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한다. 이때 구원의 내용은 질병의 치유와 육체적 건강, 정신적 안정, 취업과 승진, 진학, 출산, 사업의 번창, 풍작 혹은 풍어, 재해의 방지 내지 퇴치……등 좀 더 현세 구복적인 것들로부터, 미래에 대한 지식, 초능력의 획득, 신적인 힘 혹은 원리와의 신비적 일치, 사악한 초월적 힘의 제거 혹은 억제, 죽은 자의 구원, 내세의 행복……등 좀 더 우주적초월적내세적인 것들까지 포함될 수 있다.(강인철, 2002:228 각주 14번)
다시 말해 종교적 이익들은 모든 개신교인들이 추구하는 종교적이고 초월적인, 영적 보상, 즉 “구원”이나 “영생(영원한 생명)” “복(福)”으로 표상되는 사회자본으로 기능하는 소속감과 같은 심리적인 보상과 경제자본과 같은 물질적 보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신자의 영혼이 사후(死後)에 천국에 가는 것과 같은 초월적인 의미(만)으로서 주장되는 구원이나 “영적인 복”은 사랑이나 마음의 안정, 친밀감이나 유대감, 물질적인 부유함과 같은 정신적이거나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이윤으로서 사회적인 층위에서 확인된다. 그러므로 종교자본은 개신교인의 종교생활의 궁극적 목적이자 성스러움의 완성인 “구원” 그 자체일 뿐만 아니라, 구원을 가능하게 해주는 “본질”적이거나 보조적인 수단이나 조건들-서비스를 포함한다. 그리고 구원을 가능하게 해주는 수단이나 조건들은 이것들을 통하지 않고는 구원에 접근하는 길은 원천적으로 차단된다는 점에서 “구원 그 자체”와 제자훈련이나 교리와 같은 구원의 “수단”은 분리가 불가능하다(김현준, 2008:161).
구원이나 은혜는 시쳇말로 “공짜”가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모두가 구원이나 은혜가 공짜인 것으로 공모하고 오인함으로써 구원의 세속적(?) 차원은 은폐되는 동시에 영적인(?) 제자훈련은 가능해지는 것이다. 신자들은 교회로부터 주어진 구원이나 은혜의 가치법칙 내지 거래의 규칙을 최대한 충실히 따르는 한에서 최대의 종교적(상징적) 이윤을 획득하려고 한다. 예컨대 개신교 신학의 구원론에서 구원을 얻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교리)은 종교적 이익을 얻기 위한 교회권력에 대한 신자들의 투쟁의 산물 중 하나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마두로(Otto Maduro)에 의하면,
성직층의 종교적 이익은 무엇보다 종교적 재화(즉 구원수단들)의 생산, 재생산, 교환, 분배에 대한 권력, 그리고 종교적 생산수단에 대한 권력을 보존확대심화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평신도층의 종교적 이익은 성직자에 대립하면서도 그에 종속된 상태에서 종교적 생산수단의 박탈과정을 억제하고 가능하다면 역전시키려는 데 있다. 즉 평신도의 이해관계는 최소한 성직층에 대한 최소한의 양보만으로 종교재화를 획득하는 데 있으며, 최대치로는 종교적 생산수단의 전면적인 재전유이다.(Maduro, 1988:168)
마두로가 언급한 권력자로서의 성직자 계층에 대한 지배/저항의 문제는 통치성의 문제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신자는 예수를 믿기(시작)만 하면 바로 영생을 확보할 수 있다. 즉 최소한의 종교적 헌신으로 최대한의 효과(영생)를 얻는다. 구원의 조건이 많아질수록, 혹은 구원에 이르는 과정이 복잡해질수록, 즉 진입장벽(또는 진입비용)이 높일수록 구원과 구원과정 전반에 대한 교회권력의 독점권과 지배력은 강해지지만 역설적으로 너무 까다롭고 복잡한 구원조건은 교회의 경제자본을 포함하여 전체적인 상징자본(종교자본)의 축적에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권력과 신자들 간에는 (불공정한 권력관계와 게임규칙이 은폐된 상황 하에서) 적정한 타협점이 생기는데, 구원(영생)의 문턱을 낮추는 대신, 일종의 구원과 은혜의 질적 등급차인 하늘나라의 “상급”과 교육과정에서의 진급이라는 보상체계(상징자본)에 대한 욕망의 자발적 추구를 독려함으로써 양측 모두 일정부분 (불균등한) 이익을 얻는다. 교회권력은 교회권력의 입장에서 종교자본인 신자수를 손쉽게 확보하면서도 신자들을 지속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한 것이다. 한편 신자들은 더 많은 헌신과 복종을 하는 만큼 더 많은 은혜(물질적감정적사회적 보상)를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교회가 제자훈련을 통해 생산/제공한 특정한 종교재(구원)에 대한 특정한 욕망과 게임의 법칙에 더욱 깊이 함몰된다. 즉 교회가 제공하는 구원의 게임(제자훈련)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그 구원의 한계에 갇혀버리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교회(권력)는 제자훈련을 비롯한 일련의 종교의례나 교육제도를 통해 구원에 대한 제도교회의 욕망과 구원에 대한 이미지를 생산하거나, 초월적 지평에 있는 구원에 대한 욕망을 일련의 사회적/심리적 보상(사회자본 및 상징자본)에 대한 욕망으로 전이시킨다.
