습이다. 순종하는 것은 현재이고, 성령을 받는 것은 그 전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회개요, 믿으면 곧 죄사함을 받게 된다. 이것을 가시적으로 인치기 위해 세례를 받는다. 전적인 신뢰도 성령을 받아야 참으로 의뢰하게 된다.
그 전에는 육신이 마음의 원대로 따르지 않는다. 베드로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가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했지만 세 번 부인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는 것은 오직 믿음이 조건이다. 갈라디아 3:6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보셨다고 한다.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고, 믿고, 또 믿음으로 성령을 받는 일은 모두 성령으로 시작하는 일이다(갈3:3).
성령으로 시작했으면 끝까지 성령으로 마쳐야 한다. 우리는 성령을 믿음으로 받는다. 믿음은 성령을 받는 수단이다. 물론 성령을 받으면 강한 믿음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 성령을 받기 전에도 믿음이 있었다. 이 믿음으로 성령을 받아 더욱 강한 믿음을 가지게 된다.
나가는 말
지금까지 살펴본 차영배의 성령론은 몇 가지 점에서 좋은 평가를 내려야 할 것 같다. 첫째는 그 동안 중생 곧 성령세례라는 도식으로 인해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마리아 사건(8장)과 에베소 사건(19장)에 대해 넓은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약계에서는 아직도 8장과 19장에 대해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둘째, 중생에 대해서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생에 대한 견해와 성령세례에 대해서 시차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말하는 것이 성경의 역사적인 사건을 두고 하는 것이어서 퍽 인상적이다. 또한 그것이 구원의 서정이라는 도식에 매달려 해석하려는 자들에게 경종을 울렸다고 본다.
그의 주장이 일반적으로 순복음 신학이라고 치부하여 목욕물을 버리려다가 아이를 버리는 과오를 보게 하였다. 즉, ‘성령 충만’이라는 말이 순복음의 것 인양 간주하여 피했다. 그리고 무조건 벽을 쌓으려던 순복음 신학에 대해서 겸허히 손을 내밀 수 있는 작은 채널을 만들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그의 주장이 바빙크에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는 Chahvinck 이거나 Bavinck-Chah 일 수는 없다고 말하지만, 그의 논지의 주장과 결정적인 부분에서는 바빙크의 신학을 가지고 등장한다. 분명 그가 말하는 대로 바빙크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Chahvinck라고 할 정도로 의존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것은 또 하나의 도식에 성경을 맞추려는 잘못을 범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하여튼 그의 성령론은 기존의 학자들에게 논쟁거리를 제공하였다. 그의 세밀한 주장에 대해서 아직 분명하게 호응할 수 없지만, 필자에게 성령론에 대한 연구와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