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주민 및 관료의 행태(행동과태도)에 대하여 논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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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북한 주민 및 관료의 행태(행동과태도)에 대하여 논하여라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국가기관 조직원칙
2. 조선노동당의 위상과 체계
3. 정권기관
4. 김정일 지도체제의 특징

본문내용

50주년 기념일을 기점으로 군 원로들을 대다수 승진시키면서 그들의 권력서열은 당중앙위원회 비서들보다 높아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1996년 7월 김일성 2주기 추모행사에서는 군 수뇌부 인물들에 대한 서열 상승 조정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또한 김정일의 공식 활동 중 군 관련 행사의 횟수는 전체 활동의 비율에서 점차 증가하게 된다. 1994년도 김정일의 공식 활동에서 군 관련 행사 비율은 4.7%에 불과하였지만 1995년에는 57%로 급증하고 서서히 증가하여 1998년에는 70%를 차지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군부의 위상이 한층 더 강화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붉은기 사상’을 주창하며 정치적으로 군부와의 협력을 통한 통치를 펼치게 된다. 1995년에는 북한은 군 중심정책을 펴는 정치방식인 ‘선군 정치’를 하는데 그 의미는 ‘인민군대를 기둥으로 믿고 그에 의거하여 사회주의 위업을 끝까지 이끌어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군부의 위상 강화의 이유는 김일성 사망 이후 4년 동안 김정일이 최고지도자로 자리를 잡기 전인 정치적 과도기 상황에서 군부는 체제유지의 버팀목 이였기 때문이다. 특히 이 시기에 김정일은 군 원로들로부터의 지속적인 지지를 확보해야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인사 승진은 당연한 일이였다. 김정일 개인에게 있어 군 경력이 없고 지도력이 부족하다고 지적된 김일성 사후시점에서 군부는 체제유지와 내부적 불만을 통제할 수 있었던 유일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당시 북한은 중견 간부급들의 국외 탈출사건, 체제에 대한 불만 토로 및 부정부패는 기강 해이 현상이 발생되는 시점 이였기에 군부의 지지를 얻는 것만이 안정적으로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필수적인 요건이었다. 1993년까지는 북한의 외교부가 모든 협상에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1997년부터는 군부가 영향력을 강화하기 시작한다. 그 예로 1997년 4자회담과 관련하여 외교부의 찬성에도 불구하고 군부의 강한 반대로 의제까지 바꾸게 된다.
이러한 현상들은 김정일과 군부의 관계가 과거의 지배하는 자와 그를 따른 관계에서 벗어나 군부는 김정일의 후계체제를 보장해주고, 김정일은 군부 세력을 후원하는 공생관계로 변하게 된다. 또한 과거 노동당의 조요 구성위원이 과거와는 다르게 군부세력이 상당수 포함되면서 노동당을 중심으로 한 북한의 권력구조는 국방위원회와 국방위원장을 중심으로 정책이 운영되게 된다.
4. 김정일 지도체제의 특징
형식적으로는 국가권력의 분산과 집단지도체제의 모양을 갖추고 있으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실상 국가최고지도자의 역할을 하는 유일영도체제라는 점이다. 즉, 김정일은 당 총비서 및 국방위원장으로서 당·군을 장악하고 있으며 실질적으로 모든 국가기관이 김정일의 지도를 받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영도체제는 주체사상에서의 '수령론(首領論)'이나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에 의해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북한의 모든 정치조직과 기구, 인민들은 수령의 통일적 지휘 아래 하나와 같이 움직이며, 수령의 교시와 명령·지시를 무조건 받아들이고 관철해야 한다. 더욱이 북한 헌법 서문에서는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 조선인민은 조선로동당의 령도밑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사상과 업적을 옹호고수하고 계승 발전시켜 주체혁명위업을 끝까지 완성하여 나갈 것"을 강조하고 있다. 김일성의 사상과 영도를 국가통치원리로 표방하고 있다는 점은 김일성 주석의 혁명적 후계자인 김정일의 유일영도체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군사우선주의가 더욱 강화되고 있음을 들 수 있다. 김일성 주석 사망이후 북한 군부의 영향력이 노동당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화되었으며, 1996년에는 4월 25일 인민군 창건일과 7일 27일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일' 등 군 관련 기념일이 공휴일이자 국가적 명절로 지정되었다. 또한 군사지도자들의 권력핵심에의 진출도 두드러진 바, 1998년 7월 26일 실시된 제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는 군부인물이 제9기에 비해 약 2배 가까이 증가되었다. 특히 1998년 개정 헌법에서는 국방위원회가 북한의 최고 군사지도기관으로 격상되었을 뿐만 아니라, 명실상부한 최고권력기관이 되었다. 이처럼 군사를 우선시하는 것을 가리켜 북한에서는 김정일의 선군정치(先軍政治)로 부르며 찬양하고 있다. 이러한 선군정치는 2000년대 들어 더욱 강조되고 있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경제건설보다 중요한 것은 군대를 강하게 만드는 것이며 총대가 강하면 강대한 나라가 될 수 있다"는 표현으로 군사우선정책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모든 부문에서 '신사고'를 표방하고 있는 2001년도에도 북한에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군혁명시대'라는 새로운 역사를 열었다고 선전하는가 하면, "선군은 조선혁명의 백전백승의 기치이며, 사회주의 미래를 대표하는 정치방식"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김정일체제 출범을 계기로 김정일 국방위원장 측근들이 주요 권력기구의 핵심을 장악함과 동시에 새로운 테크노크라트층들이 부상하고 있다. 우선 주요 권력기구의 핵심 중에서도 노동당 정치국이 약화된 대신에 1980년대부터 김정일이 직접 장악하고 있는 비서국의 권한이 대폭 강화되고, 실질적인 지도·통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또한 당·내각·군 등 주요 권력기관의 인사개편을 통해 60∼70대의 원로계층이 물러나는 대신에 50∼60대의 김정일 측근들이 부상하고 있으며, 경제부문에 있어서는 40∼50대의 새로운 테크노크라트들이 핵심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2000년 이후 내각의 재정상, 무역상, 중앙은행 총재, 농업상, 경공업상 등 경제부서 책임자를 전격 교체한 것은 서방의 대북추진 및 무역확대를 위한 포석으로 보인다. 이처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영원한 주석'인 김일성의 유훈통치를 배경으로 당 총비서와 군총사령관의 직책을 가지고 당과 국가기관을 지도·감독하고 있다. 요컨대 김정일 지도체제하의 북한에서는 통치권자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정점으로 각 분야의 정책 집행부서들이 포진하고 있는데, 과거 상층조직들이 인적 중복을 통해 상호 연계되던 것과는 달리 김정일 시대에는 이들간 횡적인 연계가 매우 낮다는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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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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