제자훈련은 교회의 자기계발이고, 구원은 교회의 통치성이다.
청년들에게 구원은 세속적인 것만도 아니고, 사회적인 문제-가령 자본주의-에 대한 일방적 회피 차원인 종교적인 것만도 아니다. 구원은 각자 그것이 사회적인 것이든 종교적인 것이든 간에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자아성취나 자기발전의 가능성(자아재창조)에 집중(자기배려)함으로써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보상을 성취/획득되는 지극히 현실적인 맥락에 서 있다.
‘구원’과 구원담론은 분명 종교장(교회) 내에서의 생산과 거래의 산물이자 소비주체의 문제로 이해될 수 있지만, 교회라는 구원재의 유통이 제한적인 공간과 제자훈련이라는 불공정한 게임의 법칙 내에서만 인지되고 획득될 수 있는 상징자본이라는 점에서 청년신자들에 대한 교회권력의 통제에 유리한 상징폭력이자 통치기술이다.
이 구원의 현실적(교회적) 과정이자 통치술인 제자훈련의 목적은 마치 일종의 텅빈 기표인 ‘제자’라는 단어의 재생산에 있는 것 같다. 이것이 개신교에서 자기 테크놀로지의 핵심이다. 즉 선교적 주체, “‘개신교적 인물’을 오로지 ‘재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주체”로서 주체화되는 것이다. 하지만 ‘제자’가 무엇인지, 그 내용 자체는 지속적으로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교회는 어떤 제자인지의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것 같다. 제자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도 제자훈련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제자들을 끊임없이 배출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종교적 이익들은 모든 개신교인들이 추구하는 종교적이고 초월적인, 영적 보상, 즉 “구원”이나 “영생(영원한 생명)” “복(福)”으로 표상되는 사회자본으로 기능하는 소속감과 같은 심리적인 보상과 경제자본과 같은 물질적 보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신자의 영혼이 사후(死後)에 천국에 가는 것과 같은 초월적인 의미(만)으로서 주장되는 구원이나 “영적인 복”은 사랑이나 마음의 안정, 친밀감이나 유대감, 물질적인 부유함과 같은 정신적이거나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이윤으로서 사회적인 층위에서 확인된다. 그러므로 종교자본은 개신교인의 종교생활의 궁극적 목적이자 성스러움의 완성인 “구원” 그 자체일 뿐만 아니라, 구원을 가능하게 해주는 “본질”적이거나 보조적인 수단이나 조건들-서비스를 포함한다. 그리고 구원을 가능하게 해주는 수단이나 조건들은 이것들을 통하지 않고는 구원에 접근하는 길은 원천적으로 차단된다는 점에서 “구원 그 자체”와 제자훈련이나 교리와 같은 구원의 “수단”은 분리가 불가능하다(김현준, 2008:161).
구원이나 은혜는 시쳇말로 “공짜”가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모두가 구원이나 은혜가 공짜인 것으로 공모하고 오인함으로써 구원의 세속적(?) 차원은 은폐되는 동시에 영적인(?) 제자훈련은 가능해지는 것이다. 신자들은 교회로부터 주어진 구원이나 은혜의 가치법칙 내지 거래의 규칙을 최대한 충실히 따르는 한에서 최대의 종교적(상징적) 이윤을 획득하려고 한다. 예컨대 개신교 신학의 구원론에서 구원을 얻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교리)은 종교적 이익을 얻기 위한 교회권력에 대한 신자들의 투쟁의 산물 중 하나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마두로(Otto Maduro)에 의하면,
성직층의 종교적 이익은 무엇보다 종교적 재화(즉 구원수단들)의 생산, 재생산, 교환, 분배에 대한 권력, 그리고 종교적 생산수단에 대한 권력을 보존확대심화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평신도층의 종교적 이익은 성직자에 대립하면서도 그에 종속된 상태에서 종교적 생산수단의 박탈과정을 억제하고 가능하다면 역전시키려는 데 있다. 즉 평신도의 이해관계는 최소한 성직층에 대한 최소한의 양보만으로 종교재화를 획득하는 데 있으며, 최대치로는 종교적 생산수단의 전면적인 재전유이다.(Maduro, 1988:168)
마두로가 언급한 권력자로서의 성직자 계층에 대한 지배/저항의 문제는 통치성의 문제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신자는 예수를 믿기(시작)만 하면 바로 영생을 확보할 수 있다. 즉 최소한의 종교적 헌신으로 최대한의 효과(영생)를 얻는다. 구원의 조건이 많아질수록, 혹은 구원에 이르는 과정이 복잡해질수록, 즉 진입장벽(또는 진입비용)이 높일수록 구원과 구원과정 전반에 대한 교회권력의 독점권과 지배력은 강해지지만 역설적으로 너무 까다롭고 복잡한 구원조건은 교회의 경제자본을 포함하여 전체적인 상징자본(종교자본)의 축적에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권력과 신자들 간에는 (불공정한 권력관계와 게임규칙이 은폐된 상황 하에서) 적정한 타협점이 생기는데, 구원(영생)의 문턱을 낮추는 대신, 일종의 구원과 은혜의 질적 등급차인 하늘나라의 “상급”과 교육과정에서의 진급이라는 보상체계(상징자본)에 대한 욕망의 자발적 추구를 독려함으로써 양측 모두 일정부분 (불균등한) 이익을 얻는다. 교회권력은 교회권력의 입장에서 종교자본인 신자수를 손쉽게 확보하면서도 신자들을 지속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한 것이다. 한편 신자들은 더 많은 헌신과 복종을 하는 만큼 더 많은 은혜(물질적감정적사회적 보상)를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교회가 제자훈련을 통해 생산/제공한 특정한 종교재(구원)에 대한 특정한 욕망과 게임의 법칙에 더욱 깊이 함몰된다. 즉 교회가 제공하는 구원의 게임(제자훈련)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그 구원의 한계에 갇혀버리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교회(권력)는 제자훈련을 비롯한 일련의 종교의례나 교육제도를 통해 구원에 대한 제도교회의 욕망과 구원에 대한 이미지를 생산하거나, 초월적 지평에 있는 구원에 대한 욕망을 일련의 사회적/심리적 보상(사회자본 및 상징자본)에 대한 욕망으로 전이시킨다.
제자훈련은 교회의 자기계발이고, 구원은 교회의 통치성이다.
청년들에게 구원은 세속적인 것만도 아니고, 사회적인 문제-가령 자본주의-에 대한 일방적 회피 차원인 종교적인 것만도 아니다. 구원은 각자 그것이 사회적인 것이든 종교적인 것이든 간에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자아성취나 자기발전의 가능성(자아재창조)에 집중(자기배려)함으로써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보상을 성취/획득되는 지극히 현실적인 맥락에 서 있다.
‘구원’과 구원담론은 분명 종교장(교회) 내에서의 생산과 거래의 산물이자 소비주체의 문제로 이해될 수 있지만, 교회라는 구원재의 유통이 제한적인 공간과 제자훈련이라는 불공정한 게임의 법칙 내에서만 인지되고 획득될 수 있는 상징자본이라는 점에서 청년신자들에 대한 교회권력의 통제에 유리한 상징폭력이자 통치기술이다.
이 구원의 현실적(교회적) 과정이자 통치술인 제자훈련의 목적은 마치 일종의 텅빈 기표인 ‘제자’라는 단어의 재생산에 있는 것 같다. 이것이 개신교에서 자기 테크놀로지의 핵심이다. 즉 선교적 주체, “‘개신교적 인물’을 오로지 ‘재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주체”로서 주체화되는 것이다. 하지만 ‘제자’가 무엇인지, 그 내용 자체는 지속적으로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교회는 어떤 제자인지의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것 같다. 제자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도 제자훈련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제자들을 끊임없이 배출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